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제2장 <취화선>, 그 열두폭 병풍 속으로
2002-05-10

임권택과 <취화선>

정성일 이제 디테일을 좀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취화선>은 전체 156신 중 92신이 플래시백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화의 3분의 2를 플래시백으로 찍고 돌아오는 구조를 택하셨는데, 사실 현장에서 이런 질문을 드렸을 때, 최종적으로 편집하고 나서 얘기해보자라고 대답을 미루신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위험한 구성일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관례라면, 영화 시작할 때 플래시백으로 시작해서 끝날 때 돌아오거나, 3분의 1 지점에서 끝나고 현재로 돌아오는 것인데, 3분의 2를 플래시백으로 하는 이야기 구조를 택하셨을 때에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표현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임권택 그러니까 장승업의 어렸을 때부터 52살까지를 연대기적으로 배열하느냐, 아니면 어딘가 잘라서 그 장구한 세월을 빠르게 진행시켜서 돌아갈 것이냐 하는 문제와 걸리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최고 전성기를 도입부에다 올려놓으면서 들어가고 있단 말이에요. 그럼 관객은 이미 전성기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따라가게 돼 있다고. 가능하면 나도 3분의 1선에서 끊어서 빨리 하든가, 아니면 아예 뒤로 붙이든가 하려고 했었어요. 무슨 공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관객이 길들여진 틀로 가자면 그런 게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앞에 끌어댄 게 전성기요, 전성기. 3분의 2선까지 갈 수밖에 없는, 어찌 해볼 수 없는 조건을 안고 들어갔던 거요. 여하튼 가장 절정의 시기를 앞에다 놓아서 극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킨 끝에 진행하되, 이것을 빠른 속도로 진행해도 된다는 얘기요. 앞을 보면 사실 지나치게 건너뛰는 데도 있는 거요. 근데 그게 무리가 덜한 것은 전성기가 놓여 있기 때문이죠.

정성일 장승업이 그림을 그리는 게 21번이더라고요.

임권택 그래요? 21번이나 그려요?

정성일 예. 영화가 시작할 때의 산수화가 첫 번째고 그 다음 이응헌의 집에서 명나라 화가의 수선매작도 방작을 하고 등등 해서 21번을 그리는데, 11번을 플래시백 속에서 그리고, 나머지 10번을 플래시백 이후에 그리더라고요. 근데 제가 굉장히 흥미롭게 본 하나는 문인화가들의 대부분은 자기가 흥에 취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하나의 전통처럼 되어 있는데, 장승업의 그림의 특징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세도층이 원해서 그리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누군가 그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김병문 선생, 소운, 개똥이, 기생 매향, 진홍이 장승업 그림을 한점씩 가졌습니다. 즉, 감독님께서는 장승업이란 인물을 다루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거듭나려는 노력이라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 또 한 가지는 장승업이 다른 문인화가들과 달리 프로였다는 점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프로였다는 것이 왜 감독님께 그토록 중요한 문제로 다가왔는지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임권택 장승업은 문인화가나 도화사에 소속된 화원들과 달리 어디에도 소속됨 없이 그림을 그려서 밥을 먹어야 하는 환쟁이란 말요. 그렇다는 점에서는 장승업의 경우 삶 자체가 그림이고, 그림이라는 것이 곧 삶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 인물을 그리고자 한 거요. 물론 다른 사람들도 민화를 그려서 팔아먹기도 했겠죠. 그러나 순전히 그림으로 생활을 해가면서 살아야 하는 환쟁이를 그린다는 게 관심이 있었으니까. 만약 김홍도였다면 그 사람은 관리도 했고 그랬으니까 또 다르겠지. 그런 것이 아마 내가 장승업이라는 환쟁이를 영화로 옮기는 데 재미있는 요소로서, 매력있는 요소로서 다가왔던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죠.

정성일 또 한 가지 재미있게 생각했던 것은, 플래시백에서 그린 11폭의 그림은 그것이 습작이건 방작이건, 특징은 완성하는 데 목표가 있었습니다. 플래시백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망치는 쪽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임권택 전성기 이후에는 거의 자기가 못 갖든가 줘버리든가, 그것도 모두 파는 그림은 아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뒤에 이렇게 대사들을 보고 있으면 많은 그림을 팔아먹었구나가 드러나잖아요. 어디서 뭐 가짜시비가 있기도 했고. 영화를 끌어가는 데 그런 장면을 찍어놓고 있다면 낭비적 요소인 거요. 그런 사람으로 돼 있으면 되는 거지. 그 사람의 삶에서 우리가 영화에 담아야 되겠다는 어떤 부분만 담아가다보니 그런 현상이 일어난 거예요.

