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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④] 우수상 조현나 이론비평 전문 - 마틴 맥도나 감독론

공식을 비트는 마틴 맥도나의 변주법

<쓰리 빌보드>

복수극을 다룬 기존의 영화들을 상기해보면 대부분 화려한 액션 신을 동반하여 가해자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통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형식이었다. 대체로 선과 악이 명확한 권선징악의 형태로 보복의 과정이 다소 잔인하더라도 관객은 이를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오히려 더 열광하기도 한다. 때문에 인물간의 관계나 감정은 옅어지고 자극과 폭력을 앞세워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영화들이 늘어난다. 즉 복수의 정황은 그저 액션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마틴 맥도나는 자신의 두 영화 <세븐 싸이코패스>(2008)와 <쓰리 빌보드>(2017)에서 복수극임에도 기존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이들은 박진감 넘치거나 빠른 속도감의 액션 신이 부재하며 가해자에 대한 복수 역시 제대로 성사되지 않는다. 특히 <쓰리 빌보드>의 경우 가해자는 결국 밝혀지지 않은 채로 끝난다. 무엇보다 선악의 경계가 모호하다. 가령 마피아 찰리(우디 해럴슨)와 대척점에 서 있는 사이코패스 빌리(샘 록웰), 딕슨에게 해를 가한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 레드에게 폭력을 행사했지만 후에 밀드레드를 돕는 딕슨 등 마냥 선의 영역으로 분리할 수 없는 인물들이 존재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복수극이 다른 영화들과 결을 달리하는 이유는 이처럼 해당 장르를 풀어내는 형식과 그 안에 담긴 주제가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기존 장르의 관습에 매몰되지 않고 그 틀을 교묘히 비틀고 변주한다. 때문에 그의 팬들과 비평가들은 그를 특정 사조로 명명하는 데에 한계를 보인다.

1. <세븐 싸이코패스>의 마티(콜렌 파렐)는 극중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한다. 할리우드식의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는 지겹고, 자신은 총이나 쏴대는 폭력적인 영화는 만들지 않으리란 것이다. 그가 지향하는 바는 사랑과 평화를 다루는 영화다. 총격전이 없는 복수극은 없다는 빌리의 만류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타협안을 내놓는다. “초반에만 복수를 하고 후반부엔 그냥 주인공들이 포기하는 거야. 그리고 사막에서 인간적으로 대화를 하다 끝나는 거지.” 마티의 표정에는 옅은 권태가 묻어난다. 그의 태도는 마틴 맥도나의 한 인터뷰 내용과 상통한다. 그는 로버트 매키식 스토리텔링에 반감을 표하며,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뻔한 전개의 히어로 영화를 봐야 하는 것이고 이는 영화에 어떤 CG가 더해졌는지에 대한 궁금증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그의 공식에 대한 거부감은 <세븐 싸이코패스>의 도입부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영화는 할리우드 사인에서 두 남자로 이어지는 롱테이크 신으로 시작한다. 보스의 지령과 살인 계획에 관해 논하고 품속의 총을 움켜쥐는 등 두 남자는 전형적인 킬러의 행색을 취하는데 그 노골적인 행동들 때문에 관객은 그들이 영화의 주인공, 즉 사이코패스1, 2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예상은 5분도 채 가지 않아 뒤집어진다. 둘은 이내 붉은 복면을 쓴 남자에게 살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남자는 사이코패스 중 한명인 빌리인데 그는 “이 영화는 내 방식대로 끝낼 거야”라며 극의 흐름을 주도하는 인물이다. 할리우드 사인과 전형적인 두 킬러, 그리고 그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빌리. 이 첫 장면은 할리우드 공식을 따르지 않고 영화를 자기식대로 끌고 나가겠다는 마틴 맥도나의 선전포고인 셈이다.

2. <킬러들의 도시>는 벨기에의 브뤼주를, <쓰리 빌보드>는 미주리주의 에빙 지역을 배경지로 규정한 반면 <세븐 싸이코패스>에서는 공간을 특정하지 않는다. 앞의 두 작품에 비해 <세븐 싸이코패스> 서사의 밀도가 얕게 느껴지는 이유는 일정 부분 여기에서 기인한다. 캐릭터가 산발적으로 등장하고 배경지 또한 분산됨에 따라 인물간의 관계성 역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쓰리 빌보드>에서 다시 공간을 좁혀 마을 주민들간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이같은 마틴 맥도나 작품 세계의 특징은 대표적 한정 공간 장르인 서부극에 그 근간을 둔다. 다만 그는 서부극의 주요 요소들을 자기식대로 재배치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성한다.

