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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셀린 시아마 감독 - 끝까지 전부 불타오르라
김소미 2020-03-12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1월 16일 개봉한다. 지난해 타계한 프랑스 누벨바그의 거장 아녜스 바르다가 자신이 주목하는 여성감독으로 콕 집어 언급한 적 있는 셀린 시아마의 네 번째 장편영화를 국내 극장에서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제72회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수상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18세기 말의 어느 작은 섬에서 결혼을 앞둔 귀족 여성과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의 짧은 사랑을 그린다. 얼핏 프랑스 고전주의회화의 침착한 초상화를 떠올리게 하는 절제미가 돋보이는 영화지만 이는 흠을 찾아보기 힘든 이 영화의 만족스러운 겉면 중 하나일 뿐이다. 고요 속의 폭풍을 닮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절제를 통해 폭발하고 역동하는 방식을 잘 아는 연출가로부터 진면목을 드러낸다. 사랑과 예술에 관한, 그리고 당대와 현대를 잇는 여성의 삶에 관한 영화의 전언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여성감독이 연출한 우리시대의 ‘완벽한’ 여성 퀴어영화로 기억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소개한다.

영화 자체가 불씨를 닮았다. 조용히 옮겨붙어 서서히 타오르고 일순 걷잡을 수 없는 화기를 뿜는다. 영화는 화가인 마리안느(노에미 멜랑)가 밀라노에서의 결혼을 앞둔 귀족의 딸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작은 배를 타고 외딴섬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결혼 전 신부의 초상화를 먼저 신랑에게 보내는 풍속에 따라 백작 부인은 딸의 초상화를 원하지만, 결혼을 못마땅해하는 엘로이즈가 초상화 모델이 되기를 거부하면서 고심 끝에 산책 친구인 양 위장해 여성 화가를 불러들인 것이다. 영화는 일주일 남짓한 시간 동안 실내에 갇혀 지내던 엘로이즈와 그녀를 몰래 관찰해 그림을 그려야 하는 마리안느가 해변과 들판을 쏘다니는 시간을 스케치하고 그 위에 색을 입힌다.

공교롭게도 이 이야기에 남성은 없다. 의도적 거세다. 마리안느가 그린 첫 번째 초상화가 모종의 이유로 실패로 돌아가자 어쩔 수 없이 혼자 밀라노행을 택한 엘로이즈의 엄마가 집을 비우면서, 이 작은 섬은 어느새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두 여성과 그들의 하녀 소피(루아나 바야미)의 낙원이 된다. 엘로이즈의 아버지는 부재하고, 미래의 남편이 될 인물은 엘로이즈 자신도 “밀라노에 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존재하며,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하녀 소피의 상대가 누구인지는 애초에 호기심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여성의 사랑, 여성의 삶이 그동안 무수히 메일 게이즈(남성적 시선)를 통해 묘사되어온 예술계의 한계를 직시한 셀린 시아마 감독은 피메일 게이즈(여성적 시선)를 정의하기 이전에 우선 그것이 절대다수인 상황부터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영화 바깥에서도 이런 구도는 마찬가지여서, 제작진 중 감독인 셀린 시아마를 제외하고 가장 궁금하고 중요한 역할로 보이는 두 포지션 역시 기억할 만한 여성들의 이름으로 채워졌다. 고전주의 회화를 떠올리게 하는 우아한 촬영 속에 두 인물의 대칭, 균형, 이를 위배하는 역동성까지 골고루 부여한 촬영감독의 이름은 클레르 마통. 닫힌 실내와 광활한 들판,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든 모닥불 주위를 오가는 마통의 카메라는 엄격한 프레이밍은 물론 그 원리를 쉬이 짐작할 수 없는 주술적이고 신비로운 장면에서도 야생적인 시선을 빛낸다. 클레르 마통의 이 관능적인 미학 세계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같은 해에 역시 칸영화제에서 주목받은 마티 디옵의 <애틀랜틱스>에서 특히 극대화되었다(마통은 이 영화로 전미비평가협회 촬영상을 수상했다). 극중 마리안느가 그리는 작품은 프랑스에서 유화작업을 하는 여성 작가 엘렌 델메어가 그렸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단순히 영화에 쓰일 그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여성 화가 델메어 특유의 화풍이 영화에 섬세히 담겼으면 했고, 델메어는 자신의 시선을 살려 아델 에넬의 특징을 포착했다. 시아마 감독은 델메어의 손도 일부러 출연시켰다. 여성성의 매우 다층적이고 복잡한 면모들을 켜켜이 쌓고 있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뒤에는 이를 흉내내거나 모방할 필요가 없는, 훌륭하고 또 보편적인 여성들이 있었다.

