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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콘택트] '킹덤: 아신전'의 김은희 작가를 만나다
김혜리 2021-08-05

한(恨)을 표현해야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이번호부터 연재를 시작하는 ‘김혜리의 콘택트’에서는 <씨네21> 김혜리 편집위원이 만난 대중문화예술 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영상을 기반으로 한 이 인터뷰는 앞으로 한달에 한번 <씨네21> 공식 유튜브 채널과 지면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그 첫 타자인 김은희 작가와의 인터뷰는 7월 30일 <씨네21> 유튜브 채널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진제공 넷플릭스코리아

좀비는 가장 정치적인 몬스터다. 장르의 대부 조지 로메로 감독에게 살아 있는 시체의 무리는 윤리적 주체성을 포기하고 물욕으로만 움직이는 소비사회 대중의 은유였다. 2019년 김은희 작가가 창조한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의 생사역은,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지배층의 과도한 탐욕이 낳고 신분제 사회의 극단적 착취로 굶주린 백성들의 불가피한 식욕이 퍼뜨린 재앙이다.

김은희는 대충 질문하는 작가가 아니다. 이 재앙이 만약 심판이라면 어떤 죄와 모순을 향한 것인가? 시리즈의 프리퀄이자 스페셜 에피소드인 <킹덤: 아신전>에 이르러 김은희 작가는 삭풍 부는 북방의 끝으로 달려가 조선의 최하층 맨 가장자리에 매달려 살아갔던 이방인의 슬픔과 절대고독에서 생사역의 연원을 찾는다. 그리고 스스로를 “복수할 힘이 없는 계집아이”라고 여겼던 여진족 소녀 아신이 무정부주의적 네메시스로 변신하는 슬픈 여정을 들려준다.

드라마 <위기일발 풍년빌라> <싸인> <유령>을 통해 범죄 미스터리의 다양한 하위 장르를 성공적으로 섭렵한 김은희 작가는 2016년 피해자 관점으로 미제(未濟) 사건을 풀어가는 타임루프 수사극 <시그널>에서 치밀한 퍼즐 뒤에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까지 묻는 작가로 도약했다. <킹덤: 아신전>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시그널>이 그랬듯 <킹덤> 세계관의 지평을 확장하고 캐릭터 연구를 심화한다. 본인이 지어낸 스토리가 감독에 의해 구현돼 돌아온 모습에 감격하는 한편, 아직 쓰지 않은 이야기들을 향한 애정으로 떨리는 김은희 작가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킹덤> 시즌1, 2의 스포일러와 <킹덤: 아신전>의 내용 일부가 포함돼 있습니다.

-<킹덤: 아신전> 집필을 끝낸 것은 오래전인데 영상으로 완성된 버전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만족스러웠던 점과 예상 못한 점은 무엇이었나.

=제일 기대했던 부분은 (에필로그 전) 마지막 장면이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쓰면서도 과연 영상화가 가능할지 고민했다. 당시 조선 북방에 관한 자료가 없어 여진족의 복식부터 생활양식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침엽수림이라 해도 개마고원의 전나무와 백두산의 전나무는 다를 텐데, 북한과 중국에 가서 찍지 못하는 상황에서 구현이 가능할까? 그런데 결과를 보고 진짜 놀랐다. 이게 제주도라고? 제주도에 이런 숲이 있다고? 앞 시즌도 그랬지만 김성훈 감독의 연출과 스탭들의 노고에 너무 감사했다.

-촬영 당시 현장에 가거나 중간 편집본을 보기도 했나.

=<킹덤> 시리즈는 대본을 탈고한 다음 촬영하므로 미완성 편집본을 보여주신다. <지리산>의 대본을 한창 쓰는 중이라 현장에 내려가긴 힘들었다. 딱 한번 제주도 번호부락 세트를 보러 내려갔다. 오픈 세트의 삼나무 숲을 보며 어떻게 이런 곳을 찾아냈을까 혼자 좋아했고 미술에도 만족했다.

-<킹덤: 아신전>은 <킹덤> 시즌1, 2에서 조선을 한양까지 집어삼킨 생사역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 거슬러 올라가는, 요즘 슈퍼히어로영화에 빗대면 일종의 오리진 스토리다.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니 시즌1을 집필하기 이전부터 작가의 머릿속에 있었나. 구성상으로 시즌3의 첫머리가 아니라 스페셜 에피소드로 빼낸 이유는 무엇인가.

