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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조제' 한지민 - 더 멀리, 더 단단하게
김현수 사진 오계옥 2020-12-03

<미쓰백>의 백상아를 연기하며 그해 배우가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찬사를 받았던 한지민이 선택한 인물은 장애 때문에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책을 통해 세상을 접할 수밖에 없는 <조제>의 조제다. 드라마 <아는 와이프> <눈이 부시게> <봄밤>을 통해 그녀가 보여준 인물들 역시, 우물쭈물하거나 멈춰 설 여유 없이 일상을 전투적으로 치러낸 캐릭터들 이었다. 작품 외적으로도 여러 사회 활동을 통해 어떤 장애물이든 지혜롭게 뛰어넘을 것 같은 이미지를 구축한 한지민과 조제의 조합이 궁금해진 이유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배우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을 듯해서다. 한지민의 또 다른 시작점이 될지도 모를 <조제>의 개봉을 앞두고 원작과는 다른 조제만의 사랑법에 관해서, 30대를 마무리하는 2020년의 고민과 관심사에 대해서 물었다.

-<조제>는, 영화로는 <미쓰백> 다음 작품이자 드라마 <눈이 부시게>로 한 차례 호흡을 맞췄던 남주혁과의 연이은 작업, 또 유명한 원작 영화의 리메이크라는 여러 부담감을 안고 시작했을 영화다.

=<최악의 하루> 시사회 때 김종관 감독과 대화를 나누면서 한번은 같이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후 <눈이 부시게>를 작업한 직후 주혁씨로부터 <조제>에 캐스팅됐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시나리오를 읽어봤다. 내가 주혁씨와 작업한 지 얼마 안됐는데 괜찮겠냐고 감독님에게 물었더니, “두 사람이 더욱 편안한 호흡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고 또 시나리오도 원작과 다른 방향이라 “한지민이 보여줄 수 있는 점이 명확하게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어렵지만 조제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점이 어려울 것 같았나.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를 본 지 꽤 오래됐는데 일부러 다시 찾아보지는 않았다. 김종관 감독이 그려낸, 그리고 또 나만의 온전한 조제를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아마 감독님도 장면마다 원작과의 차별성을 염두에 뒀더라면 리메이크하지 못했을 것 같다. 내가 어려울거라 예상했던 점은 책을 통해 세상을 접하는 캐릭터로서의 조제, 자신의 감정을 말로 드러내지 않거나 표현의 폭이 넓지 않은, 잔잔하면서도 색이 뚜렷하지 않고 또 낯설지만 독특한 매력이 느껴지는 조제만의 색을 과연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라는 점이었다. 극중 조제를 대하는 영석(남주혁)과 관객 모두 조제가 어떤 사람인지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 때와 다르게 받아들이게 될 것 같다.

-시나리오상에서는 조제의 감정 변화를 짚어낼 수 있는 장면이나 대사 등이 명확하게 묘사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영화가 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인물의 눈빛이나 표정, 영화의 온도, 기운으로 전해지는 정서적 울림이 많은 영화다. 김종관 감독만의 색깔이기도 한 것 같다.

-온라인 제작보고회에서 김종관 감독은 <조제>의 공간을 잘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를 소개했다. 조제의 공간에 들어섰을 때의 기분은 어땠나.

=작업 전에는 감독님이 보여준 레퍼런스 이미지가 있었다. 실제 촬영장에 들어서니,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책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어찌 보면 책은 조제에게 세상의 빛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뛰놀 수 있는 공간이다. 화려한 것은 아니고 보다 풍부하게 꾸며진 것 같다.

-예고편에 담긴 장면 가운데는 조제가 영석을 퉁명스럽게 대하는 장면들이 있다. 그러면서 아주 연한 미소를 짓기도 하는데 그 장면들을 보고 나니 한지민의 조제가 어떤 톤 앤드 매너로 말을 내뱉는 캐릭터일까 궁금해진다. 영화를 보게 될 관객은 아마 원작 속 이케와키 지즈루가 보여줬던 사투리 연기의 톤과 비교하며 보게 될 텐데.

=조제가 어떤 표정과 톤으로 대사를 뱉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감독님이 원하는 분명한 지향점이 있었다. 지금 이 대화만으로 조제답다, 라는 걸 이해시키기가 참 어려운데 예고편에 등장하는 “독이라도 타놨을까봐?”라는 대사를 할 때를 예로 들면, 조제만의 묘한 유머가 영화에 분명히 담겨 있다.

-조제와 영석이 우연히 만나 서로의 마음에 동요가 일게 되고, 또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에게 스며들면서 변화하게 될 텐데 연기하면서 유독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나.

=아마 관객은 그런 순간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영화를 보게 될 거다. (웃음) 물론 연기하는 내게는 나름대로 변화의 순간들이 있었다. <조제>는 영석의 따뜻한 마음씨로부터 관계가 시작되는 영화인데 극중 조제는 대사보다는 여러 상황과 표정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을 보여준다. 조제와 영석의 동선 변화로도 그 감정의 변화를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 중에, 옆에 없어봐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있지 않나. 영화에서도 그런 영석의 존재감을 깨닫게 되는 조제의 순간이 담겨 있다.