사랑하는 시선, 마주하는 두명의 예술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두 여성이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의 세부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기존의 관습이 무너지고 전복되는 과정으로 대체된다.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이 처음 첨예하게 갈등하는 장면은 마리안느가 완성한 초상화를 엘로이즈가 혹평할 때다. 19세기의 화가인 마리안느가 당대의 관습과 규칙에 의거해 그려낸 엘로이즈는, 그림의 감상자인 이름 모를 남편의 평가를 다분히 의식하고 있다. 부드럽고 온화하며, 두뺨에 붉게 홍조가 도는 초상화를 본 엘로이즈는 자신이 가진 본연의 “생기”와 “존재감”이 없다고 일갈한다. 뮤즈로부터 평가절하당한 화가는 곧바로 분개하고, 자기 그림의 얼굴을 지워버린 뒤 떠나려 한다. 그런데 그동안 화가 앞에서 포즈를 취하기 거부했던 엘로이즈가 이번엔 기꺼이 마리안느의 모델이 되겠다고 나서면서 이들의 주도권은 역전된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제57회 뉴욕영화제에 배우들과 참석해 “화가와 모델의 관계, 신화적인 뮤즈의 의미를 재해석하려고 했다. 여성에 대한 페티시로 점철된 뮤즈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잘 안다. 모델이라고 해서 그녀가 예술의 완성에 기여하는 또 하나의 지성이자 협력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라고 간결히 요약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랑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는 장면은 동등한 시선의 교차로 이루어진다. 포즈를 취한 엘로이즈에게 마리안느는 그녀가 무의식중에 내보이는 평소 행동과 표정을 하나하나 읊고, 엘로이즈의 얼굴은 상기된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이내 마리안느의 특징을 되갚듯 들려주며 자신 또한 마리안느만큼이나 면밀하게 상대를 관찰했음을 주지시킨다. 모델을 향한 화가의 시선이 응당 허락되고 용인된 권력이라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사실 화가 자신보다 더 많은 시간과 집중력으로 상대를 향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쪽이 모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낭만적으로 바로잡는다. 힘과 권력이 동등히 분산된 두 여성의 시선 아래서, 그들은 자유로운 연인이며 대상화되지 않은 서로의 협력자다.

신분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하녀 소피를 포함해 세 여성이 서로의 자매가 되어준다는 사실을 자연과 일상의 풍경화로 대체한다. 생리통과 임신 같은 여성의 주제들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신분 격차는 무용할 뿐이다. 소피의 낙태를 돕기 위해 해변가와 들판에서 서로의 노동력을 보태는 일련의 장면들 이후, 세 여성이 평면적으로 나란히 서 있는 부엌 장면은 계급성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을 시각적으로 선명히 나타낸다. 차례대로 엘로이즈는 요리를 하고 있고, 가운데 선 마리안느는 세 사람 몫의 잔에 와인을 따르고 있으며, 오른편의 소피는 앉아서 수를 놓고 있다. 그림의 대상도 달라진다. 엘로이즈의 제안으로 마리안느는 낙태술을 받는 소피의 모습을 재현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 엘로이즈가 포착하고, 엘로이즈와 소피가 재현해, 마리안느가 그림으로써 완성되는 세 여성의 평등한 예술이다. 당대에 금기시되고 부끄럽게 여겨졌던 어떤 광경이 여성의 삶의 일부로서, 작은 역사로서 기록되는 것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메일 게이즈와 구분되는 피메일 게이즈의 정의를 이러한 평등성, 공유와 소통 그리고 자매애로 촘촘히 채워나간다.

절제와 대담함, 논리와 직관의 공존

외딴섬의 정적과 거센 바람, 물과 불, 길고 갑갑한 드레스의 치맛자락 끝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서로를 위배하는 것들이 내내 공존하며 에너지를 만든다. 바다에 빠진 그림 도구를 구하려 물로 뛰어든 마리안느가 저택에 도착해 벽난로 앞에서 몸을 말리는 장면처럼, 대비를 통해 생성되는 리듬감은 이 영화의 도입부부터 절묘하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이 정교한 바느질을 지속해 시종 절제하고 억누른 뒤 그것을 어떻게 폭발시킬지 잘 아는 감독이다. 특히 음악의 배제는 영화를 본 이들에게 회자될 수밖에 없는 몇몇 장면을 돌출시킨다. 심야에 열린 축제에서 여성들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그간 스코어가 일체 배제되어왔던 영화에서 급작스런 음악이 발생시키는 기묘한 환상성과 주술성으로 전율을 안긴다. 엘로이즈의 몸을 옥죄던 드레스 자락에 불이 옮겨붙는 순간엔 바깥세상의 틀과 속박을 불태우려는 그들의 내면을, 눈맞춤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열병을 제의의 일부처럼 표현했다. 도달점을 설정해두고 이를 향해 숨죽이듯 다가가는 셀린 시아마의 연출력은 중간중간 대담한 장면 전환을 통해 엇박자를 만들기도 한다. 엘로이즈가 바다에 뛰어들어 물속에 잠기는 순간, 드레스에 불이 붙어 쓰러진 엘로이즈를 향해 마리안느가 손을 내미는 순간 영화는 난데없는 점프컷을 보여준다. 정념과 욕망이 솟구치는 순간, 과감한 영화적 분절과 왜곡을 시도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이상한 생동감이 이 영화에 있다.

한편 영화는 오르페우스 신화나 바로크음악인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처럼 관객에게 꽤 친숙한 신화와 음악을 차용해 역시나 도전적인 변주를 시도했다. 수동적으로 오르페우스에 의해 구원되어 저승에서 이승을 향해 걸어나오다가, 오르페우스의 실수로 다시 지하세계로 끌려내려간 에우리디케의 이야기. 엘로이즈는 여기에 지극히 자신다운 상상력을 덧붙인다.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에우리디케를 사랑의 주체로 바꾸어 곧 밀라노로 보내질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고 또 은유한 결과다. 이렇게 다분히 예정된 미래에서 그들은 어떻게 활활 타올랐던 한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살아갈까. 비발디의 폭풍우는 그들의 한때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통과하고도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 영화의 말미에 간결하지만 강력한 마술로 떠오른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그 묵직한 떨림을, 서서히 타올라 좀처럼 꺼질 줄 모르는 감정의 불씨를 떨쳐내기가 너무도 어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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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그린나래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