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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썰물
김혜리 2019-11-27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

오는 12월 7일 제1회 모두를 위한 기독교 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되는 마케도니아영화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는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이기도 했다. 인문대 졸업 후 취업에 실패한 30대 초반의 페트루냐는 면접에서 성추행과 조롱을 겪고 귀가하던 길에, 신년 축일 행사로 사제가 강에 던진 십자가를 일등으로 건져올린다. 관습적으로 남성만 참여하던 축제의 성물을 막상 여성이 차지하자 남자들은 페트루냐를 ‘창녀’라 욕하고, 교회와 경찰은 페트루냐를 연행하나 처벌 근거가 없어 어쩔 줄 모른다. 어머니는 딸을 지지하긴커녕 고발하고, 여성 기자는 이 기회에 여론을 환기하려고 열심이다. 그 와중에 경찰서에 갇힌 이틀 동안 페트루냐는 자신의 충동과 고집의 실체가 무엇인지 점점 깨닫게 된다. 성차별을 지속시키는 권력의 종류와 작동 방식을 드러내려는 포부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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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를 해야 할 것 같다. 오늘 <아이리시맨> 시사를 보러 가는 길에 내게는 여러 의구심이 있었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만드는, 범죄로 뼈가 굵고 삭은 남자들의 이야기가 한편 더 필요할까? 넷플릭스가 아메리칸 시네마를 대표하는 거대한 이름과 손잡고 기념비 하나 세우려는 프로젝트 아닐까? 209분이라는 러닝타임 가운데에는 혹시 대작에 값하는 몸 불리기를 위한 시간이 없을까? 인물의 젊은 시절을 그리는 데에 제 나이의 배우에게 기회를 주면 될 일이지 구태여 후반작업에 거액을 들여 노년배우들을 디지털 회춘시키는 것은 테크놀로지 발전이 낳은 영화적 낭비 아닐까? 마지막으로 나는 영화보다 먼저 지치지 않고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결과는 항복과 반성이었다. <아이리시맨>은 다른 누구도 아닌 <비열한 거리>(1973)와 <좋은 친구들>(1990)과 <카지노>(1995)를 만든 감독이 유작인 양 만들어야만 하는 영화였다. 기념비를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기념비적인 영화였고, 209분은 정당할뿐더러- 좋은 음악이 그러하듯- 한자리에 앉아 단숨에 겪어야 가장 짧고 매끄러운 시간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니로)과 러셀 버팔리노(조 페시)의 30대부터 80대는 관객이 보는 앞에서 한 배우의 얼굴 위에 퇴적되어야 했다. 스코시즈의 선택은 정확했다. 영화가 테이블을 차리는 첫 40분은 의식적 주의를 요했지만 대략 세 번째 주인공 지미 호파(알 파치노)가 이야기에 입장한 다음부터 나는 전신을 내맡긴 자동 비행모드에 진입했다. 등을 받쳐주는 감독의 믿을 만한 손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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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코시즈 감독은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아이리시맨>은 이상하게도 제목을 스크린에 띄우지 않는 영화다. 대신 도입부에 찰스 브랜트의 원작 논픽션 제목을 큼직한 서체의 타이틀 카드 여러 컷으로 나눠 망치질하듯 때려박는다. “자네가 집을 칠한다고 들었네만”(I Heard You Paint Houses)이라는 원작의 타이틀은, 살인으로 벽에 피칠갑한다는 의미이고, 전화로 처음 대면한 지미가 프랭크에게 건네는 인사이기도 하다(이에 프랭크는 “목수 일도 합니다”라고 덧붙인다). 동기나 목적을 되묻지 않는 일의 제의로 점철된 인생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 돌아온 아일랜드계 미국인 프랭크 시런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정육 운송 트럭 기사로 일하며 일명 뒷고기를 빼돌리다가 지역 범죄 조직을 굴리는 러셀 버팔리노의 눈에 든다. 