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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의 마음이 하는 일] 소원을 이룬 다음 날 살아가기
오지은(뮤지션) 2021-03-04

일러스트레이션 EEWHA

(이 글에는 영화 <소울>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만 되면 소원이 없겠다’라는 말을 종종 하고 살았다. 어릴 땐 참 자주 했다. 예를 들어 7살 때의 난, 바비의 집을 가질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 맨션 스타일의 널찍한 구조와 고무로 된 크고 미국스런 강아지까지…. 꿈같은 물건이었는데 운이 좋게도 어린이날에 그것을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히 다음 날 새로운 소원이 생겼다. 소원의 본질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성찰하기엔 너무 어렸고, 그 후 무수한 소원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중 어떤 소원은 상당히 오래가기도 했다.

<수요예술무대>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MBC에서 수요일 늦은 밤마다 하던 방송이었고 내한한 재즈 뮤지션이나 좀 예술적(?)이라고 MBC가 분류한 국내 뮤지션들이 나오곤 했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그 프로그램을 동경했다. 김광민이현우의 느릿한 숭늉 같은 진행도 좋았고, 음향도 좋았고, 특히 자주 쓰던 푸른 조명이 너무나 좋았다.

나는 음악이 공기를 바꾸는 마법 같은 순간을 그 프로그램을 통해 자주 경험했다. 엠시의 말이 끝나고, 잠시 뮤지션이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지고, 조명이 바뀌고, 첫 소리가 미끄러지듯 들어오고, 안개 같은 특수효과가 무대 위 입자를 바스락거리게 하고, 음악이 하이라이트에 다다르면 항상 그 푸른 조명과 그 아래 음악과 하나가 된 듯한 뮤지션의 표정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정말 아름다운 세계였고, 나는 사랑에 빠졌다. 죽기 전에 저 푸른 조명 아래에서 노래할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고 생각했다. 긴 시간 동안.

그리고 뮤지션이 되었다. 첫 앨범을 2007년에 냈는데, 아쉽게도 <수요예술무대>는 2005년에 없어졌다. 물론 계속 있었어도 나를 섭외해줬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래도 아예 사라지는 것은 섭섭한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고등학생 때처럼 그 프로그램을 챙겨보지도 않았다(대중이 외치는 사랑이란 얼마나 덧없는가). 여하튼 당시의 나에겐 새로운 동경의 무대가 있었는데 바로 EBS <스페이스 공감>이었다. 그곳 또한 푸른 조명이 일품이었고 보라색 조명도 아주 잘 썼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 무대 위에 서보고 싶어 헬로루키라는 시스템에 지원했다. 기쁘게도 헬로루키로 뽑히고 대망의 첫 무대에 섰다. 나는 감격에 겨워했을까. 기쁨으로 가득 찼을까.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냈을까. 현실은 어떠했냐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훅 하고 지나가버렸다.

얼떨떨한 채로 시간은 흘러갔고 무대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일단 푸른 조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푸른 조명과 무대는 내게 새롭게 나타난 커다란 문제에 가까웠으며, 마지막으로 무대에 서는 일은 상상해오던 것과 아주 다르다는 것이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처음 나갔을 때, 내 앞에 놓인 커다랗고 무섭게 생긴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올 때 깨달았다. 앞으로 내가 보게 될 모습은 저 빨간 불, 또는 컴컴한 객석이겠구나. 내가 갖게 된 직업은 말하자면 영롱한 비눗방울 그 자체가 아닌, 비눗방울을 시뻘건 얼굴로 계속 부는 일이었다. 비눗방울이 터지면, 다음 비눗방울을, 또 다음 비눗방울을 계속 불어야 하는 것이었다. 상황이 허락될 때까지, 계속.

