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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홍콩영화①] 관금붕 감독이 13년 만에 내놓은 신작 <초연>을 계기로 돌아본 홍콩영화들 이야기
김성훈 2019-07-24

홍콩(영화)에 대한 애가(哀歌)

관금붕 감독의 1987년작 <연지구>에서 주인공 여화(매염방)는 자살하기 전 사랑했던 연인 진방(장국영)과 약속한다. 다시 태어나면 3월 8일 11시 섹통추이의 의홍루에서 만나자는 약속이다(극중에서 여화는 1934년 3월 8일 자살한다. 그다음 해 같은 날인 1935년 3월 8일은 관금붕 감독이 1991년 연출한 영화 <완령옥>의 주인공이자 중국을 대표하는 배우 완령옥이 세상을 떠난 날이기도 하다.-편집자). 여화와 진방은 서로를 매우 사랑했다. 하지만 섹통추이의 부자 가문인 진방 부모의 반대로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좌절한 두 사람은 함께 죽기로 결심한다. 여화는 귀신이 되어 1987년 현재에 나타나 신문사 기자 아정(만자량)과 함께 의홍루를 찾아간다. 하지만 의홍루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는 유치원으로 바뀌었으며, 그 위로 고가도로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완전히 바뀐 세상을 바라본 여화는 “의홍루가 유치원으로 변했다”라며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의홍루도, 진방이 여화를 만나면서 배운 경극이 열리는 태평극장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연지구>는 관금붕 감독이 사라져간 홍콩의 풍경을 그리워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사라진 것들, 사라질 뻔한 것들

전작 <장한가>(2005) 이후 관금붕 감독이 13년 만에 내놓은 신작 <초연> 또한 사라질 뻔한 건물을 잊지 않기 위해 출발한 이야기다. 그 건물은 홍콩 센트럴 에든버러 광장(현재 홍콩 시위가 열리는 장소다.-편집자)에 자리한 대회당(香港大會堂)이다. 1962년 설립된 대회당은 연극 무대, 갤러리, 콘서트장 등 여러 문화공간이 한데 모인 홍콩 문화의 랜드마크이다. 그런데 서너해 전 홍콩 정부가 도심 교통체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건물을 철거한 뒤 이 지역을 재개발하려고 했다. 홍콩 시민들이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대회당은 철거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역시 철거에 강하게 반대한 관금붕 감독은 많은 홍콩사람들이 어린 시절 추억을 간직한 이 건물이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니 카메라에 담기로 한다.

대회당이라는 공간에서 출발한 만큼 이야기는 수령(정수문)과 옥문(양영기), 오랫동안 경쟁해온 두 여배우가 연극 <두 자매>에 나란히 캐스팅돼 제작 발표회에서 만나 대회당 무대에 올라가기까지 벌어지는 일주일을 담담하게 펼쳐낸다. 수령은 한때 연기력, 대중의 인기, 행복한 가족 등 모든 걸 갖춰 남부러울 것 없는 배우였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는다. 남편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그 사고로 남편의 내연녀가 세상에 밝혀지며, 그러면서 통장 잔고가 텅텅 비고, 아들은 커밍아웃을 한다.

옥문은 현재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스타 배우이자 수령과 과거에 얽힌 사연이 많다. 옥문이 수령이 출연하기로 한 영화 <방화정무>의 캐릭터를 빼앗자 분노한 수령은 홧김에 연예계를 은퇴한다. 옥문은 그 해 그 캐릭터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묵자 감독과 하룻밤을 즐겼지만 감독이 자신의 아내와 영화 뒤풀이 장소에 나타난 걸 보고 상처받는다. 각기 다른 이유로 마음의 상처를 겪은 수령과 옥문은 수령의 시누이인 정종(조아지)이 제작하고, 세계적인 연극연출가 안(감국량)이 연출하는 연극 <두 자매>에 출연하기로 한다. 처음에는 서로 신경전을 벌이다가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을 되돌아보고, 그러면서 연기에 점점 몰두한다. 한편 홍콩 재벌의 딸인 푸사(바이바이허)는 수령을 12살 때부터 지켜봐온 친구이자 팬으로, 오랜만에 무대에 복귀하는 수령을 격려한다.

