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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의 SF를 좋아해] '듄'의 나머지 반쪽
이경희(SF 작가) 2021-11-18

할리우드가 드디어 오랜 숙제 하나를 해치웠다. 드니 빌뇌브라는 천재 연출가를 앞세워 미국을 대표하는 SF시리즈 <>을 영화로 각색해낸 것이다. 그것도 성공적으로.

<>은 말하자면 독이 든 성배였다. 손대면 저주받는 투탕카멘의 가면 같은 사막의 보물. <>을 16시간짜리 영화로 만들자던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의 광기에 휩쓸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파멸에 이르렀던가. 이 방대한 작품을 2시간에 우겨넣길 강요받은 데이비드 린치의 고충은 얼마나 끔찍했는지. 또 그 결과는 얼마나 처참한지. 제작 기간 내내 속을 박박 긁힌 린치는 감독판 제작도 거부하고 아예 자신의 이름을 빼버리기까지 했다.

그나마 2000년에 방영된 TV시리즈가 절반의 성공을 거두긴 했는데, 역시 시대와 매체의 한계가 아쉽다. 수십년간 상상 속에서 자신만의 이미지를 쌓아온 독자들을 만족시키기엔 비주얼 면에서 살짝 부족했다는 의미다. 이후로도 <>을 영상화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있어왔으나 매번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2021년, 드디어 팬들이 만족할 만한 비주얼의 영화가 탄생했다. 주위의 평도 그리 나쁘지 않은 듯하다. 대체 드니 빌뇌브 감독은 어떻게 저주를 피해갈 수 있었던 걸까? 답은 이렇다. 감독은 원작을 절반으로 쪼갠 다음, 후속작 제작이 결정되지도 않았으면서도 뻔뻔하게 ‘Part 1’이라 이름 붙였다. 그런 다음 그걸 다시 반으로 쪼갰다. 그러곤 잘라낸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 척 사람들의 눈을 가려버린 것이다. 합리적인 선택이다. 아마 3시간 안에 원작을 담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으리라. 주인공 폴의 예언과 성장을 제외한 모든 곁가지를 잘라내고서야 영화는 3시간 조금 안되는 시간에 스토리의 전반부를 겨우 담아낼 수 있었다. 아마 원작의 모든 요소들을 다루려 했다면 영화는 6시간으로도 모자랐을 것이다. 16시간을 요구한 호도로프스키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영화는 주인공 폴과 폴의 모험이 펼쳐질 무대인 행성 ‘듄’에 오롯이 집중한다. 아이맥스 화질로 구현된 광경은 마치 이 모래 행성이 우주 어딘가에 실재하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정교하고 생생하다. 영화의 성취가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론 아쉽다. 드니 빌뇌브의 영화 역시 <>의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기 때문이다. <>의 저주는 결국 세계관의 저주다. 듄, 혹은 아라키스라 불리는 사막 행성의 매력과 모래 벌레의 거대한 스케일에 압도당한 영상 제작자들은 하나같이 이 작품을 장대한 신화로 해석한다. 우주 사회를 구원할 메시아와 예언에 관한 거창한 무언가를 그려내야 할 것 같은 매혹에 빠져든다. 그럴 수 있다. <>의 세계는 워낙 매력적이니까. 영웅, 예언, 신화와 같은 눈에 띄게 빛나는 장치들에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을 구성하는 내용물 중 절반에 불과하다. 수차례의 영상화 과정에서 나머지 절반은 매번 버려졌다. 혹은 어쩔 수 없이 채워놓은 숙제처럼 다루어지거나. 잊힌 <>의 그늘에는 추한 욕심과 비밀과 음모와 계략과 음습함이, 그리고 개성 있는 조역들과 여성들이 감추어져 있다. 마치 공식적인 권력을 지닌 귀족들 뒤에서 세계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베네 게세리트처럼.

속임수 안에 속임수가 있고, 그 안에 또 속임수가 있고, 그 안에 또 속임수가 있어. 계획 안에 또 계획이 있고, 그 안에 또 계획이 있고, 그 안에 또 계획이 있어. 원작 소설 내내 여러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반복되는 이 문장은 <>의 세계를 가장 함축적으로 설명해준다. 복잡하게 뒤틀린 욕망들과 치열한 정치 술수, 협잡과 배신, 매 순간 암살의 불안에 떨며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의심의 세계.원작에서 유에 박사가 (스포일러)를 저지른 데에는 복잡하고 음험한 계략이 결부되어 있었다. 비록 유에는 몇 단계로 꾸며진 속임수 안의 속임수에 빠져 어쩔 수 없이 (스포일러)를 하기에 이르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는 자신만의 속임수와 계획이 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절반이나마 멋지게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드니 빌뇌브의 영화에서는? 그냥 어처구니없이 멍청한 짓을 저지른 조역으로 그려질 뿐이다. 그를 믿은 주인공들 역시 바보처럼 보일 뿐이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다양성을 고려해 동양인으로 배역을 수정하기까지 했으면서 이렇게 캐릭터의 역할을 비틀어버리는 건 좀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굳이 펄럭펄럭한 옷을 입히고 기 치료사 행세를 하게 만들었어야 했던 걸까? 남성 캐릭터인 카인즈를 여성으로 변경하는 훌륭한 결정을 내렸으면서도 해당 캐릭터의 비중을 왕창 축소해버리면 안되는 것 아닐까?

비슷한 이유로 하와트, 거니, 파이터와 같은 비중 있는 조연들의 사연 역시 깔끔하게 삭제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팬으로서 아쉽다. 특히 하코넨 남작과 그 책사 파이터의 흥미로운 티키타카를 볼 수 없다는 점이 너무나 슬프다. 작중 가장 중요한 캐릭터인 제시카와 그녀가 속한 집단 베네 게세리트를 대하는 태도 역시 아쉽다. 빌뇌브의 영화에서 제시카가 스승 가이우스 대모와 나누는 대화는 극단적으로 축소되었고, 베네 게세리트 집단의 계획과 목적도 아주 얇고 모호하게 다루어지는 수준에 그치고 만다. 원작에서 제시카는 자신만의 계획과 야심을 지니고 있다. 그녀가 지시를 어기고 아들 폴을 낳은 이유는 단지 남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자신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성취를 이룰지도 모른다는 욕심이 복잡하게 얽힌 결과물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주인공을 부각시키는 각색 과정에서 제시카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엄마’로서의 역할만 강조된다.

개인적으로 원작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인 만찬 장면 역시 삭제되었다. 남편 레토 공작이 부재한 상황에서 행성 권력자들과의 만찬을 주재하게 된 제시카는 오직 자신의 통찰력과 수완으로 정치적 위기를 헤쳐나간다. 상대의 어조와 세밀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거짓을 간파하는 제시카의 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의 세계에서 비록 공식적인 부와 권력은 남성에게 속해 있으나, 우주의 진실을 파악하고 세상을 조율하는 것은 언제나 여성 인물들인 것이다.

듄, 아라키스라 불리는 행성은 물론 유니크하고 정교한 세계다. 하지만 세계만으로 소설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 훌륭한 작품인 이유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복잡한 세계 위에서 치열하게 얽히며 함께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언과 신화만 남아버린 세계는 마치 손아귀에서 흘러내리는 모래의 허상과 같다. 부디 영화의 성공을 바탕으로 100부작 드라마가 제작되기를. 장대한 모래 벌레와 뻔한 구세주 신화 대신, <>의 나머지 절반의 매력에 집중하는 버전이 언젠가 만들어지기를 오랜 팬심을 담아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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