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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검열을 딛고 선 한국의 뉴시네마

<바보들의 행진>

입영 열차를 탄 병태(윤문섭)에게 키스하는 영자(이영옥).

제작 화천공사 / 감독 하길종 / 상영시간 102분 / 제작연도 1975년

1970년대 한국영화의 대표작을 단 한편만 꼽으라면 그 자리에는 <바보들의 행진>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당시 한국 사회의 경직된 분위기, 그로 인한 참담한 제작 환경을 몸소 새기고 있는 이 영화는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대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화분>(1972)과 <수절>(1973)의 흥행 실패로 절치부심했던 하길종은 최인호의 원작을 각색하고 연출한 <바보들의 행진>이 흥행과 비평에서 찬사를 받으며 충무로 감독으로서 확실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1970년대 청년들의 한없이 밝은 기운과 끝없이 우울한 감정을 그리고 불우한 시대의 공기까지 포착해낸 걸작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적 완성도를 충분히 성립시키지 못한 채 관객과 만났다. 영화는 117분으로 완성됐지만 20분 가까이 장면이 잘려나간 99분으로 개봉한다. 파편적으로 에피소드가 진행되다 그마저도 후반부에는 영화의 리듬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 결정적 이유는 감독이 검열의 흔적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 영화사의 문제작이 탄생했다.

집요한 검열에 만신창이가 된 영화

<바보들의 행진>이 겪은 지난한 검열 과정은 유신 정권 시기 한국영화와 검열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선명한 사례다. 형식적인 절차는 시나리오 사전 심의와 완성된 영화의 검열, 두 단계였지만 그사이 영화는 만신창이가 되고 감독의 창작력은 방향을 잃고 소진됐다. 이 영화는 시나리오 심의 단계부터 난항을 겪었다. 1974년 11월 28일 화천공사는 문화공보부(이하 문공부) 소관기구인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에 시나리오를 접수했고, 12월 10일 “지적 사항이 과다하므로 전면 개작” 통보를 받는다. 삭제 혹은 수정을 지시한 대목은 22군데에 달했는데, 영철이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 앞에서 똑같은 포즈를 취하는 장면이 “성웅 모독의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는 식이었다. 그외에도 당시 대학생들이 즐겨 쓸 법한 대사들이 꼼꼼하게 지적됐다. 12월 13일 제작사는 수정한 시나리오를 다시 접수했고, 18일 추가로 9군데의 삭제 및 수정 지시를 받는다.

이제 예륜에서 문공부 영화과로 공이 넘어간다. 12월 27일 제작사는 문공부 영화과에 제작에 착수하겠다는 영화제작신고서를 접수하고, 바로 30일 “대학가의 무기력한 청춘을 그려 소재 자체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의견과 함께 11곳 이상의 삭제와 개작 통보가 나온다. 심의위원을 바꿔가며 대사 한줄, 지문 한줄이라도 불온한 곳이 없는지 샅샅이 뒤지는 형국이었다. 결국 화천공사는 해를 넘긴 1월 17일 개작 요구를 반영한 시나리오를 접수, 23일 “개작된 시나리오 내용대로 제작할 것”이라는 통보와 함께 제작에 착수한다.

1975년 4월 14일 먼저 진행된 예고편 검열에서 2곳의 화면 삭제, 1곳의 대사 삭제를 조건으로 합격받았고, 4월 30일 드디어 본편 검열을 신청했지만 결과가 좀처럼 나오지 않다가, 5월 13일 화면 삭제 5개처, 대사 삭제 3개처, 화면 단축 4개처라는 제한 사항과 함께 미성년자 관람불가 판정이 나왔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존 중인 이 영화의 포스터 중에서 ‘5월 11일 국도극장 개봉’이라고 쓰인 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영화사의 개봉 계획은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당시 검열 서류를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있는데, 13일 날짜로 검열에 합격됐으나 서류 공란에 5월 30일의 기록이 덧붙여져 있다. 화면 삭제 세 군데와 화면 단축 한 군데, 대사 삭제 한 군데라는 지적 사항이 추가된 것에서, 당국이 얼마나 집요하게 이 영화를 대했는지 알 수 있다. 현재로선 행정 당국과 제작자간의 내밀한 사정을 파악하긴 힘들지만 보존된 검열 서류는 그들 사이에 무척 지난한 협상 과정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결국 영화는 5월 31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49일 동안이나 상영을 이어갔고 15만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언론의 관심과 흥행 성공에도 불구하고 하길종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사라진 15분

