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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영화⑤] 2010년대 한국 독립다큐멘터리의 우연한 역사

과거는 지나가지 않는다

<개의 역사>

국제 영화제의 수상이나 상영 여부가 훌륭한 영화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세계가 한국에 원하는 것, 한국이 세계에 보여주고 싶은 것이 어떻게 만나왔는가를 보여주기에 유용한 지표다. <벌새>(2018)는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을 체감했던 우리에게 각별한 텍스트이지만, 그 시기를 겪지 않았거나 사건을 모르더라도 영화의 감상 자체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영화는 인물의 내면과 관계라는 시대와 국가를 초월한 보편적인 언어로 특정 시공간을 그려낸다. <벌새>가 촉발한 역사와 기억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국내외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작품들을 자유연상 방식으로 이어보며 한국 독립다큐멘터리가 기억해온 것에 관한 짧은 상을 그려보고자 한다. 랜덤 방식으로 채택된 이 우연한 목록은 오늘날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보여준 역사 쓰기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벌새>와 비슷한 시기를 다룬 정윤석 감독의 다큐멘터리 <논픽션 다이어리>(2013)에서 출발해보자. 2014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부문 넷팩상 수상작인 이 영화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지존파 사건으로 얼룩진 20년 전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과거의 사건을 다룬 영화들이 무서운 건 우리를 망각의 늪에서 건져 올려서가 아니라, 아무리 끔찍한 사건이라도 시간의 거리감이 전제되는 한 그것은 일종의 매혹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를 <논픽션 다이어리>처럼 서늘하게 새겨둔 경우는 드물다. <논픽션 다이어리>에서 지존파 사건은 하나의 기호처럼 인식된다. 초반 자막을 통해 이 사건을 비정상적인 개인들의 반사회적 특수성에 가두는 대신, ‘자본주의를 범행동기로 삼은 최초의 범죄행위’로 재의미화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기득권층을 향한 반발심은 어쩌면 다수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것이기도 하다. 이를 받아들일 때, 이들의 실패는 자본주의와 빈부격차가 심화된 오늘을 수용하게 된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도 읽힌다. 이러한 맥락에서 <논픽션 다이어리>는 불가능성을 상징하는 추억이자 오늘날에도 영속되는 자본주의 체제하의 인간의 감정 상태를 보여준다.

<위로공단>

<논픽션 다이어리>와 나란히 넷팩상을 수상한 박경근 감독의 <철의 꿈>(2013)은 <논픽션 다이어리>와 거의 정반대의 자리에서 자본주의를 바라본다. 철강 산업, 특히 조선소 산업은 부국강병을 꿈꾸던 때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거리두기와 비판이 예상되는 지점에서, 영화는 사적 에세이와 순수한 꿈으로 선회한다. 어떤 것에 대한 국가적, 국민적 열망을 보낸 경험은 되돌아보면 부끄럽기 마련이지만, 그것 역시 우리의 얼굴이 아니었느냐고 영화는 묻는 것 같다. MBC와 공동 제작이기에 가능했을 내밀한 촬영은 과거 철강 산업에 매혹되었듯, 지금이 이미지들에 매혹되어보라고 권유한다. 누군가는 철을 신처럼 섬겼고, 이러한 기억을 담은 영화는 이미지를 신처럼 섬긴다. 그것의 거대함에 압도된다면, 당신은 영화에 홀린 것이다.