기차의 종착역을 배경지로 삼았던 일부 서부극처럼 <킬러들의 도시> 역시 레이(콜린 파렐)와 켄(브렌단 글리슨)이 기차를 타고 브뤼주에 온 이후로 영화가 시작된다. 다만 그들은 누군가를 처리할 목적으로 도시에 온 것이 아니라 이미 저지른 살해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정확하게는 그 죗값의 유예기간을 채우기 위해 브뤼주에 들른 것이다. 영화는 기존 서부극의 광활한 자연을 중세의 역사를 간직한 고색창연한 도시로 대체한다. 서부극의 인물들처럼 레이와 켄 역시 배경지를 종종 횡단하는데 레이는 유독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는 도시를 제대로 관광하지 못하고 특히 성당에서 예수의 피를 마주하기를 거부한다. 이유인즉 브뤼주의 고딕풍의 건물들과 예수의 혈흔 전부 레이가 저지른 살인을 상기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는 런던으로 돌아가 자신이 죽인 아이의 부모에게 사과하고 대가를 치르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는 다음 지령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압적인 자연과 같이, 브뤼주는 끊임없이 과거의 업을 상기시키며 그를 압도하고 레이는 그 속에서 그저 무력하게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킬러들의 도시>에는 총격전이 부재한다. 해리(레이프 파인스)와 종탑에 올라간 켄은 그와 대적하길 거부하고 레이 역시 해리를 피해 달아난다. 해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도 타인이 아닌 그 자신의 신념이다.

이처럼 마틴 맥도나의 작품들에서 반복되는 요소들, 가령 한정된 장소나 총격전 등은 명백히 서부극에서 기인한 것이다. 다만 캐릭터의 선악이 분명하지 않고 그들이 대의보다는 개인의 안위를 위해 행동한다는 점에서 고전주의 서부극보다는 수정주의 서부극과 유사하다. <세븐 싸이코패스>는 극의 중심에 사이코패스들을 세워 추격극을 진행하는데 기존처럼 일방적으로 쫓고 쫓기는 형식이 아니라 서로의 일행을 살해하고 위협하다 결국 최후의 결투를 행하는 구조다. 자기 개를 찾기 위해 타인을 살해하는 찰리와 희대의 악마들을 처단하는 재커라이어 부부 등 인물들은 전부 선악의 흑백 논리로 구분지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세븐 싸이코패스>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를 고르자면 응당 사막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막은 단순히 마지막 총격전이 벌어지는 배경지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사이코패스들이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그에 대해 담론을 나누는 장소로 변모한다. 그 과정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고 이를 통해 기존의 복수 의지를 접기도 한다. 사이코패스들은 사막에서 폭력적인 동시에 인간적인 양면성을 내보이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에 대해 속단할 수 없게 한다.

<쓰리 빌보드>는 마을 주민들 스스로 내부 갈등을 자정한다는 특징을 가지는데 그 중심에는 밀드레드가 있다. 앞선 마틴 맥도나의 두 작품에서 여성은 호텔 주인이나 남자주인공의 상대역으로만 소비되었다. <세븐 싸이코패스>에서는 연쇄살인마 역이 주어졌으나 그마저도 부재한 상태였다. 한스(크리스토퍼 워컨)는 마티의 시나리오를 읽으며 빈약한 여성 서사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었는데 이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그는 최근작 <쓰리 빌보드>에서 마침내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피해자의 엄마인 그는 외부 도움 없이 해당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적대적인 마을 사람들과 정면으로 맞서며 갈등을 해결해나간다. 이같은 변화는 고전 서부극에서 남성의 구원에만 의존하던 여성이 수정주의 서부극에 이르러 주체적으로 변모한 과정을 연상시킨다. 영화는 밀드레드가 딕슨과 함께 마을을 떠나며 끝이 난다. 기존 서부극의 히어로들이 마을의 갈등을 해결한 후 으레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3. <세븐 싸이코패스>에서 마티는 사실상 관찰자이자 기록자에 가까운데 영화의 뼈대를 세우긴 했으나 그 이후로는 주로 상황을 관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 사건에 개입해 인물과 그들의 서사를 소개하고 이를 엮어 사건을 만들어가는 사람은 오히려 빌리다. 그래서인지 마티는 초기의 입장을 바꿔 빌리와 한스에게 함께 시나리오를 쓸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종국에 빌리는 흡족한 웃음을 띠며 죽음을 맞이한다. 앞의 대사를 토대로 추측하건대 그 웃음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영화를 마무리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최후의 총격전은 그가 쓴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빌리가 결말에 만족한 이유는 무엇일까.

