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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독립영화계의 대모 크리스틴 바숑, 7문7답
2002-05-11

씩씩한 엄마는 울지 않는다

‘슈팅 투 킬-인디 프로듀서는 문제적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장벽을 돌파해왔는가’. 자신의 영화 여정을 담은 책의 제목처럼, 크리스틴 바숑은 미국영화계에 풍부한 논쟁을 제공해온 독립영화의 프로듀서다. 토드 헤인즈의 91년작 <독약>을 필두로 그가 제작한 영화들은 저예산의 열악한 제작여건 속에서 분투해왔고, 동성애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도발적인 진술로 이성애 중심 사회의 편견에 문제를 제기했다. 96년 영화사 킬러 필름즈를 설립하고 더욱 다양한 독립영화 제작에 힘을 쏟고 있는 바숑을 전주에서 만났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 마련된 회고전을 계기로 한국을 찾은 바숑은 미국 독립영화의 대모란 수식어가 어울리게 넉넉한 인상이었다. 그녀 자신도 레즈비언으로 여자친구와 입양한 딸과 함께 대안가족을 이뤄서 살고 있다.

제작자로 처음 이름을 올린 <독약>은 90년대 초반 뉴퀴어시네마라 불리는 흐름의 시작이라 할 만하고, <키즈> <소년은 울지 않는다> 등등 미국사회 내에서도 도발적인 영화를 주로 제작해왔다. 그런 영화들을 제작하게 된 계기는.

<독약>은 내가 제작한 첫 장편영화이니만큼, 처음이라 얼마나 어려운지 정말 몰랐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로지 좋아서 했던 아주 무식한 작업이었다. 물론 토드 헤인즈는 정말 비범한 감독이고, 그의 첫 장편을 만들 때 옆에 있었다는 건 정말 굉장한 경험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어떤 종류든 게이, 퀴어시네마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주 흥미로웠다. 게이 커뮤니티는 배급자들 사이에서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관객’(under-served audience)이었다. <독약>은 소규모 배급업자가 배급했지만,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봤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렇게 실험적인 영화를 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물론 아주 오래 전 얘기고, 그 이후로 주류 영화에서도 게이를 다룬 영화가 많아지면서 게이 관객도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독약>은 단편영화만 만들던 나에게 장편영화로 훨씬 더 많은 관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고, 난 거기에 도취됐다. 극장에 개봉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장편영화를 하고 싶다고. <독약>은 그런 종류의 영화에도 관객이 있다는 사실을 구체화시켜 주기도 했다. 꼭 게이나 퀴어영화일 필요는 없었다. 당시는 그런 용어를 정의하기 전이었으니까. <독약>처럼 정말 독창적이고 도발적이지만 재미있는 영화면 되겠다고, 사람들이 꼭 할리우드영화처럼 틀에 박힌 영화만 보러 가는 것은 아니라고 느꼈다.

<독약> <고 피쉬>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 등 동성애와 젠더, 섹슈얼리티에 관한 도발적인 시선이 담긴 영화들을 많이 제작해왔다. 그래서 게이 앤드 레즈비언 필름 페스티벌에서 공로상을 받는 등 퀴어시네마운동과 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인식되고 있는데, 특별히 그런 소재를 선호한 이유가 있나. 당신의 성적 정체성과 관계가 있다든지, 혹은 검열과 보수 집단들의 비난을 받은 <독약>이나 <키즈>처럼 기성사회에 대한 도발의 의미가 있다든지.

