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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의 오! 컬트 <스모크>
2002-05-02

담배 한대만 빌릴 수 있을까요?

저 실례합니다만, 담배 한대만 빌릴 수 있을까요? 아… 감사합니다. 미안한데 불도 좀….

후∼ 이놈의 담배 끊는다 끊는다 하면서 계속 피우네요. 사실, 건강 때문에 담배를 끊어야 한다면, 담배뿐만이 아니라 끊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술, 육류, 스트레스 주는 인간들, 뉴스, 신문…. 후∼ 담배를 한번 끊은 적이 있었죠. 한 8개월 정도…. 결국 다시 피우게 됐죠. 네, 살다보면 담배를 피우는 것말고는 달리 어떤 대책도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 얘기 들어보실래요?

2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오전 11시쯤 되었을까요…. 전철에 앉아서 스포츠 신문을 뒤적이고 있는데 제 앞에 남루해보이는 젊은 아주머니 한명이 서너살쯤 돼보이는 계집아이를 데리고 서 있더군요. 워낙 남루한 차림에 피로에 찌든 모습이 역력해서 저는 꼬마에게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영락없는 노숙자로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아주머니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때 전 손가방에서 종이봉지를 꺼내 저에게 먹으라고 건네더군요. 땅콩이었습니다. 저는 별로 내키지 않아서 사양했습니다. 아주머니는 계속 권하고 나는 사양하다가 봉지가 뒤집어져 땅콩이 전철 바닥에 잔뜩 흩뿌려져버렸습니다. 저는 창피하기도 하고 난감했지만 웃으면서 그 땅콩들을 다 주워담았습니다. 아주머니는 계속 저를 힐끔힐끔 보시며 참 고마우신 분이라고 계속 그러더군요. 그럴 일도 아닌데….

후∼ 그러다가 전 선 채로 잠깐 잠이 들었던가 봅니다. 다행히 제가 내릴 역에서 안내방송을 듣고 정신이 들어서 내릴 준비를 하는데 누군가 제 옷자락을 살그머니 잡아당기고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아까 그 아주머니가 데리고 있던 꼬마였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보이질 않더군요. 꼬마는 그렁그렁한 새까만 눈으로 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전 난감했죠. 후∼ 대체 이거 무슨 일일까. 꼬마를 데리고 전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찾아보았지만 아주머니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시간을 헤매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아이를 경찰서로 데려다줄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저는 이런저런 개인적인 일들을 하고 나서 크리스마스 파티에 갔습니다. 밤새 놀았죠. 거의 아침 6시쯤에 해장국을 먹으러 갈 때까지 저는 제 외투 주머니에서 그 돈과 쪽지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네…, 식대를 계산하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꼬깃꼬깃한 지폐 몇장과 메모가 나오더라 이겁니다. 돈이 2만3천원 정도 있었고 메모지에….

후∼ 전날의 그 아주머니가 넣은 것이었습니다. 말 못할,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데 오늘 하루만 자기 아이를 맡아달라, 그리고 저녁 8시 동대문역 3번 출구에서 기다릴 테니 그때 아이를 데려다주면 정말 고맙겠다,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메모에는 내가 좋은 사람처럼 보여서 어려운 부탁인 줄 알지만 꼭 들어주리라 믿었다고도 쓰여 있었습니다.아뿔싸! 동대문역에서의 약속시간은 무려 10시간이 넘어가고 있었죠. 저는 미친 듯이 그곳으로 달려가보았지만, 아이의 엄마는 없었습니다. 아이요? 나중에 보육시설에 맡겨졌다더군요…. 저는 제 자신을 너무 책망했습니다.

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의 엄마가 무슨 사연으로 그날 나에게 아이를 맡겨야 했는지…, 그리고 기다리다 지쳐서 포기하고 간 건지, 아니면 애초부터 나타나지 않은 것인지, 이 모든 것이 미스터리로 남은 채 아이와 엄마는 이산가족이 되어버렸고 저는 자책감을 지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동대문역에서 전 담배를 다시 피웠습니다.

아… 벌써 담배를 다 피웠군요. 담배 고맙습니다…. 네? 이 얘기 진짜냐구요? 글쎄요… 이야기가 실화인가 거짓말인가 가늠하는 것은 담배가 얼마나 몸에 해로운가, 한편 얼마나 정신적으로 위안이 되는가를 구분하려는 것과 같네요. 어쨌든, 담배 한대 피우는 동안 가졌던 이 시간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픽션이지만 영화 한편 보는 시간이 소중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하… 그럼… 전 이만…. 김형태/ 화가·황신혜밴드 리더 http://hshban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