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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오! 컬트 <트루먼 쇼>
2002-05-22

그래, 나 `할리우드 같은 년`이다

고백건대, 나는 “할리우드 같은 년”이다(<씨네21> 351호 <이창> 참조). 나나 남의 안전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진실이 아닌 이상, 진실을 알기보다 행복을 택하겠다. 도대체 진실이란 뭔가. 유능한 사회인이 되고, 착한 어린이가 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해도, 그리고 겉보기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믿어도 나를 아는 사람 가운데 반 정도는 나를 무능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또 다른 반쯤은 버르장머리 없는 애라고 여길 것이다. ‘이창’에서 말한 대로 멜로의 영역에 국한시켜서 이야기한다면 나에게는 백마 타고 달려온 왕자님처럼 보이는 사람 역시 내 친구들 가운데 반 정도는 별볼일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다만 말하지 않을 뿐이다(지들끼리는 이미 공유된 진실이겠지만).

“너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될래? 문을 열고 나와 진실된 세상을 살래?” 묻는다면, 당근 나는 전자를 택하겠다. <트루먼 쇼>라면 아침에는 언제나 쾌청한 하늘이 열리고, 거리는 눈부시게 단정하며,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상냥하게 나를 반겨줄 거다. 엉성한 운전실력으로 진로를 방해해도 욕지거리를 퍼붓는 운전자도 없고, 밤에 술마시고 택시를 탈 때 돈 십만원 뺏기고 목졸려 죽을 것에 대한 공포 따위도 느낄 필요 없을 터이다. 새벽잠을 깨우는 전화 스토커나 허우대만 멀쩡한 변태성욕자를 만날 일은 더더욱 없다(6살 이상 시청가능한 휴먼드라마가 아닌가!).

물론 이건 예술영화도 아니기 때문에 적당한 위기상황도 필요하겠지.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구조조정의 대상자가 되어 출근 뒤 내 책상이 사라진 사실을 발견해도, 옛 동료는 나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며 “다 잘될거야, 걱정마” 위로할 것이며, 나는 다만 눈동자 안에 반짝거리는 수정 구슬 세개를 박아넣고 주먹을 불끈 쥐며 “그래, 난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운명의 여신은 내 편이야”라고 외치면 일주일 뒤쯤 두배의 연봉을 받는 회사로 옮겨질 것이다. 담당 PD가 좀더 할리우드적 재미를 추구한다면 쫓겨난 회사의 프로젝트를 빼앗아오는 통쾌함도 부가되겠지. 설사 불치병에 걸려 죽게 되더라도(그건 PD도 어쩔 수가 없잖아) 반쯤 썩은 시체로 방이나 하천가에서 발견되지 않을 테고, 꽃과 선물에 파묻혀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죽겠지. 환상적이지 않은가? 아, 천국의 종소리가 들리는구나.

물론 그들은 모두 연기를 하는 것이다. 과연 개런티를 받고 결혼까지 할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남편으로부터 “사실은 나 여자가 있었어. 당신보다 여러모로 훌륭한 여자야”라는 진실을 듣는 것보다는 “당신은 내가 사랑한 유일한 여자였어”라는 거짓말을 듣는 게 낫다. 진실이란 거대한 군중에게는,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는 걸림돌을 치우는 행복의 동력이 될 수 있겠지만 작은 개인이 만나는 진실들은 대체로 고통이나 상처가 되는 일이 많다. 흔히 말하는 ‘배신(감)’이라는 것도 몰랐던 진실을 알았을 때 느끼는 상실의 감정 아닌가.

이 영화에서 가장 우울했던 장면은 바로 트루먼이 세상의 끝에서 문을 열고 나가는 라스트신이었다. 트루먼, 너는 이제 세상의 진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나가자마자 신호를 무시하고 과속하는 차에 깔리거나 아리랑치기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구. 내가 비관주의자라고? 나도 잘 안다. 그렇지만 나를 이 지경의 과도한 피해망상과 비관주의로 몰고 간 건 30년 동안 퀼트된 이 세상 진실의 조각보들이라고 핑계대고 싶다. 김은형/ <한겨레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