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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감독, 관객을 만나다 [5] - 류승완 ②

감독은 체력, 그리고 냉정함

-<오아시스>에 출연하고 계신데, 본인 영화와는 아주 다른 장르의 영화에 출연하는 기분이 어떠세요?

=저는 <초록물고기>가 제대로 된 필름누아르여서 좋았어요. <박하사탕>도 젠체하지 않으면서 장르 냄새가 나서 좋았고. 감독마다 장르가 정해져 있다는, 말씀하신 식의 선입관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영화에 올바로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창동 감독님 영화와 제 영화는 장르보다는 스타일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영화에 출연한 제 심리상태를 말씀드리죠. 저는 배우를 ‘야매’로만 해봤지(웃음) 디렉션을 받은 적이 없었거든요. 한수 배우자는 심정으로 나갔는데 디렉션을 받으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제 작품에도 영향이 있을 것 같아요. 느낀 것 중에 하나를 얘기하자면, 현장에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감독의 아주 원초적인 핵에 해당하는 무엇이 중요하다는 것이에요.

-저는 불쌍한 영화광들 중 한명입니다. 공대에서 정보통신을 공부하고 있고 지금 3학기를 남겨놓았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주위에서는 졸업해서 전자회사나 들어가라고 합니다. 감독님은, 제도교육을 받지 않고 감독이 되신 과정이 감격적인데요. 동생이랑 고구마 장사하면서 힘들게 살 때 도움이 됐던 이야기가 있다면 저도 듣고 싶군요.

=제가 최근에 <황혼에서 새벽까지> DVD를 봤는데요, 거기 이런 장면이 있어요. 타란티노랑 조지 클루니가 복도를 걸어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포스터를 들고 달려들면서 ‘저, 감독님 광팬입니다. 감독님 때문에 고등학교도 자퇴했어요’라고 하는 거예요. 타란티노가 어떻게 하냐면, 그 사람 머리를 확 때리면서 ‘내가 언제 학교를 그만두라고 했어!’ 그래요. (웃음) 이게 제 대답의 프롤로그구요.

이런 질문엔 참 답하기 어려운 게, 그렇게 학교도 관두고 하다가 잘되면 모르는데 망가질 수도 있거든요. 물론 영화판이 예전보다 상황이 좋아지긴 했지만. 적어도 <선물>에서처럼 ‘너 직업 뭐야?’, ‘감독이요’, ‘백수구만’ 이러지는 않으니까요. (웃음) 이무영 감독은 이런 경우에 이렇게 얘기한대요. ‘딴 사람 말 듣지 마라.’ 근데 ‘딴 사람 말 듣지 마라’라는 그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아닌지…. (웃음) 사실은 자기가 제일 잘 알고 있어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아서 그렇지, 자기가 잘할지 아닌지는 자기가 제일 잘 알죠.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 하나는, 그거예요. 일단은 해보는 게 중요하다. 권투 신인왕전을 보면, 맞는 게 두려워서 때리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실패하더라고 행동하고 실패해야지 그냥 혼자 방구석에서 고민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저는 <패싸움> 전까지는 모든 영화제, 모든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죄다 떨어졌었어요. 주위에서 ‘포기하라’는 말들을 많이 했죠. 정말 비참했어요. 박찬욱 감독님이 고등학교 때까지 제 우상이었는데, 박찬욱 감독 밑에서 연출부로 있다가 영화 엎어지는 것도 보고. 근데 사람인생이 어떻게 풀릴지 모르는 것 같아요. 그러던 양반이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들었으니. 물론 <복수는 나의 것>도 만들었지만. (웃음)

제가 드리는 이 말이, 쌈마이 화장실 벽에 있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같은 거는 아니에요. (웃음) 저는 예전에 돈이 없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 시나리오 써서 장편 시나리오 3개를 썼는데요, 물론 팔지는 못했지만. 그럼 어떤가요. 사는 게 공부잖아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하면, 그게 다 공부가 되는 것 같아요. 타란티노는 그랬어요. 돈이 생길 때마다 ‘16mm 필름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둬라. 나중에 먹을 것을 넣어놓으려는데 자리가 없어지면, 필름을 꺼내서 그걸로 영화를 찍어라.’ 무엇보다 일단 해보는 게 중요해요.