오랫동안 몸이 근질근질해서 어떻게 참았을까. “그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투자를 받지 못했다. 제작을 주로 했던 것도 그래서다. <초연>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인데 찍을 수 있게 돼 무척 기쁘다.” 관금붕 감독의 말대로 대회당의 과거 풍경이 담긴 흑백사진들을 보여주며 시작되는 이 영화는 여성, 퀴어, 사라져가는 홍콩의 풍경과 정체성 등 자신의 오랜 관심사를 한데 담아내 관금붕의 자기반영적 영화라 할 만하다(흥미롭게도 극영화인데도 수령과 기자의 인터뷰 장면에서 감독의 전작 <연지구>가 몇번 언급되는데 그때마다 극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진다).

인생은 성장과 상처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상처는 사람을 좌절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을 되돌아보고 한 발짝 더 나아가게 한다. 서로에 대한 애증이 엇갈리고 상처가 곪을 대로 곪은 수령과 옥문, 두 사람이 무언의 신경전을 벌이는 연극 리허설 초반은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날이 서 있다. 리허설이 시작된 이틀째, 둘은 대본대로 연기하지 않는다. 그간 묵혀둔 감정을 던지듯이 대본에 없는 말들을 추가하거나 바꾼다. 그걸 지켜보며 얼굴을 찡그리는 연출가 안은 속이 타들어간다. 리허설 사흘째, 두 사람의 상처와 서로에 대한 감정이 연극 대사를 통해 선명해진다. 사랑하는 남자가 유령이 되어 자신 앞에 나타난 연극의 한 대목을 연습하는 장면에서 수령은 상대 배우와 이런 대사를 주고받는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알아요?”(수령) “당신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 더이상 당신 자신을 괴롭히지 마. 나와 약속해.”(상대 배우) 이 말을 들은 수령은 울컥해 눈물을 쏟는다. 그녀의 열연을 본 안은 “내가 원하는 감정이다. 너무 정확하다”고 박수를 치며 감탄한다. 하지만 수령은 그 순간 자신을 배신하고 내연녀와 여행을 떠났다가 죽은 남편이 떠올라 마음이 아리면서도 씁쓸했을 것이다. 열연한 수령과 그의 연기를 만족해하는 안을 멀찍이 지켜보는 옥문의 표정 또한 썩 좋진 않다.

관금붕 감독은 데뷔작 <여인심>(1985)을 시작으로 <연지구>, <인재뉴약>(1989), <완령옥>(1991), <장한가>, 최근의 <초연>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삶을 줄곧 그려왔다. 굴곡 많은 사연을 가진 배우 수령과 옥문이 그렇듯이, <완령옥>을 통해 여배우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 성장하고, 세상의 편견과 맞서는 과정에서 상처를 받아 약해지기를 반복하는 삶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잘 알려진 대로 <완령옥>은 관금붕 감독이 <연지구>를 찍다가 홍콩에서 열린 ‘완령옥 회고전’을 통해 그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시작된 프로젝트다. 완령옥을 접한 그는 1930년대 상하이를 본토 반환을 앞둔 홍콩과 흡사하다고 보았다. 이 영화에서 장만옥은 혼돈의 세계 상하이에서 거친 생을 불살랐다가 25살로 요절한 중국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여배우 완령옥의 삶과 사랑을 입체적으로 펼쳐내 보인다. 특히 혁명 정신이 강한 여성 노동자 역할을 캐스팅하는 과정에서 감독이 완령옥에게 “당신은 고귀하고 귀족 같은 이미지라 이 역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완령옥은 입술의 붉은색 루주를 손으로 지우고, 머리카락을 풀면서 “나도 주체적인 여성 노동자를 잘 표현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장면은 지금 봐도 강렬하다. 하지만 <초연>은 <완령옥>처럼 전설적인 여배우의 장송곡도, <장한가>처럼 20세기 격동의 중국사를 거치며 활짝 피었다가 사그라든 상하이 여성에 대한 애가도 아니다. 또 수령과 옥문, 두 라이벌 배우가 각을 세우고, 그때 발생하는 긴장감을 동력 삼아 온갖 음모를 주고받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두 사람을 포함해 수령의 매니저 니니(제계), 옥문의 매니저, 두 여배우를 설득해서 연극을 무사히 무대에 올리려는 정종,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수령을 누구보다 열심히 챙기고 응원하는 푸사, 수령과 옥문의 열혈 팬인 대회당 매니저, 트랜스젠더 여성 연극연출가 안 등 8명의 여성들의 삶과 상처 그리고 우정을 세심하게 그려낸다. 카메라는 여성들이 함께 상처를 극복하고,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고, 각자의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 연대하는 과정을 따뜻하게 담아낸다.