=<킹덤> 시즌1을 시작하며 북방까지 이 세계관이 뻗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사초라는 풀이 워낙 찬 성질이다보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북방까지 갔으면 좋겠고 북쪽의 주요 캐릭터가 등장했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만 생각했다가 시즌2를 쓰면서 아이디어가 점점 구체화됐다. 그러다 폐사군에 관한 기록을 처음 봤는데, 군비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였다 말이 많지만 어쨌든 백년 넘도록 사람들의 출입을 엄금했던 곳이다. 그렇다면 생사초가 거기서 자라고 사람뿐 아니라 괴물 같은 크리처가 있으면 어떨까 상상했다.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서 가장 힘든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살펴보았고 조선 땅에 들어와서 살던 여진족인 성저야인(城底野人)에 대한 기록들을 읽게 됐다. <킹덤: 아신전>은 시즌1, 2에서 (제작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시즌3로 가는 디딤돌인 동시에 배경 시대는 가장 앞이다. 그런데 이 과거 이야기를 시즌3에 넣기는 너무 긴 회상이었다. 그러다보니 차라리 하나의 스페셜 에피소드로 빼내 좋은 퀄리티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신(전지현) 캐릭터에 대한 제작진의 애정이 이유의 일부가 아닐까 짐작했다. 스페셜 에피소드로 빼냄으로써 아신에 집중할 시간을 확보한 것 같다.

=이번에 소개된 아신과 파저위 수장 아이다간(구교환)은 시즌3가 만들어진다면 <킹덤> 시즌1, 2를 이끌어온 주요 인물들과 만날 것이다. <킹덤: 아신전>을 통해 그들의 조우를 좀더 흥미롭게 만들고 싶었다. 상반된 입장의 두 집단 아닌가. 창(주지훈) 일행이 역병을 막고 사람들을 살리는 것에 집중한다면 아신은 죽음과 파멸만이 목적이다. 그런 둘이 만나면 도대체 어떤 이야기가 나오게 될까 하고 상상했다.

-시즌2 결말부 전지현 배우의 등장은 아무래도 새로운 액션 히어로의 활약을 기대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킹덤: 아신전>에서 제일 예상 밖이었던 부분은 주된 정서가 슬픔이었다는 점이다. 깊다 못해 분노를 거쳐 광기로 넘어가는 비탄이다. “난 이제 외롭지 않다”는 아신의 대사에서 보듯 차별과 혐오가 낳은 고독이 시즌1부터 펼쳐진 지옥도의 기저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화려한 액션을 기대한 일부 시청자들은 실망할 수도 있는 선택이라 작가로서 이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라는 모종의 결단을 드러낸 것으로 보였다.

=호불호가 많이 갈리겠다는 생각은 했다. 보통 좀비물에 비해 감정선이 세서 뭐야 좀비물이 왜 이래,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킹덤: 아신전>에서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한(恨)이다. 아신과 아신의 조상과 그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것을 표현해야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만약 시즌3로 이어진다면 좀더 피지배계급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혈통을 떠나 조선의 피지배계급도 똑같은 슬픔이 있었을 것이다.

배고픔, 피 그리고 한

-<킹덤> 시즌1, 2를 본 해외 시청자의 평 중에 “왕족이나 양반은 변화의 여정을 가질 기회가 많지만 낮은 계급의 인물들은 좀비에게 한번 물리면 기회가 없다”는 말이 있었다. 피지배계급에 주목한 이야기에 관한 포부를 들으니 더욱 기대된다.

=100명에게 보여줘서 100명 모두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자 창도 시즌2에서 지위를 내려놓았으니 평민이 된 것이고 영신(김성규)이나 서비(배두나)처럼 평민이나 천민으로 평생 살아온 사람들이 (아신과 마주쳤을 때)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가 다음 이야기의 관전 포인트가 아닐까. 만약 쓸 기회가 주어진다면 말이다.