일상의 모든 경험을 내 걸로 저장하기

-감독 지망생입니다. 시나리오를 써보려고 해도 경험도 별로 한 게 없고 책도 많이 안 읽어서 그런지 어려워요. 감독님 시나리오를 보면 책도 많이 읽고 경험도 많이 하신 것 같은데, 책이나 경험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나요.

=조지 루카스가 <스타 워즈> 시나리오 썼을 때, 프랜시스 코폴라가 앞에 앉혀다놓고 그랬대요. ‘시나리오 좀 제대로 써라. 16페이지가 뭐냐, 16페이지가.’ (웃음) 근데, 재밌으면 장땡이에요. 이상하게 쓸데없는 책들 읽을 필요 없어요. 시나리오 쓰는 건 말 배우는 과정하고 비슷하거든요. 첫 작품으로 성공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실패를 당연시하면서 일단 써보세요. 점점 쓰면서 아이가 말을 배워나가듯이 시나리오 쓰는 법도 알게 될 거예요.

-이야기 구상은 보통 어떻게 하시는지.

=불현듯 드는 생각을 포함한 모든 경험을 동원해요. 이를테면, 예전에 호텔에서 일할 때, 동해에 북한 잠수함이 나타났거든요. 근데 그 2∼3일 후 탈영사건이 있었어요. 만약 그 탈영병이랑 무장공비가 만나면 어떨까, 재밌겠다, 뭐 그런 생각이 들어서 메모했어요. 그런 식이에요. 일상생활에서 명대사를 만나면 기억하고, 영화건 책이건 만화건간에 어떤 강한 이미지 하나가 있으면 그걸 확장해서 상상해요. 주인공들보다는 서브캐릭터들의 인생을 궁금해하는 습관도 있어요. <게임의 법칙>에서 ‘용대 쏴 죽이는 꼬마가 나중에 뭐하고 살까’, 생각한다든지, <매트릭스>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공중부양을 하는 걸 보면서, ‘아, 저게 중력 이기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하는 동작이라면’, 한다든지, 모든 것을 제 걸로 저장해놓아요.

-내가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영화가 있으신가요?

=저는 <사망유희>를 리메이크하고 싶어요. <사망유희>는 반쪽짜리의 불완전한 영화예요. 하지만 저는 거기서 강렬한 매력을 느껴요. 제가 이소룡이 죽은 해에 태어났거든요. 그래서 한때는 아주 심각하게 내가 이소룡의 환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웃음) 내가 30살 되는 해, 그러니까 이소룡이 죽은 지 30년 되는 해, <사망유희>를 리메이크하겠다고 중학교 때부터 생각했었어요. 또, <증오>나 거친 10대 청춘 영화들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같은 뮤지컬로 만들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자칫하면 애정가는 신을 길게 간다든지, 객관성을 잃을 수 있잖아요. 그런 건 어떻게 조절하시나요?

=쓰다가 (자세를 바꿔서) 이렇게 본다든지(웃음), 농담이구요. 굉장히 취향이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모니터링을 받아요. 말도 안 되는 반응도 나오지만, 사실 그런 게 영화가 나오면 받을 수 있는 반응이기도 하거든요. 그런 게 도움이 되죠. 저는 요즘은 시나리오의 분량 문제를 공부하고 있어요. 할리우드 시나리오는 놀라울 만큼 정형화된 체계를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행간과 띄어쓰기, 글씨 크기 같은 걸 규격에 맞게 하면 대부분 할리우드영화의 시나리오가 90∼100페이지로 나오죠. 근데 한국영화 시나리오는 이상하게 영화화한 후에 보면 시간이 초과돼서 편집 때 애를 먹어요. 그냥 들으면 너무 기술적인 문제이고 예술과는 거리가 먼 것 같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예요. 할리우드영화가 몇 십년 동안 사람들을 지배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사람들이 버티고 흥분하고 이완되고 하는 감정의 시간적 수치를 노하우로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다음 영화 <마루치 아라치>에서, 한번 그걸 실험해보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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