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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의 배우들⑤] 혜수 역 이봉련 - 일상처럼 축적 되는 힘
송경원 사진 최성열 2019-11-13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 사람. 기억은 흐릿한데 특별하다는 인상만큼은 확실히 각인되는 캐릭터. 배우 이봉련이 맡았던 역할들을 두고 어떤 쪽으로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옥자> 속 미란다코리아의 안내데스크에서 ‘전화로 하세요’라는 대사 한마디로 최고의 캐릭터를 연기한 사람과 <택시운전사>에서 마음 급한 만삭의 임신부를 연기한 사람을 곧장 연결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건 어떤 캐릭터가 덜 빛난다거나 연기력이 부족한 것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다. 오히려 영화가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캐릭터를 잡아낸 까닭에 영화의 맥락 바깥에서는 기억이 흐릿해지는 쪽에 가깝다. 이봉련 배우는 스스로를 ‘직업 연기자’로 자처한다. “처음엔 연기가 좋아서 시작했지만 알면 알수록 점점 무게감이 커진다. 즐긴다는 마음은 한구석에 여전하지만 이제는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그의 말은 겸손이 아니다. 오히려 밥벌이의 무게를 아는 자만이 꺼낼 수 있는 진한 자부심의 표현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82년생 김지영>에서 이봉련이 맡은 캐릭터 혜수는 어딘지 연기자 이봉련을 닮았다. 혜수는 육아에 지친 지영을 찾아와 든든한 내 편이 되어주는 옛 직장 동료다. 직장 동료라는 게 사적으론 가볍다면 한없이 가벼울 수도 있는 관계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이만큼 서로의 처지와 속내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장도 없다. 지영의 꿈을 응원하고 복직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혜수는 필요할 때 적재적소의 조언을 한다. “네 인생에 중요하다 생각하는 건 끝까지 지켜내야지”라는 그 조언은 새로울 것도 없지만 필요한 타이밍에 필요한 사람에게 제대로 당도했을 때 비로소 힘을 지닌다. 이봉련 배우는 혜수를 두고 “자신의 일에 대한 신념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석했다. <82년생 김지영>은 여러 인물들을 통해 공감의 통로와 사례들을 펼쳐내는 종류의 영화이고 혜수가 보여주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버텨내는 이 땅의 직장인들이다. 혜수가 크고 작은 상처들을 견뎌내며 직장을 계속 다니는 건 단지 생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있을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오늘을 버텨나가는 모든 직장인의 평균이라고 봐도 좋다. 그렇기에 혜수의 조언은 말라버린 지영의 가슴팍까지 와닿는다. 어찌 보면 식상하고 당연하며 기능적일 수도 있었던 이 캐릭터가 실감의 부피를 얻는 것은 혜수의 처지를 이해하고 교감하고자 애쓴 이봉련 배우의 상상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혜수가 밥벌이의 자부심과 오늘을 버틴다는 신념으로 서 있는 캐릭터라면 배우 이봉련 또한 직업 연기자로서의 긍지와 책임감으로 수많은 역할을 소화해왔다. 동시에 배우로서 그녀는 너무 앞서 나가지 않고 자신에게 허락된 것을 파악하고 균형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역할을 받으면 나름의 전사(前史)를 그려본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말하는 것보다 감독님의 그림 아래에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게 더 중요하다.” 만약 작품마다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음에도 배우 이봉련이라는 이미지로 수렴되지 않는다면 그건 자신을 지우고 캐릭터를 담아내는 직업 연기자로서의 성실함 덕분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지우고 스스로 “항상 그곳에 있었던 사람”이 될 줄 아는 겸손한 연기자다. 그 겸손의 바탕에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연기에 대한 단단함이 자리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한끗을 품고 있는 연기자다. 아무리 덮고 감추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어떤 개성은 영화마다 다양하게 표현되곤 하는데 대개는 의도하지 않는 코미디, 아니 ‘웃픈 상황’으로 연결되곤 한다.

이봉련이라는 독특하면서도 친숙한 이름은 그의 정체성과 지향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사진을 전공했던 그는 작가 필명을 지을 때 ‘봉련’이란 이름을 골랐다. “천주교 신자지만 왠지 불교를 연상시키는 이름에 끌렸다. 하루는 시사교양 프로그램 <VJ 특공대>의 개명 특집을 보는데 중학교 남자아이 이름이 봉련인 거다. 그 학생은 이름을 바꾸고 너무 홀가분해했는데 그때 저거다 싶더라.” ‘봉’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왠지 친숙하고 웃겨서 좋았다는 그는 이름을 한자로 쓸 때 ‘임금이 타는 가마’(鳳輦)를 골랐다. “한자는 언제든 바꿀 수 있으니 상관없다. 필요하면 봉우리(峰)가 될 수도 있고 연꽃(蓮)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당장 주연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조금씩 역할이 늘어나고 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는 것 자체가 즐겁다.”

김도영 감독이 말하는 이봉련

“연극계에 있는 권지숙 배우님 추천으로 만났다. 잘한다는 소문은 워낙에 많이 들었다. 친구에게 시나리오 모니터링을 부탁한 적이 있는데 ‘혜수라는 역할은 너무 전형적이지 않느냐’는 지적을 받았다. 그때 내가 ‘근데 배우가 이봉련이다’라고 했더니 가만히 있다가 ‘그럼 됐네’라는 거다. 모두가 이름만 대면 그렇게 납득했다.”

●필모그래피

영화 2019 <82년생 김지영> <엑시트> 2018 <암수살인> <버닝> <늦여름> <생일> 2017 <마약왕> <택시운전사> <옥자> <히치하이크> 2016 <여고생> <국가대표2> <어떻게 헤어질까> 2014 <꿈보다 해몽> 2012 <광해, 왕이 된 남자> <내가 살인범이다> 2010 <그대를 사랑합니다> TV 2018 <라이프 온 마스> 2017 <정마담의 마지막 일주일> <당신이 잠든 사이에> <내일 그대와> 2015 <송곳> 2013 <응답하라 1994> 공연 2019 연극 <메리 제인> <나는 살인자입니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 2018 연극 <내게 빛나는 모든 것> 2017 연극 <발렌타인 데이> <1945> 2016∼17 뮤지컬 <그날들> 2016 연극 <피카소 훔치기> <보도지침>, 뮤지컬 <은밀하게 위대하게> 2015 연극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헤비메탈 걸스> 2014 연극 <그 집 빌라에서 우리는> <공장> 2014∼15 연극 <만주전선> 2014 연극 <날 보러 와요> 2013 연극 <다정도 병인 양하여> <피리부는 사나이> <아시아온천> 2013∼17 연극 <청춘예찬> 2012 연극 <전명출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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