-<킹덤> 시즌1을 보고 첫 번째 솔깃했던 부분이, 왕이 역병에 대응하는 체제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좀비 1호’라는 점이었다. <킹덤: 아신전>에서는 복합적 면모를 가진 주인공 자리에 옛날이야기 등에서 ‘오랑캐’로 타자화해온 여진족 인물을 넣었다. 그럼으로써 방금 말한 대로 훨씬 큰 이야기가 되었다. 모험이었나?

=모험이라기보다 자연스럽게 글을 쓰다 보니 흘러간 방향이었다. 나는 어떤 인물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계속 기획 의도를 상기하며 쓰는 편이다. (시즌1의) 배고픔 이후에 (시즌2의) 피가 주제로 생각난 것처럼 괴물로 변한 백성들로부터 한이라는 테마가 떠올랐다. 오랑캐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은 것이 번호부락 사람들은 조선에 동화되고 싶어 하고 평범한 삶을 꿈꿨던 이들이다.

-오늘날의 귀화를 원하는 난민들과 비슷한 자리에 있는 것도 같다.

=똑같은 사람인데 출신과 복색으로 인해 차별을 받는 데에서 오는 한이 얼마나 깊었을까. 마치 앞 시즌에서 양반은 살려야 하고 평민은 죽여도 된다는 태도가 있었듯, 조선인은 살려야 하고 ‘오랑캐’는 죽어도 될까? 괴물들이 몰려올 때 양반과 평민을 나눴듯 조선인과 여진인, 다른 만주족을 나눌 수 있는 걸까? 하지만 통치계급이라면 자국 백성을 보호해야 하니 국적을 따져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민치록(박병은)은 아신의 부족을 ‘희생’시켰다고 표현한다. 그는 조선인들을 훨씬 살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본 것이다. <킹덤: 아신전>에서는 조선이라는 테두리를 넘어 그냥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넓게 하고 싶었다.

-조선이라는 한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본분을 다한 사대부지만, 우리는 양심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매우 현대적인 질문을 중세 배경 드라마에 집어넣은 셈이다. <킹덤: 아신전>을 보다 생각난 고전의 인물은 안티고네였다. 투쟁하는 애도자라는 면에서 아신의 선조 같다. 덧붙여 전지현 배우의 캐스팅으로 아신 캐릭터에 더해진 부분이 있는지 묻고 싶다.

=내 대본을 고전에 비교하기는 죄송스럽다. <킹덤: 아신전>의 플롯은 사실 고전적 복수극이라 구체적 모델을 두고 쓰진 않았다. 그러나 전지현씨는 정말 염두에 두고 썼다. 전지현씨 같은 배우가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썼다. 고맙기도 하다. 자세히 보면 아신의 대사가 거의 없다. 눈빛과 행동뿐이다. 대사도 없이 무언극처럼 폭발력을 이끌어준 것이 배우에게 정말 고맙다. 아신의 대사 중 “아빠, 돌아가요” 라는 말이 가장 가슴 아팠다. 돌아갈 고향이 이미 사라졌는데 그렇게 말하는 아신이 슬펐다.

-대사가 많았어도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신은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안 들어주는 인물이니까. 주인공 아신이 도덕적으로 결함 없고 순결한 존재로 묘사되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다. 아신은 가장 밑바닥으로 내몰린 사람으로서 불가피하게 유린당하기도 하고 결국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시즌1, 2에서도 선한 인물의 미숙한 과거나 과오가 있었지만 아신처럼 결함과 미덕을 동시에 가진 복합적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신은 짠하면서도 매우 위험할 수도 있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도덕적으로 너무 존귀하고 완벽하면 그 사람 자체가 깨질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 강하고도 위험하다는 인상을 줄 수 없다. 시즌2 엔딩에서 우리가 본 아신은 <킹덤: 아신전>이 끝난 후 역병과 많은 일을 겪은 후의 아신이다. 그러니까 7년 후, 아니 10년 후인가? 내가 정말 숫자 개념이 없다. 대학 입시에서 수학 과목 3점 맞았다. (웃음)

-<시그널> 같은 타임루프물까지 쓰고서 그렇게 얘기하면 곤란하다. (웃음)

=그래서 <시그널> 쓸 때 죽을 뻔했다. (웃음) 박해영(이제훈)이 화이트보드에 적은 교신 전후 달라진 미래도 그렇고 큰 실수도 하나 있었다. 숫자 때문에 아찔했던 때가 많다.

