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인터뷰
<사바하> 배우 박정민, "감독님이 만든 종교 안에서 살아가면 될 것 같았다
이주현 사진 백종헌 2019-03-14

박정민은 <사바하>의 나한보다 더 노랗게 탈색한 머리를 하고 카페에 앉아 있었다. 초미세먼지의 공습 속에서도 그의 머리색만은 개나리보다 화사했다. 이것은 또 무엇을 위한 위장술일까. 곧 촬영에 돌입하는 영화에서 10대 캐릭터를 맡아 머리색을 바꾼 것이라 말하며 박정민은 괜히 멋쩍어한다. 청소년을 연기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는 뜻일 텐데, 그래도 관객은 믿게 될 것이다. 박정민은 최근 2~3년 사이 밀도 높은 다작, 보폭 큰 변신을 거듭했다. <그것만이 내 세상>(2017)의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진태, <염력>(2017)의 인권변호사 정현, <변산>(2017)의 래퍼 학수, <사바하>의 ‘미스터리한 자동차 정비공’ 나한을 거쳐 <사냥의 시간>과 <타짜: 원 아이드 잭>까지 촬영을 마친 상태다. <사바하>를 봤다면 알겠지만 ‘미스터리한 자동차 정비공’으로 나한을 소개한 건 조크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영화를 홍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캐릭터조차 설명할 수 없었던 박정민에게 한풀이 랩이라도 할 수 있게 비트라도 깔아주고 싶었지만, 비트 대신 인터뷰 멍석을 깔기로 하고 박정민을 만났다. <사바하>로 시작한 이야기는 영화에 대한 애정 고백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사바하>는 몇번 보았나.

=세번 봤다. 반복해서 볼수록 슬퍼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보면 볼수록 영화가 좋았다. 홍보성 말 같지만 진심이다.

-내가 출연한 영화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영화가 있고, 출연 여부와 무관하게 애정이 가는 영화가 있을텐데, <사바하>는 후자가 아닐까 싶다.

=매 작품 좋은 영화를 만들려고 애쓴다. 그런데 <사바하>는 촬영할 때부터 내가 애쓰지 않아도 좋은 영화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영화를 어서 보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도 무리를 해서라도 이 영화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거 보면 왠지 배 아플 것 같았다.

-독립영화에만 출연한 줄 아는 사람도 있지만 상업영화를 꽤 많이 찍었다. 반복된 이미지 없이, 매번 성격과 느낌이 사뭇 다른 상업영화들에 출연했다.

=<동주>(2015)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수 있는데, <동주> 이전엔 오디션을 보고 선택받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니 내 취향이 작품 선택에 반영되기는 힘들었다. 그저 나를 선택해준 영화 안에서 내 몫을 다하려고 했다. ‘이 시나리오 재밌는데 해보고 싶다’ 그렇게 선택권이 주어진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물론 지금도 대단한 선택권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사바하>의 장재현 감독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출신인데, 이전에도 인연이 있었나.

=이번에 처음 봤다. 나와 학교생활을 하던 시기가 달랐고, 오컬트 단편 <12번째 보조사제>(2014)로 유명해졌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었다.

-장재현 감독이 최근 <씨네21>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박정민씨는 얼굴에 어두운 면모를 갖추고 있고, 배우로서 총알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현실적인 연기를 하는 배우라 함께 작업해보고 싶었다.”

=우선, 언제부터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좀 염세적인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어두워 보이는 건가 싶다. 현실적인 연기를 한다는 건,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인데 잘 봐주신 것 같다. 데뷔작인 <파수꾼>으로 연기를 배웠다. 그러다 보니 진짜 이 세상에 있는 일처럼 연기를 해야 보는 사람도 더 몰입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총알이 많다는 건 잘 모르겠다. (웃음)

-본인은 모르겠다 했지만, 총알을 두둑하게 챙겨서 현장에 가는 배우이지 않나. <사바하> 땐 어떤 총알들을 쟁여 갔나.

=총알을 두둑하게 챙겨서 가려고 한다. 영화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배우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그런 거니까. 그런데 <사바하> 땐 무용지물이었다. 감독님이 만들어놓은 세계관이 공고해서 내가 준비한 것들이 썩 필요가 없더라.

-즉흥연기보다는 간결하고 정확한 연기를 주문했다고 들었다.

=처음엔 애먹었다. 즉흥연기라는 게 그 순간에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거나 하고 싶은 행동이 있어서 표현하는 건데, 그걸 못하게 되면 여러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면 몸도 굳는다. 그런데 <사바하>는 장르의 특색, 인물의 특색이 분명한 작품이 어서 뭔가 많이 보여주려고 하면 안 됐다. 최대한 자제하고 간결하게 연기하는 게 맞더라. 처음엔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다가 마지막 테이크에서 감독님이 ‘다 빼고 해볼게요’ 해서 연기하면 그 테이크가 제일 나았다.

-<변산>의 학수, <그것만이 내 세상>의 진태처럼 최근엔 랩이나 피아노 등 배우고 준비할 게 많은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에 비해 <사바하>의 나한은 기술적으로 익혀야 할 것은 없는 캐릭터였는데, 나한을 준비하는 과정에선 무엇에 집중했나.

=이야기를 잘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변산>이나 <그것만이 내 세상>은 이야기를 다각도로 생각하며 연기해야 하는 작품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바하>는 이야기가 복잡하고 여러 단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때문에 연기가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앞에서 헛발질을 해놓으면 뒤에 가서 수습이 안 될 것 같았다. 치밀하게 연기해야 된다는 생각에 시나리오를 굉장히 많이 읽었다. 시나리오를 들여다볼수록 나한이 쓸쓸하고 가엽고 먹먹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란걸 알게 됐다.