검열합격증에 기록된 영화의 러닝타임은 117분이다. 물론 화면 삭제 같은 제한 사항을 반영하기 전이므로 실제 개봉된 버전의 분수는 달랐다. 여기서부터 다소 복잡해진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존 중인 원본 필름은 102분 버전이다. 그리고 검열로 커트된 필름을 따로 모아놓은 롤이 있는데 2분29초 분량이다. 102분 버전에는 검열 푸티지 화면이 살아 있으므로 당시 극장에서 관객이 만난 버전은 결론적으로 99분 정도의 분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로서는 117분 버전을 확인할 길이 없으므로 사라진 15분은 검열의 삭제 지시 그리고 심의받은 시나리오의 문구를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신체검사를 받으러 온 팬티 바람의 대학생들이 군인의 구령에 맞춰 행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자세히 보면 인솔하는 일등병은 배우 김희라인데, 전후 맥락도 없고, 사운드도 없어졌다. 시나리오를 보면 일등병과 청년들이 옥신각신하는 장면으로, 첫신부터 삭제된 이유는 “대학생들이 일등병을 회롱”해서였다.

이어서 청년들이 신체검사를 받는 장면이 이어지고 이때 주제가 <고래사냥>이 얹혀 활기찬 에너지를 배가시킨다. 병태(윤문섭)와 영철(하재영)이 장발 단속에 걸리는 장면은 화면 단축의 일례다. 미팅에 가려고 목욕탕을 다녀온 둘이 순경에 걸려 도망치기 시작할 때 <왜 불러>가 흘러나오며 뉴아메리칸 시네마를 연상시키는 뮤직비디오 신이 펼쳐진다. 결국 둘은 경찰서에 잡혀가지만 장발 단속을 한 순경의 머리가 장발인 모순된 상황이다. 개봉 때는 부분적으로 화면이 삭제됐다.

영철과 병태가 당구를 치다 신문팔이 소년(이승현)에게 큰돈을 준 후 소년이 잔돈을 들고 돌아올지 돌아오지 않을지 내기하는 장면에서는 “이 세상에 믿을 게 어디 있니, 이 세상 모든 것은 가짜 아닌 게 없어”라는 병태의 대사가 삭제되었다. 바로 앞 신에서 ‘이상국가’가 ‘사쿠라’로 변하는 칠판의 글씨도 문제적이다. 최종 검열 시나리오에는 학교 대항전 응원 연습으로 휴강을 하게 되어 병철이 칠판을 지우는 장면으로 묘사되어 있다. 원래는(앞 버전의 시나리오에는) 학생 시위로 휴강을 하게 되어 철학과 수업의 칠판에 적인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 낱자를 지우고 고쳐 ‘사쿠라’로 고치는 장면이다. 이를 102분 버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길종이 시나리오 심의랑 상관없이 원하는 장면을 촬영했음을 말해준다.

과 대항 술마시기 대회 장면 사이에 삽입된 대학생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하는 장면은 관제 반공 데모 사진으로 교체해 검열의 흔적을 남겼다. ‘날이 갈수록’ 시퀀스, 무기한 휴강에 들어간다는 벽보가 붙은 대학 캠퍼스에서 “들립니까”라는 처절한 외침이 울려 퍼진다. 이 영화가 당대의 청년들에게 그리고 지금의 청년들에게 가닿기를 바라는 하길종의 간절한 외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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