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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퍼스트맨>을 통해 삶을 담아내는 방식, 혹은 그가 해석한 삶에 대하여

상실을 위한 운동

<퍼스트맨>의 제작자 스티븐 스필버그의 세계는 이성으로 가득 차 있다. 스필버그가 미지를 만날 때조차, 그 미지는 이성적이며, (수학적 방식으로) 대화가 가능한 존재들이다(<미지와의 조우>(1977)). 이성과 합리는 상식으로 이어지고, 상식은 도덕으로, 휴머니즘으로 이어진다. 스필버그의 영화에는 합리적인 판단의 주체가 등장하고, 이 인물은 비극과 조금은 거리를 두고 있다. 즉 스필버그는 말할 수 없는 희생자의 눈이 아니라, 희생자를 보듬는 휴머니스트의 눈으로 본 비극을 말한다(<쉰들러 리스트>(1993)). 그러나 상식은 언제나 다수의 상식이며, 도덕은 언제나 일반적인 도덕이다. 그가 도덕을 말할 때 그의 ‘보편’에서는 항상 무엇인가가 배제되고 있으며, 어떤 ‘도덕’을 보편적인 도덕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는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래서 그의 휴머니즘에 국가주의가 어른거리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퍼스트맨>의 감독 데이미언 셔젤에게도 보수성이 있다. 셔젤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상승의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이 욕망은 비판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표현된다. 셔젤은 그들의 욕망이 권력자(<위플래쉬>(2014)의 플렛처) 혹은 사회(<라라랜드>(2016)의 할리우드)에 의해 주조되었으며, 그 욕망이 권력을 유지시키는 동력이라는 점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그러나 셔젤의 인물들은 보수주의와 융화하지 못한다. 인물들은 상승의 욕망이 아니라 비합리적이고 모호하며 어두운 힘에 의해 추동된다는 것이 밝혀지며, 이 어두운 힘은 모든 것들과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불화를 일으킨다. 그래서 인물들은 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위치가 고정되지 않거나(<라라랜드>), 권력의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위플래쉬>).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상승의 과정

<퍼스트맨>도 표면적으로는 상승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에서는 이 상승이 물리적이며 시각적으로 표현된다. 첫 번째 시퀀스에서 선회(궤도운동)와 상승운동이 대비되는데, 선회해야 하는 닐(라이언 고슬링)의 우주선이 점점 상승하고, 닐은 통제권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상승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이 시퀀스는 영화 전체에 대한 비유로 해석할 수 있다. 닐이 달에 가고자 하면 할수록 그의 일상과 가정은 흔들린다. 닐이 상승하면 할수록 그는 통제권을 잃고, 그의 안정은 파괴되며, 그는 죽음과 가까워진다.

회전운동 또한 하나의 비유로 해석할 수 있다. 닐의 아내 자넷(클레어 포이)과 이웃의 대화에서 회전운동에 대한 단서가 드러나는데,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정신이 안정되어 있어서 닐과 결혼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자넷에게 이웃은 치과의사의 아내와 관련한 일화를 들려준다. 6시면 칼퇴근하는 치과의사를 남편으로 둔 여자가 너무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우주비행사의 운동과 치과의사의 운동이 대비된다. 우주비행사의 운동이 상승운동이라면 치과의사의 운동은 시계처럼 회전하는 운동이며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는 운동이다.

닐이 우주에서 제미니 8호를 타고 다른 우주선 에이지나와 도킹을 시도하는 시퀀스에서 영화는 지구에 남은 자넷의 일상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닐이 에이지나와 도킹에 성공한 뒤 보여주는 자넷의 일상은 시시포스의 굴레처럼 반복적인 삶이다. 그리고 그 후 닐이 탄 제미니 8호는 회전하기 시작한다. 에이지나의 문제라고 생각한 닐은 에이지나를 분리하지만 문제는 에이지나가 아니라 닐이 탑승한 제미니 8호에 있었다. 제미니 8호의 고장으로 동력이 계속 발산되고 있었던 거다. 위치를 이동하지 않은 채 힘이 발산되면서 회전이 반복되고 탑승자들은 강한 압력에 짓눌려 있다. 치과의사의 아내가 반복적인 일상에 힘들어하는 것도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에서 발산되는 자신의 힘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힘은 닐이 한 위치에 고정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닐의 시점숏이 계속 나온다. 제미니 8호가 상승할 때, 선체는 흔들리고 너무 밝은 탓에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그 후 우주에서 닐은 에이지나를 찾기 위해 자신이 탑승한 제미니 8호의 내부 조명을 끈다. 선체가 어둠에 잠기고 나서야 닐은 에이지나가 내뿜는 빛을 볼 수 있게 된다. 미약한 빛을 내뿜는 존재를 보기 위해서는 어둠이 필요하다(어둠 속에서만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영화 관람에 대한 비유로 볼 수도 있다). 닐은 보기 위해 끝없이 어두운 곳으로 향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동료 앨리엇이 죽은 뒤에도 닐은 또 다른 동료 에드와의 대화를 거부한 채 어두운 뒷마당에서 밤하늘을 바라본다.

닐에게 보는 행위는 중요하다. 닐은 왜 달에 가고 싶냐는 질문에, 위치에 따라 보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오래전에 봤어야 할 무엇인가를 볼 수 있을 거라고 덧붙인다. 결국 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위치를 이동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보는 것이 왜 이토록 중요한가? 두 번째 시퀀스에서 닐이 딸에게 불러주는 노래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난 달님을 보고, 달님은 날 보죠. 날 비추는 저 빛이 사랑하는 이도 비춰주길.” 이 노래는 보는 행위를 통해서 달과 내가 연결되고, 어딘가에서 달을 보고 있을 사랑하는 이에게까지 연결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닐은 대화보다는 응시를 통해 타자와 연결된다. 마지막 신에서 자넷과 닐이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닐이 대화보다 응시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닐이 표현에 서툴러서이기도 하지만, 언어로는 모두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의 존재 때문이기도 하다.

마음에 닿기 위하여

단지 다른 무엇을 보기 위해 현재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합리적인가? 영화는 끝없이 묻는다. 이런 희생을 치를 만큼 달에 가는 일이 중요한 일인가? 닐은 탐험을 위한 탐험이 되지 않을 것이라 말했지만, 정말 그런가?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설명하지 못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한다. 이것은 논리적인 일이 아니라고, 일종의 광기인지도 모른다고 암시한다. 닐에게는 아주 오래전 최초로 땅을 딛기로 결심했던 수중생물이 품었던 광기가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닐은 달에 착륙한 뒤 빛이 비치지 않는 곳을 바라본다. 닐은 오래전에 봤어야 할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 달에 가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닐이 정작 달에서 보는 것은 완전한 어둠이다. 닐이 달의 어두움을 볼 때 달의 어두움에 비치는 것은 닐의 어두움이다. 땅속에 묻지 못한 딸과의 기억들, 그리고 자신의 혼란. 닐이 끝내 닿은 곳은 위치를 알 수 없는 어두운 자신의 마음이며, 닐은 오직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영화는 표면적으로 상승운동과 궤도운동을 대비시키고 있지만, 심층에서는 목적을 향한 운동과 목적을 상실하기 위한 운동이 대비된다. 셔젤에게 삶이라는 운동은 안정이나 행복과 같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렇기에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삶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퍼스트맨>은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그래서 설명될 수도,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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