영화 <소울>의 주인공은 재즈 피아니스트다. 그는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마음속으론 전업 뮤지션의 꿈을 꾸고 있다. 그리고 기가 막힌 무대가 언젠가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그에게 끝내주는 기회가 찾아오는데, 바로 유명한 재즈 뮤지션 도로테아가 새로운 피아노 연주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헐레벌떡 달려간 그는 오디션에서 멋진 연주를 보여주고 팀의 멤버가 된다. 전통의 재즈 클럽에서 데뷔하는 것은 바로 오늘 밤. 몇 시간 뒤에 인생이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으니 픽사는 주인공에게 엄청난 모험을 시키고(이 부분이 재미있으니 안 보신 분들은 꼭 보세요!) 결국 그는 무대에 설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첫 무대에서 훌륭한 연주를 보여준다. 잔뜩 들뜬 그는 공연이 끝난 후 도로테아에게 묻는다. 다음은 뭔가요! 도로테아는 대답한다. 그냥 다음 날도 하는 거야. 또 다음 날도. 계속.

주인공의 인생은 그 후 어떻게 흘러갈까. 언제까지 도로테아와 함께 연주할 수 있을까. 뉴욕대와 버클리에서 새로운 재즈 뮤지션은 매년 쏟아져나오는데 팔팔한 신인들 사이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더 성장해서 솔로 앨범을 낼 기회가 생길까. 그다음 2집을 낼 기회는 올까. 만약 온다면 기회를 잘 살릴 수 있는 내공이 있을까. 혹시 중학교에서 정규직을 제안 받았던 때를 그리워하게 될까. 알 수 없다. 감히 짐작해보자면 매일 무대에서 좋은 연주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을 테고, 계속 무대가 주어질지 걱정하는 불안감도 있을 테다. 결승점은 없고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도로테아는 정말 대단하다. 살아남았고 매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정글 같은 세상을 찔끔 보여주다니, 픽사도 참.

어른들은 아이들을 속인다. 꿈을 가지고 노력하면 멋진 결승점에 다다르게 될 거야. 일단 대학을 가면 세상이 바뀔 거야. 아니었나? 아 미안, 좋은 곳에 취직하면 세상이 바뀔 거야. 아니었나? 아 미안, 열심히 일하고 재테크도 잘해서 좋은 아파트를 사면 그때 진짜 바뀔 거야. 나를 믿어. 아 아니었어? 네가 너무 마음의 소리에 귀를 안 기울인 거 아냐? 진정한 꿈을 찾고 이루면 그땐 진짜 바뀔 거야! 여기 이 인스타그램을 봐. 완벽한 인생이 여기 있는데 왜 안 믿어. 이 사람은 이루었잖아.

다행히 요즘 젊은이들은 본질이 그게 아님을 눈치챈 것 같지만 그렇다고 떨어지는 낙엽에 매번 충만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같이 영화를 본 친구는 열심히 사는 거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사람인데 극장에서 걸어나오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 슬프잖아. 이런 결론이면 아무리 노력해도 이렇게 흘러가는 게 인생의 전부라면 너무 슬프잖아.

<스페이스 공감>은 그 후에도 나를 몇번 더 불러주었고 어떤 때엔 불러주지 않았다. 음악 프로그램에 나갈 수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했던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물론 불러주면 기쁘겠지만 다른 응급한 일들이 있다. 일단 중요한 것은 강아지 흑당이의 산책이고, 고양이 꼬마의 화장실 청소고, 오늘 저녁 메뉴 정하기와 새로운 농담 패턴의 개발과 부엌에서 추는 웃긴 춤 같은 것이다. 이걸 가능한 한 오래 지속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소원이다.

그리고 비눗방울을 계속 불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도 여전히 있는데 이건 그냥 계속 얼굴이 시뻘게지게 불어 보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별로 할 말이 없다. 아, 그리고 푸른 조명에 대한 집착은 간단히 없어졌다. 단독 공연에서 온갖 푸른 조명을 원 없이 써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체 이탈이라도 하지 않는 한 조명 아래 노래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소원이 이루어진 기분은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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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EEW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