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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취화선>, 임권택 영화 미학의 새로운 시원
2002-05-10

임권택과 <취화선>

허문영 사실 감독님이 최초로 <취화선>에 관한 구상을 말씀하셨을 때 동양화, 혹은 한국화의 독특한 미적 세계를 영화라는 서구적인 프레임에 어떻게 수용할 것이냐가 궁금했습니다. 족자 그림처럼 세로가 긴 프레임의 그림을 어떻게 찍을지, 또 원근법을 무시한 동양화의 느낌을 어떻게 잡을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은 개별적인 숏 안에서 동양화의 미적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는 찍히지 않았다는 느낌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신 건지, 아니면 찍는 과정에서 좀 방향을 수정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임권택 처음부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족자는 전체를 수용하기에는 영화 사이즈하고 너무 안 맞았기 때문에. 그래서 저것을 생각한 거죠. 왜 이런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 그리고 그림이 갖는 맛이나 멋은 전체로 설명이 안 되니까, 대사로 조금 보충해서 클로즈업과 겹쳐들어가면 대충 윤곽이나마 드러날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허문영 사실은 마지막에 드리고 싶은 질문을 미리 당겨서 하자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독님이 어떤 전작과도 다른 영화를 만들려 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개별적인 숏들 안에서 애당초 동양화의 맛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개별 숏들이 싸여가서 어떤 시점에 영화 전체가 거대한 병풍처럼 보이게 하는 그런 효과를 염두에 둔 게 아닌가 하는. 대신 개별 장면에서 감정의 지속은 계속 차단됩니다. 아까 의미가 전달될 만큼 생략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취화선>의 빠른 편집은 이야기의 생략과 감정의 차단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객에게 한 시퀀스나 한숏의 느낌에 파묻히지 않도록 하는 거지요. 그런 느낌이 들게 하는 또 다른 요소가 다분히 문어체적인 대사입니다.

임권택 어떤 데는 또 구어체로 된 대목이 있잖아요. 가령 오원이 진홍이나 초랑이와 말할 때. 근데 김용옥 교수가 한 부분과 내가 한 부분들의 차이가 좀 있어요. 김용옥 교수의 대사를 구어체로 바꾸기엔 너무 대사들이 휼륭하고, 내가 무너뜨리기엔 좋은 데들이 있기 때문에 수용했거든요. 그런 차이일 겁니다.

정성일 현장에서 영화를 봤을 때 느꼈고, 영화를 보면서 다시 확인했던 것은 이 영화는 롱테이크 영화가 아니라, 분명 몽타주 중심의 영화라는 것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가 대충 세어보니까 전체 156신에서 829숏, 그러니까 일반적인 감독님 영화보다는 2배 정도 되는 숏을 쓴 건데, 맨 처음에는 감독님께서 다른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의지로서만 이해했는데, 영화를 보면서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진홍이 집에서 장승업이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었습니다. 촬영현장에서는 모두 14신이었는데, 편집이 끝났을 때는 7신으로 줄어 있었습니다. 즉 감독님께서는 하여튼 그림을 그리는 과정 전체를 보여주는 것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이 영화와 맞지 않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임권택 사실 그림도 처음부터 다 그리게 했고, 거의 다 찍었어요. 확신이 안 서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무슨 얘기냐 하면 확신이 서는 데가 있으면 다 찍지 않고 이거 찍고 이거 찍고 그만두자 할 텐데, 그림의 세계에 대해서는 편집으로 이었을 때 내가 예상치 못했던 어떤 또 다른 좋은 점이 드러날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다 찍어놓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림을 그리는 영화를 했다면 그렇게 많이 찍을 이유도 없고 한데, 편집을 하다보면 정말 좀더 찍어둘 걸 아쉽다 하는 부분이 곧잘 나오는 거야. 그래서 불안한 거요. 지금 짧은 숏 얘기가 나오는데, 가령 장승업이가 이렇게 꽃을 보잖아요. 여러 컷 여러 컷 그 다음에 장승업의 얼굴, 그러면 매컷이 갖는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짧은 컷으로, 총체적으로 모아서 거기서 드러나는 어떤 미감, 이것을 굉장히 중요시했다고. 개별적인 숏 안에서의 아름다움도 물론 있지만, 이것을 한꺼번에 몰아 이어서 그 신을 아우를 때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어떤 인상 그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허문영 사람들이 놀랍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감독님이 전작들에서 롱테이크로 굉장히 아름다운 장면을 많이 만들어오셨는데, 소재가 다름 아닌 동양화이고, 화가의 이야기라면 어느 영화들보다 롱테이크의 아름다움이 많을 거라는 지레짐작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보니까 이건 굉장한 편집영화거든요.