빌리의 시나리오는 현실성이 현저히 떨어지며 이를 재현한 장면 역시 우스꽝스럽고 조악하다. 그러나 시나리오의 중심 플롯 자체는 무척 익숙한 구조다. 극중 인물들이 연대하여 악에 맞서고 결국 승리를 쟁취하는 형식. 지금도 히어로물을 비롯한 액션 스릴러 장르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서사가 아닌가. 그러나 영화는 이 플롯을 따르지 않는다. 우선 영화 제목이 명시한 바와 달리 인물들은 7명이 아니라 5명이다. 빌리와 한스가 각각 2인의 사이코패스에 해당하거나 그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그룹에는 실제와 허구의 인물들이 섞여 있으며 한스는 죽었고 마티는 폭력을 원치 않으니 마지막 순간 찰리와 맞설 수 있는 인물은 오직 빌리 한 사람뿐이다. 그러니 그가 바랐던 다수 대 다수의 화려한 총격전은 애초에 불가능한 설정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찰리와 대면해서도 좀처럼 상대를 해하려는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다. 기존 클리셰와 다르게 한스의 총이 발사되지 않은 순간을 공격의 기회로 삼지 않으며 보니를 죽이지 않으려 숫자를 처음부터 다시 세기도 한다. 게다가 빌리는 자신의 죽음으로 마티와 보니를 살린 반면 그를 살해한 찰리는 그 무엇도 얻지 못한다. 요컨대 복수극임에도 복수를 실행한 자가 오히려 모든 것을 잃는다는 아이러니로 귀결된 것이다.

감독은 빌리로 하여금 기존 스릴러 장르의 클리셰적 서사를 코믹하게 재현한 후 실전에서는 그와 다르게 행동하도록 한다. 그럼에도 그의 시나리오와 실제 사이에는 교집합이 존재하는데 붉은 복면의 남자, 즉 빌리 자신의 희생이다. 그는 불필요한 살생을 감행하지 않고 죽음을 통해 자기 동료를 지킨다. 이는 앞선 한스의 죽음과 맥을 같이하는 설정이다. 이처럼 마틴 맥도나는 자신의 작품에 타인을 위해 희생한 인물들을 계속해서 등장시키는데 그저 다음을 위한 발판으로 소모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자리를 내어주며 그들의 희생 역시 충분히 조명한다.

<쓰리 빌보드>

4. 마틴 맥도나는 주로 두개의 사건을 대위적으로 진행하는데 두 사건 중 발단과 결말이 명확한 사건을 오히려 중심에서 밀어낸다. 가령 <세븐 싸이코패스>에서는 연쇄살인마와 갱단 두목의 추격전을 부수적 사건으로 다루고 7명의 사이코패스들을 찾고 소개하는 과정을 중심에 두는 식이다. <쓰리 빌보드>에서도 안젤라(캐서린 뉴턴)의 죽음과 해당 사건의 해결에 집중하기보단 마을 사람들의 갈등을 더 중점적으로 묘사하고 <킬러들의 도시> 역시 영화의 초점을 아이의 죽음 이후의 킬러들의 삶에 맞춘다. 안젤라와 아이의 죽음, 그리고 추격전은 전부 영화를 더 극적으로 끌고 나갈 수 있는 요소들임에도 불구하고 마틴 맥도나는 해당 사건들의 신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아이의 죽음은 축약하여 보여주고 안젤라 사건은 아예 생략해버리는 식이다. 즉 그들은 영화 중심 서사의 원인이나 전제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 이유는 서두에 언급한 마티의 대사와 이어진다. “총이나 쏴대는 영화는 지겨워. 사랑과 평화를 다룬 영화를 만들고 싶어.” 마틴 맥도나는 복수극이나 스릴러를 다룸에도 정작 복수와 스펙터클한 액션에는 관심이 없다. 다시 말해 그가 주목하는 것은 사건 그 자체보다는 사건 이후에 남겨진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변화 과정인 것이다.