프랭크가 참전 중 배운 이탈리아어는 둘을 부쩍 친근하게 만든다. 살인을 포함한 마피아 활동에 투신한 프랭크의 명분은 가족을 지키고 부양하기 위해서다. 러셀은 오래지 않아 당대를 호령하던 전미운수노조 대표 지미 호파의 수행원 자리에 프랭크를 천거한다. 노조에 애착과 독점욕이 깊은 지미 호파는 세력 강화를 위해 조합의 기금을 마피아 사업 자금으로 돌려주고 공생해온 터다. ‘패튼 장군’이란 별명을 가진 지미는 프랭크에게 흡족한 상사다. 둘의 관계 발전은 두번의 취침 신으로 요약된다. 수행 초기 스위트룸에 딸린 거실 소파를 배정받았던 프랭크는 수년 후 트윈 베드룸에서 노부부처럼 지미와 사업을 의논하며 잠든다. 나아가 지미 호파 부부는 프랭크 가족과 친교를 쌓는다. 그러나 케네디 정부의 ‘배신’과 팀스터스(트럭 노조) 내부 라이벌의 도전은 지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간다. 지미의 측근이자 마피아 일원으로 승승장구해온 프랭크는 자기에게 떨어진 모순된 요구에 당황한다. 영화의 마지막 60분을 남겨둔 이 지점부터 <아이리시맨>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속도를 떨어뜨린다. 50년에 걸친 프랭크의 이야기를 시나리오작가 스티브 자일리언은 세 가닥의 타임라인으로 각색했다. 첫째는 요양소의 노쇠한 프랭크가 과거를 회고하는 현재시제로서, <좋은 친구들>의 오프닝을 연상시키는 롱테이크 트래킹숏으로 열린다. 배우의 팬이라면 아편에 취한 드니로의 회상에서 꼬리를 무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를 먼저 추억할 것이다. 두 번째 타임라인은 프랭크와 지미에게 치명적인 사건을 포함한 1975년의 디트로이트행 자동차 여행이며 여기에는 <대부2>에 보내는 인사처럼 보이는 알 파치노의 호수 신이 등장한다. 세 번째 타임라인은 러셀과 동반한 여정 곳곳에서 프랭크가 조각조각 상기하는 1950년대 이후 1975년까지의 대과거다. 3번 시간대가 2번 시간대를 따라잡는 순간부터 스코시즈와 셀마 슈메이커 편집자는 고통스럽게 시간을 잡아 늘리기 시작한다. 내내 직진하던 프랭크에게 시간은, 러셀과 지미 사이에서 물리적으로 왕복하는 1975년의 그날부터 견뎌야 할 형벌로 변한다. 그러나 스코시즈가 엘레지를 바치는 대상은 프랭크 시런이라는 실패한 사내 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프랭크뿐 아니라 그 누구의 운명도 <아이리시맨>에서 서스펜스를 자아내지 않는다. 스코시즈는 실존했던 갱이 마초적 허세를 부리며 프레임에 입장할 때마다 영화를 멈추고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글로 묘비명을 새기듯 주석을 단다. 이 무시무시한 남자들은 모두 시시하게 죽을 것이다. <아이리시맨>의 영화적 클라이맥스는 엄밀히 말해 외적 서사의 절정과 일치하지 않는다. 프랭크와 지미를 위시한 마피아들이 피살되거나 징역을 산 계기는 프랭크를 파괴한 사건과 별개다. 그들을 개펄에 남겨진 폐선과 같은 존재로 만든 것은 시대의 썰물이다. 영화의 2막까지 스코시즈 갱스터의 유려한 집대성으로 보였던 <아이리시맨>은, <카지노>까지 스코시즈가 받았던 폭력과 독소적 남성성을 은연중에 미화한다는 비판에 대한 숙고한 대답으로 판명된다. 스코시즈가 준비한 만찬은 ‘좋은 친구들’의 홈커밍데이 파티가 아니라 참절한 해단식이다. (다음에 계속)

<허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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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 스카파리아 감독의 <허슬러>는 금융위기 1년 전 2007년 월 스트리트의 스트립 바에서 본론을 시작한다. 타지에서 이직 후 우왕좌왕하던 댄서 데스티니(콘스탄스 우)는 ‘무브스’ 클럽의 간판스타 라모나(제니퍼 로페즈)의 무대에 압도되고 그 비결을 묻고자 휴식 중인 라모나에게 다가간다. 지름길을 찾는 신참을 묵살하지 않을까 하는 관객의 염려가 무색하게 라모나는 끄덕인다. 그리고 겨울밤 손바닥만 한 무대의상만 걸치고 떨고 있는 동료를 자신의 코트 속으로 초대한다. 마치 새끼를 품는 야생동물처럼. 조건 없는 자매애의 결의로 보이는 이 따뜻한 순간은 그러나 계약의 시작이기도 하다. 불황과 양극화 소용돌이 속에 두 여자가 한배를 타고 생존하는 데에는 폴 댄스보다 어지러운 기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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