-작업실에 검산 담당 작가 한분이 있어야겠다. (웃음) 김은희 작가는 <서울역> <부산행> <반도>의 연상호 감독과 나란히 K좀비물의 양대 산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러는 한국이 잘하는 장르가 아니었는데 좀비를 다룬 드라마와 영화만큼은 독특한 힘이 있어 신기하다. 할리우드의 그것과 다른 처절함이랄까. 경쟁에서 뒤처지면 안전망 따위 없다는 한국인에게 내면화된 초조함이 좀비라는 괴물과 잘 어울려서일까.

=양대 산맥이라니 연상호 감독님과 비교돼 영광이고, 나는 <킹덤> 시리즈를 연출한 김성훈 감독과 묶어서 이야기되는 게 맞다. <부산행>은 설정도 좋고 너무 재밌게 봤다. 한편 <킹덤>은 시리즈물이니 긴 호흡으로 가보자고 생각했다. 좀비와 시대극의 결합이 별로 없었지 않나.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정도? 그래서 해외 팬들은 인상 깊게 본 것 같다. 얼마 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했는데 시즌1의 1회 마지막에 목이 물린 의녀에게 좀비들이 몰려 인간 탑과 같은 모습을 만든 장면이 너무 좋았는데 대본에는 어떻게 썼냐는 질문이 나왔다. 나는 그냥 “괴물들이 의녀를 물고 있다”라고만 썼는데 김성훈 감독이 다 만들어준 거다. 그래서 좋은 감독 만나는 일이 작가에게 중요하다. 그냥 <킹덤>의 멋진 시그니처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으면 그런 장면이 나올 수 없었을 거다. 우리가 계속 그것만은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배고픔, 허기로 인해 괴물이 된 슬픔을 감독님이 잘 그려줬다.

현실밀착형 SF과 빙의물 써보고 싶다

사진제공 넷플릭스코리아

-<킹덤> 시리즈가 높이 평가받은 이유는 드물게도 복잡한 플롯과 결합한 좀비물이었고 둘째는 프로덕션 밸류가 높아서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독특한 처연함의 정서도 요인이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범죄물의 주요 하위 장르를 도장 깨기하듯 섭렵해왔다. 기법 면에서도 잘못 다루면 본전도 못 찾는 과학수사, 타임루프, 좀비물을 시도했다. 이야기의 설계자로서 그중 쓰기에 가장 까다로웠던 장치는 무엇인가.

=<시그널>의 타임루프도 힘들었지만 <킹덤>도 사료가 적어 힘들었다. 궁궐 관련 기록은 넘치는데 백성에 대한 자료는 적었다. 낙동강과 문경새재는 남아 있는데 거기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예컨대 상주읍성과 금정산성 사이를 인물들이 움직일 때 무엇으로 메워야 할지 고민이 컸다. 아무리 조사하고 투자를 받는다 해도 내 머릿속에 그림이 서야 쓸 수 있잖나. <시그널>은 대본이 끝나고 촬영에 들어간 게 아니라 7회를 썼을 때쯤 찍기 시작했고 촬영기간도 정해져 있다보니 뒷부분 대본이 이미 찍은 이야기를 망가뜨릴까 염려가 컸다. 그런데 앞 회차 촬영분을 보면서 김원석 감독님의 연출과 배우의 연기가 거꾸로 내게 영감을 줬다. 작가를 흥분시키는 편집본이었다.

-김혜수 배우와 인터뷰했을 때 <시그널>을 배우 인생의 선물처럼 여긴다고 이야기한 게 기억난다. 당시 일정상 두달 반 안에 차수현 형사(김혜수) 분량을 16회까지 먼저 찍어야 했는데, 김은희 작가가 꼭 함께하고 싶다고 약속한 기간 내에 정말 대본을 완성해줬다고 했다.

=그만큼 절박하게 김혜수 선배와 함께하고 싶었다. 사실 두달 반에다 며칠 더 말미를 주셨다.

-<시그널>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무전기의 존재와 교신 상대에 관해 박해영과 차수현이 털어놓고 말하지 않으면서 시리즈 거의 끝까지 이야기를 끌고간다. 핵심은 무전기의 마법이 아니며 그건 정말 장치에 불과하다는 듯이. 타임루프 짜맞추기 이상의 난이도가 있는 대본이었던 것 같다.