임권택 매컷을 동양화로 찍는 것은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거죠. 그러면 아울러서 전체적인 영상이 주는 이미지가 큰 한국화를 만드는 수밖에요. 한국화라고 해야겠는데, 거기 사는 사람들도 그렇고, 모든 코스튬도 그렇고 생활습관도 그렇고, 이런 것들을 농축시켜서 담아 크게 보면 큰 영상으로 이뤄진 그림으로. 거듭 얘기하지만 그놈의 기품, 나는 기품이야말로 아무나 되지 않는다 생각한다고. 뭔가 사기치려 하고 욕심 부리는 사람은 절대로 그 경지에 올라갈 수가 없다고. 정직하고 양심적이고 절제하는 내면,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돼 있어야 거기에 들어가지. 아무리 하고자 해도 아무나 안 되는 세계가 거기일 거라고 생각을 한다고. 꼭 내 자랑하는 것 같아서…. (일동 웃음)

허문영 그 기품에 대해서 계속 얘기하게 되는 것은, 이 영화에서 강조되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고뇌거든요. 기품과 관련해서 이 영화는 예술가적 고뇌에 초점을 맞추면서 인간적 면모를 계속 압도한단 말이죠. 감상의 절제와 문어체의 대사에다 강한 클로즈업 같은 것들이 모여서, 아주 무겁게 다가오는 거죠.

임권택 너무 어려웠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어쨌거나 환쟁이들이 고민하는 세계는 관념의 세계란 말예요. 눈에 드러나지 않는 세계란 말예요. 그런 관념의 세계를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 이것을 못하면 이 영화는 하나 마나한, 거듭나고자 하는 화가를 찍는다면서 시각화시켜내지 못하면 아주 크게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것은 처음부터 정해진 거죠. 거기를 쫓다보니까, 그것을 받쳐줘야 할 사소한 것을 놓치고 간 것이 아닐까. 화가들을 인터뷰할 때도 그런 문제가 나왔다고. 아, 우리는 관념인데 그걸 어떻게…. 이런 식이니까 나도 죽을 지경이었지. 그러다보니까 무거운 쪽으로 이렇게 가게 된 거예요.

허문영 다 그렇진 않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절제하는 방식으로 편집을 하셨으면서도, 어떤 대목에서는 눈물이 핑 돌게 하는 장면이 꽤 있거든요. 무엇보다 뻘밭에서 김병문과 장승업, 두 늙은이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그런 대목들이 이를테면 진홍과의 다툼도 그렇고 초롱이와의 생활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 양자가 어떻게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나가느냐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조절을 어떻게 하는가 고민하셨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예술가로서의 고뇌를 드러내고 시대와 대면하는 대목들과 인간적으로 망가지거나 아주 일상적인 모습을 그리는 대목들을 어떻게 결합할지에 대한 고민이겠지요.

임권택 그러니까 관념의 세계와 일상생활을 어떻게 구분지어서 했느냐…. 왜 아까 장승업이 다 늙어서 만나는 데랄지, 또 그림 그려주면서 유랑길로 들어선달지, 뭐 그러니까 생활이라 할 만한 것 자체가 몇개 없지만, 그 몇개를 어떻게 빛나게 찍어서 감동을 실어볼 것이냐 하는 데 힘을 모았다고. 하도 여러 군데서 힘 모았다고 하니까 말발이 안 서겠지만…. (일동 웃음) 좌우간 진짜 이거 골치아팠어. 정말 힘에 겨웠다고. 개똥이와의 관계도 그래요. 개똥이하고 헤어질 때도 승업이가 그래 가거라, 하고 저만큼 가다가 개똥이를 슥 돌아보는, 이런 데를 찍어놓고도 삭제했어요. 그것도 기품의 문제가 걸리는 부분이요. 그런 감상을 잘라냄으로써 더 살려야 할 부분은 기품쪽이었다고.

최민식의 장승업, 임권택의 장승업

정성일 허문영 편집장이 예술적 고뇌와 인간적 고뇌, 이 두 가지의 끊임없는 줄다리기가 있지 않았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고민을 또 한 사람이 했던 것이잖습니까. 최민식이라는 배우가. 즉 감독님께서 예술적 고뇌를 하고 있는 동안에, 최민식이라는 배우는 장승업 안에 들어와서 인간적 고뇌를 하는 경우도 있고, 또 그 반대인 경우가 현장에서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를테면 연기를 볼 줄 모르는 저로서는 잘했구만, 이라고 생각하지만 감독님께서는 계속 NG를 부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는 감독님께서 장승업이란 한 환쟁이가 끊임없이 거듭나는 것을, 최민식씨는 장승업이 타고난 천재요 기인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사실 그것이 영화 속에서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은 아니고, 어떤 긴장을 만들어낸 부분은 있는 것 같습니다.