처음 장편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항상 관객에게는 도발적인 주제에 매력을 느껴왔다. 그게 종종 젠더의 이슈로 나타났지만, 내 영화는 종종 게이 커뮤니티로부터도 심하게 비판받곤 했다. <졸도>가 나왔을 때는 게이 커뮤니티의 성원들로부터 동성애를 그처럼 사악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 권리가 없다는 비난을 들었고, 레즈비언 커뮤니티는 내가 여성 동성애자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고 피쉬>를 만들자 하, 이제야 뼈다귀를 던져주려 하는군, 하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어왔을 뿐이다. 내가 제작한 영화들은 젠더나 섹슈얼리티를 다룬다 해도 아주 미묘한 방식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나한테는 아주 흥미롭다. 꼭 이른바 퀴어를 옹호하는 전언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오히려 도대체 젠더란 게 뭐냐는 식이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그게 뜻밖의 결과를 낳기도 했다. <독약>은 워싱턴에 있는 정부 산하 단체인 NEA(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의 보조금을 받았다. 그외에도 많은 영화 관련 기구로부터 그해의 보조금을 따냈는데, 미국가족협회(American Family Association)란 단체의 대표 도널드 와일드가 의회의 의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의 유권자들이 세금으로 내는 달러가 게이 남성들의 포르노그라피를 만드는 데 쓰이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이 사건 때문에 미디어의 집중포화를 받게 됐고, 영화를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많은 신문들에 이렇게 역겨운 영화는 본 적이 없다는 식의 논설을 실음으로써 결국 많은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역겨운 영화인지 보기 위해 극장으로 달려가게 됐다. <키즈>가 개봉됐을 때도 뉴욕 10대들의 현실을 제대로 담았다는 평과 어떻게 저런 영화를 만들 수 있냐는 논란이 엇갈리면서 화제가 됐다. 하지만 감독이, 작가가 끌어가는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다. 다른 식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들이었고, 굉장히 대립과 평이 분분했지만, 그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짐 자무시, 할 하틀리, 스파이크 리 같은 감독들과 뉴퀴어시네마 등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을 거쳐 가시화된 미국의 독립영화의 역사를 지켜봐왔다. 미국 독립영화의 흐름을 지켜본 장본인으로서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보나.

많은 변화가 있었겠지만, 크게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첫 번째는 독립영화 역시 할리우드영화만큼이나 배우 중심이 됐다는 것이다. 내가 처음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100만∼200만달러 미만의 영화에 누가 출연하는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름값이 좀 있는 스타들을 캐스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기보다 정말 훌륭한 배우들을 기용할 수 있었다. 지금은 신인감독들이 제작비를 모을 수 있는 출연진을 끌어들이고자 애써야 한다. 두 번째로 큰 변화는 디지털영화다. 디지털영화 만들기가 영화산업에서 무엇을 얼마나 크게 바꿔놓을지는 다 예측할 수 없을 정도다. 올해 선댄스만 해도 주요 수상작이 대부분 디지털영화다. 미국에서는 많은 극장들이 디지털로만 상영하는 체제로 변화하고 있다. <시리즈7>은 내가 제작한 첫 디지털영화고, 디지털로 새로운 내러티브를 찾아가려고 한 작품이다. 단순히 35mm로 만들면 제작비를 모을 수 없기 때문에 디지털로 만드는 게 아니라, 더 강력한 소재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첼시 호텔>과 <영화 속의 여성들>도 디지털이란 매체의 유연성을 활용하고 실험하고자 했던 영화다. 하지만 디지털영화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몇년 이내에 셀룰로이드 필름만을 고집하는 감독들이 생겨날지도 모르지. 일부 밴드들이 CD보다 레코드 녹음이 더 쿨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독립영화는 종종 저예산영화와 동일시돼왔다. 정부 혹은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에서 제작비를 지원받기도 하고, 미라맥스 같은 할리우드영화사에서도 예술영화 성향이 짙은 소규모 영화들을 제작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의 독립영화가 제도화되고 있다는 비판도 있는데, 당신은 독립영화의 정체성이 뭐라고 생각하나.

사실 지금에 와서 ‘인디펜던트’란 용어는 어찌보면 소용이 없는 말이다. 이를 대체할 더 좋은 말을 찾진 못하겠지만, 모든 영화는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적이지 않다. 자기 주머니만 털어서는 영화를 만들기 힘들다. 내가 관여하는 모든 영화에 자신의 돈을 돌려받을 수 있기를 매일 밤 기도하는 투자자들이 있다. ‘독립’이란 말은 영화시장에서 종종 몇 십만달러, 몇 백만달러로 만들어졌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이제 ‘독립영화’란 말은 뭔가 대안적이거나 게이든 흑인이든 라틴계든 아시아계든 여성이든 ‘고려되지 않은’ 관객을 위한 영화를 의미하는 일종의 캐치프레이즈가 됐다. 최근에 제작한 <원 아워 포토>(One Hour Photo)는 1000만달러가 넘는 영화고, 메이저 스타인 로빈 윌리엄스가 출연한다. 감독인 마크 로마넥은 마이클 잭슨과 자넷 잭슨이 나온 <Scream>처럼 편당 몇 백만달러씩 드는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온 사람이다. 그래서 이따금 이 장면에서 크레인 한대 가져올까, 그러면서 놀라게 하지만 그의 구상 자체는 독립영화적이었다. 예산이 커질수록, 눈치를 주고 압력을 주는 사람들도 많아진다. 이 영화를 하면서 처음으로, 감독을 스튜디오로부터 보호하는 일에 내 시간의 대부분을 쏟았다. 규모가 적은 독립영화에서 프로듀서와 감독의 관계는, 이를테면 결혼 같은 거다. 아주 친밀하고, 매일매일 영화가 자라나는 과정을 같이 보고, 그 과정에서 밥도 주고, 물도 주며 거의 모든 것을 함께한다. <원 아워 포토>의 경험은, 영화가 커지면 프로듀서는 창조적인 과정에서 뒤로 물러나 그 과정을 보호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을 알려줬다. 가능한 한 1천만달러 이하의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것도, 돈이 적을수록 왈가왈부하는 사람도 적고 창작자의 자유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슈팅 갤러리나 굿머신 등 다른 독립영화사와 비교할 때 킬러 필름즈와 당신이 독립영화 제작자로 살아남는 생존전략이 있다면.