5. 그의 단편 <식스 슈터>에서 마틴 맥도나는 아내를 잃은 남편, 엄마를 죽인 아들, 그리고 자식을 잃은 부부가 기차 안에서 조우하는 과정을 그린다. <킬러들의 도시>의 전사 격인 이 작품에서 역시 그가 집중하는 것은 사건 이후의 인물들의 감정이다, 그는 장편을 제작하며 이러한 세계관을 확장하고 구체화시킨다. 즉 마틴 맥도나는 프레임 밖에 존재하는 사건과 인물,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킬러들의 도시>에서 레이가 운하를 건너 해리에게서 도망갈 때 그들은 영화 촬영장의 중심으로 들어선다. 그 당시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카메라에 담긴 것은 해리가 레이를 저격하고 그 뒤의 지미(조던 프렌티스) 역시 사살당하는 신, 그리고 난쟁이를 아이로 착각한 해리가 자기 원칙에 따라 자살하는 신일 것이다. 해당 신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숱하게 봐온 킬러들의 총격전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레이가 들것에 실려 촬영장 밖으로 실려나가는 순간부터다. 당시 그의 눈에 담긴 것은 고딕 성당들과 중세시대 분장을 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중세 도시 배경을 비롯하여 동물의 탈을 쓰고 괴이한 분장을 한 사람들은 레이가 켄과 관람했던 그림 속 연옥을 연상시킨다. 사람들 뒤로는 옅은 안개마저 깔려 있는데 이는 켄이 해리에게 했던 거짓말을 상기시킨다. 그에 따르면 짙은 안개 탓에 레이는 깨어 있음에도 꿈을 꾸는 것처럼 느꼈다는 것이다. 안개 속에서 중세 도시와 중세시대 복장을 한 사람들을 보며 레이는 꿈꾸듯 연옥의 이미지를 연상하고 그것을 자신의 현재와 중첩시킨다. 그리고 이내 브뤼주가 자신의 연옥임을 깨닫는다. 영화의 중추를 담당하는 이 신은 영화 촬영장을 벗어난 후에야 즉 극중 카메라에 담길 법한 사건이 마무리된 후에야 드러나는 것이다.

