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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간 감독의 <지구 최후의 밤>, <카일리 블루스>를 경유해 히치콕의 <현기증>을 읽다

감독이 현실과 삶을 사랑할 때의 마법

과거 중국의 신진 감독이 나올 때마다 붙던 ‘몇 세대’라는 수식어가 촌스러워진 지도 꽤 되었다. 지금은 중국의 모처에서 예상 못했던 인물이 툭 튀어나와 극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소개해 주목받는 시간이다. 중국 남부의 카이리시에서 자란 비간은 애초 시인을 꿈꾸었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책을 따라 <불안의 서>라 이름 지었던 시집은 심의 문제로 <노변의 피크닉>이란 제목으로 바뀌어야 했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SF소설에서 제목을 따왔나 싶겠지만, 기실 그 소설을 느슨하게 각색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1979)를 너무 좋아해 그랬다고 보는 게 맞겠다. 그리고 <노변의 피크닉>은 그의 데뷔작 <카일리 블루스>(2015)의 중국어 제목이 되었다. <잠입자>로 인해 감독이 된 시인답게 두 번째 작품 <지구 최후의 밤>(2018)은 척 봐도 시네필의 영화다. 한 강연에서 내가 했던 말- “<아비정전>으로 시작해 <현기증>으로 끝나는 영화다”- 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타르코프스키, 왕가위, 앨프리드 히치콕은 물론, 알랭 레네, 허우샤오시엔, 데이비드 린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등의 이름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들과 비간의 영화를 이렇게 저렇게 짜맞추는 작업 자체엔 잔재미 이상의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지구 최후의 밤>이 <카일리 블루스>의 리메이크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같은 지역을 배경으로 반복해 벌어지는 범죄, 시간과 공간이 어우러져 빚는 판타지라는 내적 요소뿐만 아니라, 인물이 카이리에서 당마이로 옮겨가는 순간 벌어지는 영화의 외적 구조 변화까지 두 영화는 하나의 쌍이다. <지구 최후의 밤>은 <카일리 블루스>의 밤 버전이다. 다시 물어보자, 그게 왜 중요한가.

중국의 현대영화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바로 근대화의 증인이기 때문이다. 중국영화는 근대라는 것이 형태를 갖추어가는 과정을 곧바로 기록한다. 영화 사상 전례없는 리얼리즘의 시간이 중국영화 안에서 숨쉬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왕빙의 <철서구>(2003)는 세기말에서 세기 초로 넘어가는 시간이 낳은 노동의 종말에 관한 애가다. 거대 회사의 줄 이은 도산으로 한 사회와 공간의 풍경이 완전히 변해간다. 카메라를 든 그의 가쁜 발소리와 숨소리, 카메라 렌즈에 비친 빛과 눈송이와 빗방울이 모두 떠나 황폐해진 공장과 저개발의 삶을 사는 하층계급의 표정을 씁쓸하게 뒤따르고 바라본다. 그의 <비터 머니>(2016)에는 짝퉁 티셔츠를 만들어 파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철서구>에 나온 전통적인 노동자와 다른 모습의 인간형이다. <이름 없는 남자>(2010)는 근대의 시스템 바깥에서 완전히 독립적인, 혹은 시스템의 쓰레기에 둘러싸인 삶을 사는 괴인을 등장시킨다. 영화적 위대함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왕빙의 다큐멘터리는 영화의 리얼리즘에서 시간이 차지하는 가치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인간과 사회가 변해가는 순간, 왕빙의 영화는 그 순간을 드러내 보여준다. 왕빙은 거기에 시간의 의미가 숨어 있다고 믿는다.