=과거와 현재의 연도를 맞추고 시대상을 그리는 것도 중요했지만 캐릭터들의 감정선을 맞추는 것이 어려웠다. 박해영과 이재한(조진웅)이 무전을 통해 대화하는데 이재한의 시간은 먼저 흐르지 않나. 삼각관계는 아니지만 과거 시점의 이재한과 차수현의 관계, 현재 차수현과 박해영의 관계를 고려하며 감정선을 이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삼각관계 아닌 삼자관계인데 마치 문과생은 배울 필요가 없는, 3차원에서 움직이는 삼각형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죽자고 썼다. (웃음)

-<시그널> 이후 무거운 이야기에도 삶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런 유머를 녹이는 모습이 보인다. 집필에서 유머는 어떤 요소인가.

=작가에게 여유와 역량이 있어야 가능하다. 대본과 연기자와 현장의 연출 삼박자가 성립되는 코미디야말로 최상위 장르라고 생각한다. <킹덤> 시리즈에서도 범팔(전석호)을 통해 시도했는데 쥐었다 놓았다 하는 경지는 아직 오지 않은 듯하다.

-지금까지 작품을 보면 장르의 공식을 따르면서도 매우 태연하게 굵직한 관습을 틀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왕이 좀비라거나, 주인공도 죽을 수 있다거나, 주인공도 용의자일 수 있다거나.

=남편 장항준 감독과 이야기하다 생각날 때도 있고 술 마시다 발상이 전환되기도 한다. 엄청 고민하다가 회의에서 풀어놓고 다른 사람의 언어로 내 고민을 다시 들으면 “잠깐, 그건 이렇게 바꾸면 되겠는데?”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어쨌든 남에게 털어놓아야 해결되더라. 남이 꼭 풀어주지 않더라도 대화하다가 머리에 바람이 통할 때가 있다.

-최근 넷플릭스를 포함해 스튜디오들이 보안을 중시하면서, 상의하고 싶은 상대에게 털어놓기도 어려워졌겠다. 그럴수록 항상 곁에 있는 장항준 감독의 역할이 중요해질 것 같은데.

=그의 기여는 밑도 끝도 없는 응원이다. “넌 잘해낼 거야! 언젠가는 생각이 날 거야!” (폭소) 그런데 요즘 점점 영혼이 없어져서 문제다. 내가 입이 싼 스타일이라 입 무거운 사람들하고만 일한다. 그들이 비밀을 지켜주면 되니까.

-1차 감염자들은 전염시키지 않는 <킹덤>의 원리와 비슷하다. (웃음) 드라마 <지리산>에서 다시 동시대 이야기로 돌아온다. 전작 중에 <지리산>과 가장 가까운 혈연의 작품을 꼽는다면.

=어쩔 수 없이 <시그널>인 것 같다. <지리산>에도 약간의 판타지가 들어가 있다.

-영화 <그해 여름>이 멜로드라마였고 드라마 데뷔작 <위기일발 풍년빌라>가 코미디 면모가 강했으니 사실상 김은희 작가가 손대지 않은 장르 중에는 SF가 제일 눈에 들어온다. 야심이 있나.

=꼭 한번 해보고 싶다. 외계인이 쳐들어오고 우주선이 날아오는 SF 말고 현실에 좀더 기반한 SF를 하고 싶다. 데자뷔 현상이나 그냥 갑자기 사람들이 낯설어 보인다거나, 내가 알던 세상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매트릭스> 같은 이야기 말이다. 그리고 오컬트, 그중에도 빙의물을 꼭 한번 해보고 싶다.

-글 쓸 때 모습을 묘사해달라.

=만약 카메라로 찍는다면 정지 화면에 가까울 거다. 언젠가 보니까 내가 하루 종일 딱 78보를 걷고 계속 노트북 앞에 앉아 있더라. 화장실은 다행히 왔다갔다 했다. 그래도 야구는 좋아해서 시즌 중에는 백색소음처럼 항상 중계를 틀어놓는다.

-응원팀이 경기를 망칠 때 쓰고 있는 장면이 더 격렬해지는 거 아닌가.

=원래 그리 잘하지 못하는 팀이라서 그냥 “그래, 이럴 줄 알았어” 한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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