우리는 철강에 얽힌 꿈에 압도되기 이전에 그 속에 사람이 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 수상작 <위로공단>(2014)은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여성 노동사를 잇는 대규모의 프로젝트다. YH, 동일방직, 구로공단, 삼성반도체, 기륭전자, 한진중공업 등 한국 노동사를 줄기로 삼아 감정노동, 캄보디아 유혈사태와 이주노동자들의 요구 등으로 확대하며 한국만의 것으로 한정할 수 없는 전 지구적 여성 노동사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공업 시대를 향한 매혹이 끼어들 틈이 없다. 구로공단 50주년을 맞아 복원된 수출의 여인 제막식 장면을 역으로 감아 동상을 다시 막 안으로 감추어버리는 장면은 고정된 역사 이미지를 해체하는 영화의 태도를 요약한다. 인터뷰와 이를 보조하는 퍼포먼스, 이미지가 교차하는데 이는 단지 다큐멘터리의 예술성을 과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퍼포먼스에 가까운 비인간화를 요구하는 여성 노동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에 의미가 있다. 해외에서는 ‘시적’ 영화라 평하며 형식적인 측면에 주목했다.

야마가타국제영화제 특별상을 받은 김동령, 박경태 감독의 <거미의 땅>(2012)은 한국 내부의 낯선 곳으로 침잠해 들도록 유도한다. 기지촌은 주로 한국 근현대사의 상흔을 품은 호기심과 치욕의 공간으로 재현되어왔다. <거미의 땅>은 철거를 앞둔 경기도의 한 기지촌을 본다는 것을 거의 신비할 정도로 낯선 경험으로 만든다. 이곳에서 만난 세 여성은 오늘을 보여주는 대상이 아니라 세명의 길잡이이자 퍼포머처럼 보인다. 자칫 과도하거나 넘칠 수 있는 부분은 관찰적 시선과 공간의 귀기를 포착하는 사운드로 인해 장소성과 유리되지 않는다. 곧 사라질 공간과 그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과 기억을 교차해내며 다큐멘터리 만들기의 한 방식을 보여준다. 해외에서는 자극적인 이야기에 기대지 않은 영화의 균형감을 높이 샀다.

<거미의 땅>

동시대의 삶을 포착한 다큐멘터리이자, 그 자체로 느슨한 역사 쓰기 방식을 환기하는 몇편의 작품을 덧붙이고 싶다.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상영작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2015)는 우리가 보이는 것에 얼마만큼 영향을 받는지를 절감하게 만든다. 박강아름은 주위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외모에 관해 품평하도록 유도한다. 머리 좀 단정히 해라, 안경을 벗는 게 낫다, 옷 좀 사라, 살을 빼라, 화장해라 등등의 조언이 쏟아지는데, 이 말이 보수적인 상사에게서가 아니라 주인공이 가르치는 학생들의 의견이기도 하다는 점이 상징적이다. 외모 꾸미기의 압박을 가장 심하게 받는 상황 중 하나인 소개팅 중계, 다양한 방식의 외모 꾸미기 실험 등을 통해 외모에 관한 압박을 스스로 돌파한다. 1인칭 다큐멘터리가 사적인 것으로 분류되곤 하지만, 영화는 가장 사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나의 외모 가꾸기가 전혀 사적일 수 없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여준다. 이것이 이 작품이 지닌 중요한 성과 중 하나다.

타이완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아시아비전 경쟁대상을 수상한 <개의 역사>(2017)는 오늘날의 역사 쓰기 방식 그 자체를 보여준다. 우연히 만난 개의 역사를 탐문해가다가, 집을 찾아 떠도는 나의 유랑기와 그 과정에서 만난 인물의 인생 유랑기가 스며든다. 중간에 이야기가 확장되긴 하나 어떤 이야기도 다른 것을 위해 희생되지 않고 서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맞물리는 것이 영화의 힘이다. 대만여성영화제 상영작인 <야근 대신 뜨개질>(2015)은 직장 여성으로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여주지만, 결코 거기에 머무르지만은 않는다. 뜨개질은 내 손을 움직여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사소한 것이자, 어떤 결과물이 되었을 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행위로 그려진다. 연대가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형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은 영화의 중요한 지점이다.

다큐멘터리는 고정된 과거에 관한 추체험이 아니라, 체험이 과거를 만들어낼 수도 있음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기억을 창조한다. 우리가 몰랐던 과거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생생한 현재임을 알게한다. 그러므로 과거는 지나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도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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