-연구하고 깊이 파는 걸 좋아하니, 종교서적을 읽는다거나 종교 공부를 해볼 생각도 했을 것 같은데.

=그러려고 했는데 감독님이 하지 말라고 하더라. 자기한테 물어보면 된다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영화에 나오는 종교가 실존하는 종교가 아니라 불교 세계관을 차용한 건데, 어쭙잖게 불교 서적을 읽고 감독님과 얘기를 나누면 의미 없는 대화만 길어질 것 같더라. 감독님이 만든 종교 안에서 살아가면 될 것 같았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한은 김제석의 선택을 받은 양아들이자 미륵을 보좌하는 사천왕이자 살인자이기도 하다. 이 인물이 영화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꽤 많다.

=장르적으로는 긴장감을 유발시켜야 하는 캐릭터다. 기본적으로는 영화의 정서와 감정을 담당하고 있는 인물이라 생각했다. 감정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운 아이, 여기(가슴) 안이 가장 시끄러운 인물일 거라 생각했다. 겉으로는 표정 변화가 없지만, 100% 악의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사이코패스도 아니다. 악몽을 꾸고 괴로워하는 아이다. 자신을 거두어준 아버지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지만 결국 그 믿음에 균열이 생기고 한순간에 무너지는데, 그 과정을 따라가면 이 인물이 잘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영화가 개봉하고 난 지금이야 이렇게 캐릭터 이야기를 소상히 하지만 홍보 초반엔 나한이 어떤 캐릭터인지 말하지 못했다. 캐릭터를 설명하는 게 스포일러여서 조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답답함이 컸겠다.

=자동차 정비도 안 하는데 자동차 정비공이라고 소개됐으니. (웃음) 또 이정재 선배님과 현장에서 만나는 신이 별로 없었는데 홍보 포인트가 선배님과의 케미스트리가 돼버리고. 답답했다. 식은땀도 났고. 감독님이 알려준 대로 ‘자기의 신념에 따라서 악을 쫓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다녔는데, 이것도 얼마나 뜬구름 잡는 얘기인가. 그러니 자꾸 머리 탈색한 얘기만 물어보고. 탈색이 힘들지 않았냐고 하는데 내가 뭐가 힘들겠나. 헤어디자이너가 힘들지. 그래서 영화가 개봉하고 좀 지난 지금 시점에서 인터뷰하는 게 더 재밌다. (웃음)

-탈색 얘기가 나왔으니, 검은 머리가 자라 조금은 지저분해 보이는 노란색 탈색 머리로 나온다. 탈색 유경험자인 동료 기자 중엔 ‘왜 뿌염(뿌리염색)을 하지 않았을까’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 역시 감독님의 치밀한 계산이었다. 머리가 샛노라면 지나치게 꾸미고 다니는 애처럼 보이니까. 처음엔 나한이 내가 생각했던 룩이 아니어서 당황스러웠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짧은 머리에 어두운 색 옷을 입지 않을까 했는데 비비드하게 꾸며놓아서. 그런데 판타지적인 세계에 색채감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듣고 보니, 아 이렇게 비틀 수도 있구나 싶으면서 신선했다. 아무튼 그런 머리로 8개월을 사는 건 쉽지 않았다. (웃음)

-‘그것’(이재인)과 나한이 대면하는 마지막 창고 장면은 나한의 감정적 동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인데, 찍으면서 부담이 많이 됐다고.

=삭발을 한 (이)재인이도 부담이 컸겠지만, 내게도 그 장면이 감정적으로 제일 어렵고 부담스러웠다. 아는 감정도 아니고, 아는 상황도 아니고, 겪어보지도 못했고, 앞으로 겪어보기도 힘들 것 같은 상황에서, 낯설게 생긴 존재 앞에서 감정적으로 와르르 무너져야 하는 그 신이 정말 어려웠다. 누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머리로는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감정을 어떻게 끌어올리느냐가 관건이었다. 다행히 현장에서 많이 헤매진 않은 것 같다.

-<염력> <그것만이 내 세상> <변산> <사바하> <사냥의 시간>까지, 최근 2~3년간 몰아치듯 연기만 하는 모습이다.

=보통의 직장인들은 매일매일 출근하고 퇴근하고 일을 하며 산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일하며 살아가는데 내가 쉬지 않고 연기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싶다. 물론 운이 좋아서, 도저히 놓칠 수 없는 작품들을 계속 만나게 된 것도 있다. 만약 다른 형태의 창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조금 쉬면서 다른 일에 집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곧 촬영에 들어가는 <시동> 이후엔 조금 쉬어볼까 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사바하> 이후엔 윤성현 감독의 <사냥의 시간>에서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파수꾼>(2010) 이후 다시 윤성현 감독, 이제훈 배우와 뭉쳤다.

=그들에게서 늘 좋은 자극을 받는다. 감독님과 제훈이 형이랑 같이 어울리다 보면 그들이 나보다 한수 위라는 걸 느낀다. 나도 노력하지만 그들도 노력하고 있으니 따라갈 수가 없다. (웃음) 참 신기한 게, 나는 아직도 내가 연기한 영화가 나오면 과연 윤성현 감독님이 어떻게 봤을지 궁금하다. 나의 첫 감독님이고 첫 은인이어서인지 윤성현 감독님이 일종의 기준처럼 존재한다.

-차기작 <시동>에선 가출 청소년을 연기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은 우리가 모두 아는 감정을 다룬다는 거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번쯤 겪을 법한 감정을 다루는 영화라서 그걸 잘 표현하는 게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리딩을 했는데, 어떤 작품이 될지 기대가 된다.

-그 이후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시동>이 끝나면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는데.

=단편영화를 찍어보려고 한다. 이렇게 뱉어놔야 실행에 옮기지 않을까. (웃음)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