슈팅 갤러리는 거의 망했다. 우리가 돌봐줘야지. 사실 지금 남은 독립영화사라곤 굿머신과 킬러 필름즈 둘 정도다. 우리는 때로 함께 작업하기도 하지만, 때로 매우 경쟁적이다. 굿머신은 킬러 필름즈보다 규모도 크고 포르노 세일즈도 한다. 킬러 필름즈에 대해서 말하자면, 좋은 시기도 있었고, 나쁜 시기도 있었다. 기본적인 서바이벌 전략은 최소한 적은 돈으로 일을 하려고 하고, 너무 비대해지지 않도록, 효율적으로 운영하려 애쓴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전략은 영화를 만드는 것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먹고살기에 끔찍한 방식이다. 아주 노동집약적이다. 돌아오는 것이 적다. 그래서 다른 사업을 시작하면, 이내 거기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는 돈을 벌기 쉬울 테니까. 슈팅 갤러리가 망한 이유 중 하나는 포스트 프로덕션 시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로 돈을 좀 벌기도 했지만.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데만 주력하기로 했고, 내가 제작하는 영화가 그러한 노력의 집약인 셈이다.

한국에서는 단기간의 흥행결과에 따라 상영을 지속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와이드 릴리즈 방식 때문에 소규모 작가영화나 예술영화가 살아남기 힘들다.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배급과 마케팅에서 관객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위한 비결이나 해결책이 있다면.

미국도 마찬가지다.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줄었는데, 극장 개봉을 두고 경쟁하는 독립영화는 늘어나서 배급 환경은 악화됐다. 내가 영화일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저녁 파티에 가서 그 영화가 얼마나 좋았는지 얘기하고, 그렇게 점진적으로 관객이 형성되곤 했다. 하지만 <소년은 울지 않는다>가 개봉했을 때 개봉주 일요일에 폭스 서치라이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때까지 성적이 어떻고, 이 숫자면 미국에서 어느 정도의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지를 얘기해줬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맞아떨어졌다. 요즘은 매주 월요일에 신문을 펼칠 때마다 그런 식의 피드백이, 어떤 영화가 터졌고 망했는지를 극장에 가지 않아도 알게 해준다. 난 감독들이, 극장 개봉이 자신의 영화를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포기하는 게 하나의 해결책일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의 경우 대부분의 가정이 600∼700개의 케이블채널을 보유하고 있다. 독립영화 감독들도 케이블, 페이퍼뷰, VOD 등을 통해 관객을 끌어들이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킬러 필름즈도 앞으로는 그런 방법들도 고려하고 있다.

독립영화의 프로듀서로서 현재 가장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뭔가.

지난 15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제작비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영화를 만들려면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저예산영화의 제작과정은 선로를 이탈한 미친 열차와 같다. 내 역할은 기차가 일단 역을 떠나게 하는 것이고, 그뒤로는 가속력을 최대한 이용해서 달리는 수밖에 없다. 난 다행히도 하루하루에 아주 집중할 수 있는 편이다. 그게 내가 만들어온 것과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고. 각각의 영화가 자식과 같기 때문에 한밤중에 잠이 깨서 이 영화는 돈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저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걱정하곤 한다. 어떻게든 킬러 필름즈가 사라지지 않도록 이끌어가고, ‘저 여자 한때 괜찮은 영화를 만들었지’라고 공룡 취급받지 않도록 하는 게 가장 큰 고민이다. 전주=황혜림 blauex@hani.co.kr▶ 미국독립영화계의 대모 크리스틴 바숑, 7문7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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