-김종관 감독이 제작보고회 직후 개인 SNS에 조제로 분한 지민씨의 사진을 한장 올렸다. 공식 포스터에 사용된 컷인데, 그는 그 신을 촬영할 때 “우리가 만나게 될 조제를 처음으로 마주한 기분이 든 순간이었다”라고 회상했다.

=내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조제의 사진”이란 댓글을 남겼다. 영화에 등장하는, 아직은 말할 수 없는 어떤 장소에 영석과 조제가 도착한 장면인데 첫 촬영날 찍었다. 감독님이 직접 찍은 그 사진을 보면서 앞으로 조제가 겪게 될 순간에는 바로 이 얼굴을 하고 있겠구나 싶더라. 설정상 조제는 멀리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 사진에서 보여준 눈빛만큼은 어디든 멀리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일종의 단단함이 느껴지는 사진이라고 감독님이 말씀해주셨다.

-예고편에 등장하는 조제의 대사 중 “때로는 너랑 가장 먼 곳을 가고 싶었어. 그러면서도 갇혀 있고 싶었어”라는 말에서도 느껴지듯, 조제는 어떤 관계가 시작되기 전부터 결말을 내다볼 줄 아는,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 장면을 연기할 때 나는 영석을 통해서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되는 조제의 단단함과 동시에 외로움도 같이 느꼈다. 아마 조제는 다시 외롭고 쓸쓸해지더라도 그 이전만큼 두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외롭지만 두렵지 않은 조제의 마음이 그 장면에 담겨 있다.

-<조제>의 조제는 위스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인물이다. 영석과 위스키에 대해 나누는 대화도 있을 만큼, 술은 조제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데 중요한 매개다. 그런데 <봄밤>의 정인이 첫 등장할 때 대사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나.

=물론 기억한다. (웃음) “소확행이 별거야? 퇴근하고 친구와 한잔.”

-<눈이 부시게>에서는 혜자가 좋아하는 선배 앞에서 술에 취해 고백하다가 구토를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위스키를 잘 아는 조제라는 설정이 배우의 전작 속 연기를 염두에 둔 감독의 의도인가 싶더라.

=많이 알려져서 이제는 말할 수밖에 없겠다. (웃음) 저는 술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번 영화의 설정은 전적으로 김종관 감독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다. 현장에서 직접 위스키와 관련된 대사를 공들여 바꾸실 때도 있었다. 책과 위스키, 감독님의 평소 모습에서 조제다운 면이 보일 때가 있다.

-최근 출연작인 <아는 와이프> <봄밤> 그리고 <조제>는 사랑, 결혼, 나아가 관계 맺음에 관해서 연관 지어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작품들이다. 배우가 작품을 선택할 때 이런 연관성, 혹은 현재의 고민을 반영한 결과일까 궁금하다.

=<봄밤>을 선택한 이유는, 연인 관계에서 다음 스텝을 고민하게 될 때 정 때문에 결혼을 택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조제>는 판타지, 멜로영화가 전해주는 재미도 있지만 조제와 영석의 첨가물 없는 민낯 같은 관계, 현실과 닿아 있는 점을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헤어지는 데 단 한 가지 이유만 있을까. 감독님도 그런 이유에 대한 명확한 표현을 영화에 담고 싶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관객 입장에서는 친절하지 않은 영화가 될 수도 있다. 이별은 나 자신조차 속일 수 있는 순간이다. 그런 순간을 명확하게 그려내지 않는 것이 원작과의 차이일 수 있다. 원작 영화에서는 이별하는 과정이 세밀했다면 <조제>는 사랑하는 과정에 더 중점을 둔 것 같다.

-<조제>는 조제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 조제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취향으로 이뤄진 영화이기도 하다. 그를 연기한 배우 한지민은 평소 무엇을 주로 바라보고 아름답다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첫째는 자연, 둘째는 사람. 계절이 다가오고 멀어지는 풍경을 떨어져서 바라볼 때도 좋지만 가까이 들여다보고 감동받을 때가 많다. ‘어떻게 이파리에 저렇게 얇은 줄기들이 있지? 꽂은 어떻게 색을 내고 향기를 풍기지?’라며 자연에서 받는 에너지가 크다. 또 예전에는 슬퍼서 울었는데 요새는 따뜻해서 울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전해주는 감정을 통해 내가 치유받는다. 내 옆 사람들이 곧 나의 세계가 아닐까.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이어오면서 맡았던 작품의 캐릭터들이 전해주는 메시지, 또는 배우가 직접 사회 활동을 하면서 대중에게 전하는 한지민의 이미지는 건강함이다. 앞으로도 작품을 선택할 때 현실을 잘 극복하고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 느껴지는 캐릭터를 선택하게 될까.

=어떤 작품이든 좋은 영향을 끼쳐야겠다고 다짐하듯 고르지는 않는다.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내 고민과 관객의 요구가 맞아떨어지는 경우들이 있었을 뿐이다. <국가부도의 날>의 특별출연은 김혜수 선배와 꼭 한번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였고, <허스토리>는 친한 후배인 이설 배우의 출연작이어서 감독님에게 인사드린 게 인연이 되어 우정출연하게 된 식이다. 그때 마침 내가 ‘기억의 터’ 홍보대사를 하고 있기도 했고. <미쓰백>도 <조제>도 화장을 잘 안 하고 나온 경우인데, 관객에게 나의 새로운 면을 한 장면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만들었다. 다음 작품도 그렇게 고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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