리허설 이틀째, 연습이 끝난 뒤 수령은 베이징 출신인 자신의 매니저 니니와 함께 케네디타운에서 구한 허름한 집에서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죽은 남편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서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말하자 니니는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따끔하게 지적한다. 그때 자신의 상처를 애써 감추고, 행복한 척하는 수령의 맨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냉정한 순간조차 관금붕 감독은 인물에 애정을 가득 쏟는다. 또 흥미로운 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수령을 자신 일처럼 끔찍이 챙기는 푸사라는 캐릭터다. 푸사가 수령에게 “케네디타운에 살지 말고 나의 집 중 한곳에 들어와 살아도 돼”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수령의 손을 꼭 붙잡는 순간이나 수령에게 세레나데를 부르는 영화의 후반부 장면은 무척 든든한데, 퀴어영화 감독으로서 관금붕 감독의 인장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어쨌거나 여성들이 연대하고 격려하는 모습은 <완령옥>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완령옥이 상하이 집에서 어머니, 딸과 함께 식사하는 와중에 전구의 불이 나간다. 고령의 어머니가 전구를 갈기 위해 의자 위에 올라가자 완령옥이 어머니가 넘어지지 않도록 꼭 붙잡는다. 그걸 지켜본 완령옥의 딸이 그녀를 따라 완령옥의 다리를 꼭 붙잡는다. 여성 삼대가 서로를 붙잡는 장면은 두고두고 봐도 따뜻하고 울컥한다.

“옛날에는 (홍콩)바다가 넓었는데…”

<초연>은 사라져가는 홍콩(영화)에 대한 감독의 애정과 그리움 그리고 걱정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애가(哀歌)이다. 중국 영화산업이 급성장해 할리우드와 맞서고, 홍콩 영화인들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대륙으로 진출하면서 예전만큼 활발하게 제작되지 않는 홍콩영화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옥문이 대회당에서 연습을 마치고 택시를 타는 리허설 나흘째 시퀀스에서 그녀는 과거 함께 작업했던 영화감독을 택시기사로 우연히 만난다. 맥조휘 감독과 함께 <절청풍운> 시리즈, <무쌍>(2018) 등을 연출한 장문강 감독이 특별 출연해 연기한 택시기사는 옥문에게 “더이상 홍콩영화를 찍지 않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옥문에게) 괜찮아, 정말 괜찮아. 혼자서 살아남아야지”라고 자조 섞인 말을 한다. 어쩌면 그것이 관금붕 감독을 포함한 홍콩 영화인들의 솔직한 심정인지 모른다. 공교롭게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윌리 챈을 추모하며’라는 자막이 먼저 뜬다. 윌리 챈은 성룡의 매니저 출신으로, <완령옥> <장한가> 등 관금붕 감독의 전작을 포함해 <턱시도>(2002), <상하이 눈>(2000), <포비든 킹덤: 전설의 마스터를 찾아서>(2008) 등 수많은 홍콩, 할리우드 영화들을 제작한 제작자다. 그는 지난 2017년에 세상을 떠났다. 가장 화려했던 시절의 홍콩이 서서히 저물고 있다. 수령과 옥문이 대회당 야외 벤치에 나란히 앉아 야경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빅토리아항을 바라보며 “옛날에는 (홍콩)바다가 넓었는데…”라고 말하는 장면이 더욱 애잔하고 쓸쓸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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