임권택 최민식이라는 장승업은, 장승업의 고뇌나 생활이나 그 생활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세계를 드러내야 되는 거요. 근데 나는 그것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으로 해야 될 일이 있어. 그것만 쳐다보고 따라가서는 내가 이루고자 했던 세계에 혼란을 주기에 딱 좋단 말이요. 그러면 감독이 생각하고 있는, 그리고자 했던 세계에 대해서 누구도 잘 들어올 수가 없어요. 그것은 내가 명료하게 설명할 길도 없는 거요. 그래서 끊임없이 가면서 찾아나서야 되고. 그림을 어떻게 찍어내며, 이 사람 관념의 세계를 어떻게 시각화시키며, 지금 딴 할 일이 굉장히 많은데, 장승업 선생의 생활이나 갈등만을 쫓다가다가는 다 놓친다 이거요. 그것을 다 수용해서는 안 되는 거요, 나는. 그러면 최민식이라는 장승업의 분신은 여기에 대한 고려가 있을 수 없는 거요. 내가 하고자 하는 이런 쪽의 것을 어떻게 알아채겠어요. 그러면 이것을 배제한 그 사람대로의 연기플랜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근데 그것을 다 수용하면 이쪽이 짜그라진다고. 나는 선별적으로 취사선택할 수밖에 없단 말야. 그런 데서 오는 연기자 나름의 무엇이 있었을 거야. 이런 것이 다 필요한데 감독이란 놈은 그 안에서 선별적으로 골라내고 나머지는 나 몰라라고 가고 있으니 어찌보면 아주 환장할 수도 있다고. 그런 제한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참 잘한 거요, 거 최민식이.

허문영 장승업이 김병문 집에 담 넘어가서 그림을 그리는 장면에서 최민식씨가 눈물을 흘려서 NG를 내셨다면서요.

임권택 그것도 기품과 관련될지도 몰라요. 물론 울 수도 있는 거요. 그러나 사소한 감정을 드러내는 쪽으로 장승업이를 찍어오지 않았다고. 거기서 느닷없이 그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안에는 깊은 사랑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런 식으로 살아내는 놈인데, 여기 와서 울고 있으면 그게 맞겠냐고. 삐끗삐끗 감정이 튀어나오면 수렁을 밟는 거죠.

허문영 굉장히 어려운 장면이 라스트신이었을 것 같거든요. 고민도 굉장히 많이 하셨다는 얘기도 들었고. 그 라스트신을 선택하게 된 감독님의 생각의 경위가 궁금합니다.

임권택 장승업이는 여하튼 행방불명된 것은 확실한데, 어떻게 행방불명을 시키느냐가 문제였어요. 장승업이라는 생애를 다루면서 마지막에 교통사고로 몰아갈 수는 없잖아요. (웃음) 병을 앓는 것도…. 나라면 결단을 내리지. 그렇게 유약한 모습으로 살 것 같지 않단 말이요, 내 기질로 봐서는. 그러면 어떤 죽음을 시킬 것이냐 하는 게 문제인데, 도자기는 사람 뜻대로 절대로 안 되는 세계요. 영화에서처럼 불의 조건에 따라서 좋은 놈이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고. 어찌보면 인간의 의지를 떠나서 뭔가 자연과의 절묘한 조화 속에서 비로소 탄생되는 거라고. 화가라는 것은 그런 세계가 아니잖아요. 장승업 입장에서 보자면, 나이도 지긋하고 벌써 수전증이 나왔을 때는 거듭나기에는 기운도 부치고 어떤 한계를 느껴가는 연령대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세계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진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불, 그 불 자체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거야. 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장승업이도 마찬가지요. 그러나 한계가 있는 거요. 그랬을 때 그런 편안한 죽음터가 어딨겠냐는 생각을 한 거요. 불이라는 어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 자기 눈앞에 실체를 드러냈을 때, 거기 들어가서 죽는 것만큼 아름다움의 세계와 합일하고자 하는 것이 없지 않냐. 환쟁이의 소망이라고 할까. 실제로 어떻게 죽었는지 알 길이 없어도, 감독이라는 입장, 시나리오를 끌어가는 입장에서는 거기가 최선이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죠.

정성일 감독님 팬클럽 식으로 질문하겠습니다. 장승업을 어떻게든 살려보실 순 없었습니까.

임권택 장승업을 나는 살렸다고 생각하거든요. 불과 합일이 된 세계, 이미 한 화가로서 현세에서의 생명력은 끝났다고 봤을 때는 훨훨 살아 있는 장승업으로 이해해야 될 것 같은 생각이요. 그런 죽음이 아니고 다른 죽음이라면 그건 정말 죽은 거죠.▶ 정성일 · 허문영, 임권택 감독을 만나다 (1)

▶ 정성일 · 허문영, 임권택 감독을 만나다 (2)

▶ 제2장 <취화선>, 그 열두폭 병풍 속으로

▶ 제3장 <취화선>, 임권택 영화 미학의 새로운 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