<세븐 싸이코패스>에서도 영화의 중심 서사는 마티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마티의 완성된 시나리오와 결과물을 보지 못한 채로 끝난다. 영화가 실제 마티가 쓴 시나리오상의 영화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감독이 마티의 영화라는 결과물보다는 그것을 위한 과정, 즉 사이코패스들과 그들의 서사를 더 중요시했음은 명백하다. 나아가 자기 스스로도 사이코패스였으며 다른 인물들을 초대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영화를 끝맺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마티가 아닌 빌리의 영화를 관람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쓰리 빌보드> 역시 직접적인 복수보다는 가해자를 찾아 나서기 위한 준비 과정을 그린다. 그 이전에는 아무도 안젤라의 죽음에 관심 갖지 않고 밀드레드의 편에 서려 하지 않았으므로 영화는 우선 이 문제의 해결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후 밀드레드와 딕슨은 실제 가해자에게 보복을 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한다. 둘 다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 복수가 정답이 아님을 뼈저리게 알고 있고 그렇기에 망설이는 것이다. 이들의 망설임은 레드(케일럽 렌드리 존스)가 딕슨에게 건넨 오렌지주스 한잔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용서로 인해 연쇄적으로 이어지던 복수의 사슬이 끊어졌고 그것이 인물간의 화해와 연대를 이끌어낸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영화는 밀드레드가 딕슨과 함께 가해자를 찾아나서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에서 끝이 난다. 그 이유는 영화가 주목하는 바가 그들의 복수 의지나 실제 가해자 살해 여부가 아니라 그들이 마침내 갈등을 해결하고 함께 길을 나섰다는 정황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6. 마틴 맥도나는 복수가 사건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이는 그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명제이며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매번 처절한 복수가 아닌 인물간의 연대와 희생으로 귀결된다. 켄은 레이의 자살을 막고 그에게 해리의 위협을 알리기 위해 종탑에서 추락사한다. 한스는 10년 넘게 딸을 죽인 살인자를 쫓아다녔지만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지 자문하며 ‘눈에는 눈’식의 복수는 모두의 눈을 멀게 한다는 간디의 말을 인용하고 곱씹는다. 마티는 본래 승려를 미국의 베트남전쟁 관계자들에게 복수하는 캐릭터로 설정했으나 한스는 그를 전쟁에 대항해 분신자살을 하는 첫 승려로 재정한다. 한스는 그로 인해 승려가 자신을 지배하던 분노에서 마침내 해방됐음을 역설하는데, 사실 이는 한스의 바람을 반영한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가득한 십수년을 살았던 한스는 이미 그것의 무의미함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찰리에게 복수를 감행하는 대신 빌리와 마티를 위해 희생하는 것으로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휘발유처럼 그의 온몸을 감싸고 있던 분노로부터 마침내 해방되고 죽음의 문턱에서 어둠이 아닌 밝은 빛을 마주한다. 윌라비 서장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죽음을 비롯해 죽기 전 가족과의 마지막 하루, 기억되고 싶은 자신의 마지막 모습까지 완벽히 통제하려 든다. 그런 그가 제어하지 못한 유일한 것이 바로 밀드레드의 빌보드다. 회유와 호소, 협박에도 꿈쩍 않는 그녀의 의지에 윌라비는 결국 응원으로 화답한다. 다음달 광고비를 두고 조롱하다 결국 그것을 지불하는 것으로 마무리된 둘 사이의 아이러니를 우리는 연대라 칭해도 되지 않을까. 광고 설치인이 ‘WILL’이라고 쓰인 거대한 종이를 펼쳐들며 정말 다시 설치할 것이냐 묻고 밀드레드는 ‘그가 광고비를 지불했는데 안 될 게 뭐냐’고 말한다. 여기서의 ‘WILL’은 당연히 ‘Willoughby’의 ‘WILL’이지만, 해당 신을 토대로 죽음 이후에도 연대하겠다는 그의 ‘의지’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 밖에도 그는 딕슨에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총도 분노도 아닌 사랑임을 강조한다. 혹여 호모포비아가 그를 조롱할지라도 윌라비는 그가 차분하게 법대로 처분하길 바란다. 이후 딕슨은 자신의 동성애를 조롱하고 인종차별주의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엄마의 영향에서 벗어나 밀드레드를 돕는 주체적인 캐릭터로 거듭난다. 딕슨이 변화하는 데에는 레드가 건넨 오렌지주스가 결정적으로 작용했으나 그 기저에 윌라비 서장의 편지가 존재함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마틴 맥도나는 기존의 복수극에서 배제되어왔던 사건 외의 요소들에 집중한다. 즉 단순히 총격전을 경유한 보복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인물간의 감정과 관계 말이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야기할 뿐이며 혹여 복수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상쇄되지 않는 감정들이 잔재한다. 한스가 자신의 과거를 회의적으로 회고하고 밀드레드와 딕슨이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던 것처럼 말이다. 또한 그는 여러 인물들을 자신의 분신으로 내세워 복수가 답이 될 수 없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완벽히 이분된 선과 악의 구도 또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마틴 맥도나가 다종다양한 유형의 킬러들과 사이코패스들,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자까지 영화 속으로 불러들인 이유는 항상 악한 일면만 부각되어온 그들이 사실은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 충분히 변화 가능한 다면적인 인물들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들 중 과연 죽음으로 죄를 갚아야 할 이는 누구인가. 이에 관해 감독은 함부로 답을 내리지 않는다. 죽은 아이를 되살리려 하는 것보다는 다른 아이를 살리려는 노력을 해보라는 켄의 위로가 진정 마틴 맥도나가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닐까. 과거에 머무르며 자책하고 복수를 꾀하는 식의 자기 파괴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굴레에서 벗어나 다음 단계로 향하는 것 말이다. 세 영화에서 인물들은 정신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현 상태에서 벗어난다. 레이는 브뤼주에 머무른다는 한계를 지니지만 영화 촬영장, 즉 프레임 밖으로 나서며 실존적인 깨달음을 얻는다. 한스와 빌리는 복수가 아닌 각자가 원하는 결말로 자신의 생을 마감했으며 밀드레드와 딕슨은 에빙 지역 밖으로 떠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헐리우드영화에서처럼 인간의 선함과 악함을 결론 짓지 않고 열린 결말로서 마무리 짓고 싶었다는 마틴 맥도나의 말처럼, 그의 작품 세계는 블랙코미디와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가장 힘들고 잔인한 순간에조차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그 노력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나 기존 작품들과 차별화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자극적인 액션과 폭력에 기대는 복수극과 스릴러 장르들 속에서, 그들이 조명하지 못한 인물 심연의 감정과 관계, 그리고 인간 본성의 선함을 드러내는 마틴 맥도나의 섬세함은 우리가 계속해서 그의 작품을 찾게 만드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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