비간에게 시간이란

비간은 중국 리얼리즘 영화의 시간 개념에 반기를 든다. 그가 두편의 영화의 중·후반부를 각각 41분, 1시간 분량의 원테이크로 찍었음을 알고 보면 이상한 일이다. 실시간으로 기록하듯이 찍는 것도 모자라 <지구 최후의 밤>은 입체 효과까지 더했다. 비간에게 현대 중국은 더이상 노동의 시간을 살지 않는다. 노동의 시간이 끝나자 소비의 시간이 활개친다. 그 시간을 기록하는 그가 다큐멘터리 대신 장르영화를 선택한 것은 당연하다. 장르는 비노동의 세계다. 범죄가 일상처럼 곁에서 일어나고, 사람들은 틈만 나면 노래를 부르는 그런 세계. <카일리 블루스>의 전반부에서, 출소 후 카이리에 정착한 남자는 팔려간 조카를 찾아 카이리를 떠난다. <지구 최후의 밤>의 전반부에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카이리로 돌아온 뤄홍우(황각)는 과거의 기억 속 미스터리로 남은 여자를 찾아 카이리를 떠난다. 각기 갱스터와 누아르에 헐겁게 기댄 두 영화의 진경은 앞서 말한 중·후반부에 포진한다. 거기서 일어나는 시간의 마술을 이해하려면 비간이 <카일리 블루스>의 도입부에 금강경의 구절-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을 삽입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금강경 풀이를 찾아보라는 말은 아니다. 난해한 불경을 이해했음을 자랑하려고 만들어진 영화가 아닌 까닭이다. 새겨야 할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이며, 영화가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느냐다. <카일리 블루스>의 남자는 당마이 여정에서 조카보다 10살 정도 많아 보이는 같은 이름의 청년, 오래전 헤어진 아내와 닮은 미장원 아주머니, 카이리에서 미래를 펼치고 싶은 젊은 여성을 만난다. <지구 최후의 밤>의 뤄홍우는 태어나지 못한 아들을 기억하게 하는 소년, 기억 속 미스터리의 연인과 닮은 여성, 어릴 적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진실 등과 조우하고 심지어 <카일리 블루스>의 못된 청년들과도 재회한다. 비간이 뒤섞인 시간을 통해 얻는 것을 무엇일까.

현실로 돌아올 시간

비간은 <지구 최후의 밤>의 엔딩에서 <현기증>(1958)에 오마주를 바쳤다. 오마주를 바치되 두 영화의 톤은 완전히 반대다. 방에서 마주한 두 남녀가 입을 맞추자 주변의 벽이 회전하기 시작한다. <현기증>의 그 장면은 죽은 자, 시체에 집착하는 남자가 기만적으로 얻어낸 로맨틱한 순간이다. 영화는 비극으로 끝난다. <현기증>의 주디 바튼(킴 노박)은 치정극에 휘말려 매들린 엘스터라는 상류층 여성으로 행세하고 칼로타 발데스라는 19세기 여성의 죽음을 흉내낸다. 주인공 존 퍼거슨(제임스 스튜어트)은 현실의 주디를 매들린의 환영으로 밖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지구 최후의 밤>의 키스도 회전하는 방으로 이어지지만, 비간은 일종의 꿈같은 순간으로 표현한다. 뤄홍우는 사랑했던 완치원(탕웨이)의 모습을 당구장에서 일하는 카이전이라는 여성에게서 발견한다. 에메랄드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던 완치원은 같은 컬러의 드레스로 유혹했던 매들린의 재현이다. 완치원은 이후 진혜한이라는 여성과도 겹쳐지는데, 붉은 점퍼를 걸친 카이전은 독립된 여성으로 존재한다(<현기증>에서 주디가 현실로 돌아와 걸친 가운도 붉은색이다). 매들린과 칼로타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디가 비극적 결말을 맞는 것과 반대로, 카이전은 완치원과 진혜한의 허울로부터 자유롭다. 주디는 실제로 갔던 곳을 꿈에서 갔다고 거짓말하지만, <지구 최후의 밤>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버린다. 주디가 허투루 말했던 ‘영원’이란 단어가 카이전에겐 진실이 된다. 이러한 결말은 어쩌면 당연하다. 당시 환갑에 가까웠던 히치콕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죽은 것, 또는 유령을 사랑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면, 이제 서른에 다다른 비간은 현실과 삶을 사랑할 때다. 비간은 위의 엔딩에 하나의 살을 붙임으로써 자신만의 주제를 완성한다. 1분 안에 꺼진다고 했으나 여전히 불타고 있는 불꽃은 순간 속의 영원을 상징한다(<카일리 블루스>에서는 시계가 그 역할을 맡는다). 비간에게 꿈의 세계조차 현실의 연장에 다름 아닌 것처럼, 현실은 찰나의 순간을 넘어 과거와 미래를 모두 품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 시간의 개념을 확장해 풍성하게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비간은 두편의 영화로 마법 같은 기적을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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