생략을 통해 보여주다

정성일 <취화선>을 제가 기술시사 때부터 지금까지 수차 보면서 느꼈던 가장 새로운 점은, 감독님의 영화 중에서 영화에서 찍힌 장면보다 생략된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더 의미를 갖게 되는 첫 번째 영화가 아닌가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감독님께서 무언가를 표현하지 않고 생략을 통해서 설명하는 방법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취화선>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매우 고급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임권택 그러니까 나는 생략을, 유추가 가능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생략해가고 있거든요. 그냥 가다가 못 따라올 것이다 하면 그런 짓을 안 하는 거요. 내가 판단하고 있는 기준이 맞는지 어쩌는지는 관객이 봐야 아는 얘기지만, 기왕에 해왔던 경험으로 봐서는 그런 생략을 해감으로써 앞을 따라가면서도 충분히 유추해서 흘러간 것들이 이해되고 납득되는, 그런 방식으로 편집을 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죠.

정성일 그림에 일천한 제 눈으로는 장승업의 그림들이 처음에는 화려하고 다양한 화풍에서 차츰 품격을 가졌다가 결국 단순해지는 쪽으로 형상이 바뀐 것 같습니다. 이 21폭의 그림의 순서를 배열하시면서, 어떤 원칙이 있었습니까.

임권택 장승업 선생 도록을 보고 있으면 꼭 순서에 맞지 않은 그림도 있어요. 그러나 영화 내에서는 그것을 체계있게 잡아나가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건 뭐냐하면 젊었을 때는 중국 그림도 화려하고 섬세한 필체로 어지가지를 다 드러내는 그림이다가, 이제 그 다음으로 가서는 좀더 정제된 그림으로 넘어가고, 이제 말년에 와서는 몇획으로 그 감을 드러낼 수 있게 되죠. 장승업 선생 도록을 보고 있어도 전체적으로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어요. 나는 그게 옳다는 생각을 하는 거요. 젊었을 때, 방황할 때는 뭐 낙엽도 화려하고 저 매화꽃도 무리지어진 화려한 느낌을 보여주다가 중년에 들어서면 지엽을 바라보고, 지엽에서 미를 끌어내려고 하는, 이런 식으로 변해가고 있잖아요. 그것도 전부 계획된 배열이거든요.

정성일 또 하나, 이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장승업이 만나는 세명의 여자, 또는 다섯명의 여자입니다. 즉 매향과 진홍과 소운, 또는 소운과 비슷한 외양의 향란, 그리고 초량이, 동학혁명 때 만나는 기생 말입니다. 다른 모든 인물들은 퇴장과 등장을 거듭하거나 한번의 에피소드에 나왔다가 빠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유독 진홍이가 등장하는 장면부터 영화는 드라마의 기승전결을 가졌습니다. 진홍과의 만남에 매우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진홍이를 만나는 순간이 장승업이 예술세계에서 한번 점프하는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진홍이에게 그려준 그림을 다른 화사, 화공들이 보면서 이제까지 장승업 그림과는 영판 다른 그림이 나왔네, 라고 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또 진홍의 에피소드는 굉장히 재미있기는 하지만, 범인이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불륜의 현장을 붙잡은 여자를 위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승업이라는 인간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권택 우선 진홍이와 승업이와의 삶을, 어린아이들은 이해하기가 좀 무리일 것이라는 생각을 좀 하면서 찍었어요. 하긴 40∼50대의 내 아는 사람도 어떻게 다른 남자와 외도한 현장을 보고 그런 훌륭한 그림을 그려줄 수 있겠으며, 어떻게 그런 훌륭한 그림이 나오겠냐, 이런 문제를 제기해요. 물론 승업이 진홍이라는 여자와 붙어살면서 화혼(畵魂)이 피어났다고 보기는 어려운 거야. 왜냐하면 알다시피 거듭나고자 하는 고뇌는 방랑하면서 다 드러난 얘기라고. 진홍이 때문에 그런 좋은 병풍이 그려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거죠. 단지 외도한 여자, 불륜을 저지른 여자는 조선시대의 윤리관에서는 도저히 그냥 넘기기 어려운 건데, 나는 거기서 장승업이란 한 화가의 가려진 진짜 순수한 모습을 거기서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외도를 했다는 것보다도 장승업이 더 소중하게 생각한 것은 진홍이에 대한 애정이면서 진홍이가 준 자기에 대한 어떤 헌신에 대한 보답이라고. 장승업이의 저 안에는 진홍이에 대한 죄스러운 감정, 미안한 감정이 같이 공존하고 있었다고, 나는 이렇게 보면서 찍은 거예요. 어떤 윤리적 틀 안에 묶여 있지 않고, 그것을 훌쩍 벗어던진 한 환쟁이의 순수한 정신, 나는 이것을 그리고 싶었다고.▶ 정성일 · 허문영, 임권택 감독을 만나다 (1)

▶ 정성일 · 허문영, 임권택 감독을 만나다 (2)

▶ 제2장 <취화선>, 그 열두폭 병풍 속으로

▶ 제3장 <취화선>, 임권택 영화 미학의 새로운 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