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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이 말하는 인간 기주봉, 예술가 기주봉
김소미 2021-08-31

본의 아니게 유머러스하고 뭘 해도 약간 슬픈

“내가 아는 기주봉 선생님은 한 사람 같지 않고 여러 사람 같다. 그는 예민하고 둔하며, 친절하고 불쾌하며, 이타적이고 이기적인 우리의 얼굴이다.”(임대형 감독) 데뷔 45년차에 접어든 배우를 수식할 만한 관록과 예우의 말들이 기주봉에겐 유유히 비껴나갔다. 홍상수·박찬욱·임대형·임선애 감독, 배우 예수정·권해효·전여빈이 보내온 기주봉에 관한 생각은 저마다 그를 재료로 쓴 몽상적 시나 일기처럼 자적했다. 권위 없는 방랑자적 면모, 야생과 감상(感傷)의 지대를 오가는 특유의 거칠거칠한 순수를 기억하는 동료들이 기주봉에 대해 남긴 목소리를 전한다. 여전히 그를 잘 모르겠다는 고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말과 태도가 또렷한 장면으로 각인되었다는 애호의 말들이다.

홍상수 감독

<강변호텔>

<강변호텔> <인트로덕션>

매번 그분을 뵙고 느낀 것들이 그 당시 그 신을 만드는 데 설명하기 힘든 경로로 깊은 영향을 주었고 그래서 영화가, 내가 억지로 추린 몇 마디 말보다 더 정확할 것 같다.

배우 예수정

<69세>

오는 이 막지 않고 가는 이 잡지 않는다는 ‘그’ 자체의 사람. 따뜻하고도 호쾌한 기주봉 선생님….

배우 권해효

<강변호텔>

많은 배우들이 자신의 특별함을 보여주기 위해 잘 조율된 모습을 전달하려 하지만 배우 기주봉은 그런 거 없다. 그냥 신에 등장해서 해치워버린다. 안정적인 믿음을 깨버리고, 등장과 동시에 긴장을 만들고, 때로는 폭군처럼 자신만의 호흡과 리듬으로 쏟아내고 간다. 우리는 그런 순간마다 엄청난 힘과 특별함을 느낀다. 구태여 이해받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내 데뷔작 <명자 아끼꼬 쏘냐>(감독 이장호, 1992)에서 처음 만나 주봉이 형을 30년간 지켜본 바로는, 아마도 그런 용기의 바탕에 아이 같은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기주봉 속엔 현실과 이상의 경계 어딘가에서 떠도는 아이가 산다. 그래서 그와의 대화는 언제나 모호하고 이해할 수 없다, 하하. 그렇다. 이해 불가, 대체 불가. 그게 기주봉이다.

임대형 감독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너는 더 비뚤어지면 좋을 것 같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를 찍을 때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다. 한번은 선생님 댁에 간 적이 있었다. 고양이 태원이가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는데, 그날 선생님은 당신이 내 첫 장편영화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주인공이란 만나는 모든 사람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그날 일기에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도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썼다. 기주봉 선생님은 난생처음 만난 택시 기사를 따라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를 했고, 그 동네 편의점 아저씨와 막역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런 분이 해주시는 말씀엔 힘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질려서 피로할 때마다 주문처럼 그 말을 떠올리곤 한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물론 선생님께서 내게 늘 교훈이 되는 말씀들만 했던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술자리에서 내게 “너를 보면 동근(양동근 배우)이가 생각난다”고 하셨던 적도 있다. 칭찬 같았는데, 무슨 뜻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임선애 감독

<69세>

<69세>

눈이 오는 날의 대학로였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카페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창밖에 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가짜 눈처럼 쏟아붓고 있는 창밖 풍경을 보고 있자니 지금의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첫 장편영화를 드디어 찍게 됐고, 곧 주연을 맡아줄 배우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먼저 캐스팅이 된 예수정 배우가 상대역을 궁금해하시기에 그때 나는 좀 뜸을 들였던 것 같다. 캐스팅에 확신을 갖고 있던 상대 배우가 다른 영화의 주연으로 발탁됐다는 기사를 접했던 터라, 아직은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정 배우의 입에서 내가 바라던 배우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그 이름이 바로 ‘기주봉’이었다. 예수정 배우는 이렇게 말했다. 효정 역은 누가 해도 되는데, 동인 역은 기주봉 배우 같은 분이 하셔야 한다고.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오래지 않아 그 이유를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카메라 앞의 그에게서, 카메라 뒤의 그에게서도. 나와 예수정 배우의 확신은 매우 적확했다. 기주봉이라는 시를 우리는 사랑했다.

박찬욱 감독

<심판> <복수는 나의 것>

기이해 보이려고 의도하기는커녕 언제나 마음속 깊은 데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연기만 하지만, 다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는 표현을 한다. 본의 아니게 유머러스하고 뭘 해도 약간은 슬프다. 기주봉은 10초 동안만 등장해도 그 캐릭터가 평생 어떻게 살아온 인간인지 상상을 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대개는 오리무중의 알쏭달쏭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인데도,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기주봉은 관객을 자기 세계로 초대하는 배우인지 모른다.

배우 전여빈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함께 걷다 선배님은 툭 던지신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어.” 또 어떤 날은 “멋진 배우 돼라”. 이런 말들에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는 존재, 예술가. 내가 기억하는 기주봉 선배님은 그런 사람.

가짜로 사람을 안는다는 게 죄스러워서 배우를 포기했다던 이에게 “장난이건 연기건 가짜건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건 다 사랑이야. 작게라도 좋은 거밖에 없어.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 건데!”라고 <인트로덕션>에서 외쳤던 당신의 대사와 무척 닮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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