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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는 대답
강화길(소설가) 2020-11-09

영화 <엑소시스트>

<엑소시스트> 사진제공 SHUTTERSTOCK

<엑소시스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슬픈 영화 중 하나다. 리건 때문이다. 나는 그 아이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약간 견딜 수 없어진다. 그런 기분에 사로잡힌다. 대체, 이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왜 하필 얘인가. 리건은 영화배우 크리스의 외동딸인데 어느 날부터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느닷없이 해괴한 소리를 하고, 오줌을 싸고,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자해를 하고…. 리건은 묻는다. “엄마, 내가 왜 이러죠?” 그리고 또 말한다. “무서워요.”

실제로 영화 <엑소시스트>는 무섭다. 12살짜리 아이에게 악마가 들러붙은 이야기니까. 심지어 영화는 ‘리건’이 여자아이라는 설정을 아주 교활하게 활용한다. 영화사에 길이 남은 그 명장면들은 모두 악마가 ‘리건’의 몸을 처참하게 학대하는 순간들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 학대는 공교롭게도 악마의 농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원인을 찾기 위해 리건의 몸에 주삿바늘을 찌르고, 기계 속에 몸을 집어넣는 병원의 검사 장면 역시 끔찍하다. 그 앞에서 엄마 크리스는 무력하기만 하다. 돈과 명성이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이의 아버지는 딸의 생일도 잊고 지낼 정도로 무관심한 사람이고, 의사들은 그녀의 걱정을 과민하게 받아들인다.

그녀가 궁여지책 끝에 찾아간 카라스 신부 역시 마찬가지다. 다들 방법이 없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물론 그랬던 카라스 신부가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고 엑소시즘을 결정하는 과정은 ‘아름답다’. 그는 믿음을 잃어가던 신부였고, 자신의 일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어머니를 잃은 후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인생을 반쯤 포기한 사람이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일어서는 이야기는 언제나 아름답다. 그의 최후까지 생각한다면 더더욱 더 그러하다. 하지만 그는 나약한 인간이기도 하기에 악마에게 휘둘린다.

엑소시즘을 시작하면서 메린 신부는 카라스 신부에게 경고한다. 절대 악마와 대화하지 말라고. 그 충고를 받아들이는 건 별로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악마 따위와 무슨 대화를 한단 말인가. 악마인데! 하지만 그 악마가 ‘인간’의 얼굴 뒤에 숨어서 ‘인간의 말’을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신부님 도와주세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너는 왜 어머니를 내버려 뒀니. 그녀의 죽음은 다 너 때문이야. 너는 왜 그런 선택을 했니. 너는 죄인이야. 모두 다 네 잘못이야. 실제로 그의 외삼촌은 카라스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네가 신부가 안됐으면 잘나가는 정신과 의사가 돼서 네 어머니는 병원이 아닌 대저택에 사셨을 거야.” 사람을 무너뜨리는 말. 고통스럽게 하는 말. 간신히 버티고 있는 마음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말.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궁금하다. 악마가 인간의 언어를 아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악마의 언어를 아는 것일까. 사실 악마와 인간은 처음부터 같은 언어를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둘 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지 않을수록, 상대에게 더 악랄해질 수 있다는 것. 인간의 유약한 마음은 이름 없는 이들이 쏟아내는 더러운 말에 오염되고 파괴되기 쉽다는 것. 악마는 리건의 몸속에 숨어 끊임없이 소리친다. 너는 보잘것없어. 너는 나약해. 이 계집애는 내 거야. 그리고 웃는다. 웃고 또 웃는다. 그 때문에 나는 슬프다. 대체… 왜 하필 리건이란 말인가.

어릴 때 나는 어떤 일이 생길 때마다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늘 동기에 집착했다. 사람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고, 그걸 알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내가 찾아낸 ‘이유’는 나를 위한 핑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보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구성한 ‘진실’은 내게 아주 잠시 평안을 가져다줬을 뿐, 결국은 나를 더 깊은 지옥으로 안내하곤 했다. 어쩌면 이미 나는 지옥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걸 조금은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기를 비워두는 것이, 설명하지 않는 것이 이야기의 본질에 다가가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리고 모두 납득할 만한 이유 같은 건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하지만 이 역시 모두 핑계일지 모른다. 어쨌든 이야기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끼워맞추는 것이고, 나는 소설을 쓸 때마다 인물들의 말과 행동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끊임없이 살펴보니까. 아니, 집착하니까.

이 빌어먹을 악마도 리건에게 집착한다. 그의 이유와 계기를 찾으려고 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다. 리건이 아이이기 때문에, 혼자 있었기 때문에, 외로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 악마는 원래 그렇다. 들러붙는다. 기생한다. 그렇지 않은가. 잡아먹고, 집어삼키고, 괴롭히고, 고통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그것으로 살아간다. 때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 너는 누구인가. 왜 이렇게 하는가.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악마는 마치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굴지만 사실 동기에 아무 관심이 없다. 아니, 아주 오래전에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늘에서 쫓겨난 이유, 누군가에게 원한을 갖게 된 이유, 그래서 자신의 고통을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우고 싶은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악마를 그냥 악마로 만들었다. 원한만, 악함만 남겨놓았다. 때문에 어쩌면 악마도 묻고 싶을지 모른다.

“내가 왜 이러죠?”

이 영화의 진짜 끔찍함과 슬픔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존재를 찾을 수 없다는 것. 어린 리건이 고통받는 동안, 카라스 신부와 메린 신부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안, 크리스가 가슴을 치며 괴로워하는 동안, 신이여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요즘은 자주 그런 생각이 든다. 악마는 어디서든 찾을 수 있지만, 신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어떻게 버텨야 하는가. 기도로? 유약한 믿음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로? 잘 모르겠다. 대체 우리는 무엇을 해야 서로에게서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내게 <엑소시스트>가 슬픈 영화인 이유 하나를 더 고백하고 싶다. 그건 <엑소시스트2>가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리건이 과거와 똑같은 고통을 겪는 걸 별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2편의 존재는, 리건이 결국 악마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나는 그저 1편의 결말을 기억하며 평안을 얻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겠지. 그리고 그러면 안되는 거겠지. 정말이지, 끊임없이 싸워도, 너는 끊임 없이 살아남는구나…. 악마도 인간을 보며 과연 이런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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