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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의 수동성을 위한 가설

클로이 자오의 <이터널스>가 마블 히어로 세계에서 구현한 몇 가지 마법

[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이터널스>는 픽션을 가장한 논픽션 영화다. 영화의 목적은 새로운 히어로를 소개하는 데 있지 않고, 이들과 더불어 히어로와 인간의 관계를 다시 바라보는 데 있다. 모든 관객이나 시리즈의 팬을 만족시킬 순 없겠지만, 영화 속 히어로의 생몰이 어딘가 믿을 수 없고 허무하다고 느꼈던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추모와 기억의 시간이 될 것이다.

개봉 전 공개된 <이터널스> 포스터 이미지에서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포스터에서 보이는 히어로 이미지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가 구축해온 히어로 이미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우리에게 익숙한 히어로 이미지는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과 포즈를 통해 전투의 강도와 그보다 강인한 힘을 예고한다. <이터널스>의 포스터 이미지에서 아무래도 전쟁은 보이지 않는다. 강인한 힘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어딘가를 바라보며 이동하는 듯한 히어로 무리다. 그들은 정면을 바라보거나 일치된 방향성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은 차라리 목적지 없이 방황하며 어딘가로 이동하는 한량 같다. 더 솔직히 말하면 히어로 코스튬을 장착한 채 촬영장으로 향하던 중 미처 조화로운 포즈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찍힌 히어로 배우들의 출근길 B컷 스냅숏처럼 보인다. 감독의 전작 <노매드랜드>(2020)가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의 로드무비였던 것처럼 영웅들이 어딘가로 이동하는 모습을 주야장천 보여주는 히어로 로드무비가, 그것도 마블에서 나온다면 꽤 신선한 경험이 될 것 같았다. 허우샤오시엔이 <자객 섭은낭>(2015)에서 무협을 사유하는, 그렇기에 무협영화를 기대하는 팬들에게는 ‘반(反)무협’이라 여겨질 만한 영화를 만들었던 것처럼, 히어로를 사유하는 히어로물로서 ‘안티히어로영화’가 나올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이러한 짐작은 단지 감독 클로이 자오의 예술성에 거는 기대만은 아니었다. <블랙 위도우>(2021)에서 이미 비슷한 조짐이 있었는데, 나타샤(스칼렛 요한슨)의 시그니처 포즈에 대한 옐레나(플로렌스 퓨)의 질문은 단순하지만 히어로영화 안에서 히어로를 말하는 딱 적당한 정도의 코멘트였다. 스스로 역겨워하면서도 그와 같은 포즈를 취하는 것이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허용치일 것이다. <이터널스>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영화 전체가 히어로(혹은 히어로영화)에 대한 코멘트로 보인다. 물론 히어로가 어딘가로 이동하는 모습만 한참 보여주는 ‘히어로 로드무비’는 지나친 상상이었다. 영화는 놀랄 정도로 기존의 마블 영화가 보여준 속도감을 그대로 답습한다. 그런데도 관객은 영화에서 종종 느슨함과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이러한 감상이 ‘재미없다’라거나 ‘마블답지 않다’라는 혹평으로 치닫기도 한다. 나에겐 관객이 영화에서 감지한 느슨함이 클로이 자오가 <이터널스>의 열한 번째 히어로로서 영화에 부린 일종의 ‘마법’처럼 느껴진다.

사라지는 전투

<이터널스>에 대한 평에서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식에 관한 비판이 자주 눈에 띈다. 요약하자면 캐릭터가 지나치게 많아 각각의 매력이 드러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10인의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함에도 개별 캐릭터에 다층적인 개성을 심어둔 노력을 고려할 때 이러한 비판은 가혹한 데가 있다. 무엇보다 영화는 캐릭터를 단순히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미 그 안에서 캐릭터는 죽거나 죽이며 변이를 거친다. 캐릭터의 매력 부재에 관해 말하려면 비판의 대상을 좀더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결여된 것은 캐릭터의 매력이라기보다 히어로 전사로서의 매력이다. 이것은 캐릭터 디자인 혹은 전투 장면의 기술 구현 문제가 아니다. 영화는 애초에 이들에게 전사의 매력을 극대화할 전투를 허락하지 않기에 의도적인 결함이다. 캐릭터에 대해 비판하기 전에 물어야 할 것은 왜 영화는 히어로 전사들에게 각각의 매력을 뽐내는 무대로서의 전투를 허락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히어로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마땅히 그가 해결해야 할 사건이 있어야 하며, 그 사건은 빌런을 통해 가시화되어야 한다. 반면 <이터널스>에는 빌런이 없다. 물론 이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분명하다. 그런데 기존 MCU의 빌런이 대부분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던 것과는 달리 데비안츠는 멸종한 동물을 연상시킨다. 그마저도 실재성에 기반을 둔 정밀한 CGI로 구현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환영임을 강조하듯 앙상한 골조를 드러낸다. 보통 그래픽 이미지는 크리처의 외형을 깔끔하게 이은 뒤 라인 안쪽을 최대한 실재에 가까운 질감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실제라면 외형 안에 있어야 할 뼈와 근육, 내장 따위를 굳이 이미지화거나 상상할 필요가 없다. 반면 데비안츠의 외형은 말끔하게 봉합된 피부가 아닌, 흡사 엑스레이 필터로 들여다본 것처럼 채워진 곳과 빈곳이 교차한다. 데비안츠는 뼈가 다 드러난 채로 살아 있는 불가능한 생명체처럼 느껴진다. 그의 몸은 마치 그가 나타나는 동시에 사라지는 과정 속에 존재하는 신기루임을 예고하는 것만 같다.

<이터널스>가 다른 어떤 영화보다 실제 인류의 역사를 히어로의 세계에 이식하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 멸종된 동물의 형상을 한 데비안츠는 오늘날 멸종 위기에 놓인 동물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이들은 인간의 ‘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엄밀히 말해 축적된 환경 파괴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이다. 이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에서 인간을 공격하는 돌연변이 해양 괴물이 실은 포름알데히드 무단 방류로 인한 피해 생물이라는 설정과 유사하게 볼 여지가 있다. 다만 <괴물>이 피해와 가해의 모순을 괴물의 통제 불가능한 공격력과 인간 주인공의 피해로 인한 충격으로 전환할 때, <이터널스>는 데비안츠를 분명한 적으로 설정하기를 망설인다. 그와 동시에 이터널스를 프로그래밍하고 통제하는 아리솀이나 내부에서 서로를 공격하는 상황을 통해 적의 실체는 분화한다.

나아가 이터널스와 데비안츠의 전투는 누가 누구를 무찌르는 대결이 아니라 때로는 서로 정확히 합을 맞춘 액션처럼 느껴진다. 마치 서로 반목하는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액션의 합을 짜듯, 그래픽과 배우의 동작 역시 조화로운 지점을 찾는다. 특히 테나(안젤리나 졸리)의 전투 장면은 종종 발레 동작으로 보일 정도다. 이것은 단지 볼거리나 잉여를 넘어 전투의 성격을 바꾸고, 히어로의 능력을 순화하는 기능을 한다. 원하는 순간에만 투명하게 드러나는 테나의 칼은 투명한 데비안츠의 몸과 비슷한 물질성을 지니며 서로의 짝패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터널스는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공격하는 법이 없다. 이들은 오직 공격에 방어할 수 있다. 방어를 할 때도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딱 제어에 필요한 만큼만 에너지를 사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터널스는 가장 수동적인 히어로다. 세르시(제마 챈)는 런던에서 멸종된 줄 알았던 데비안츠를 마주하는 장면에서 데비안츠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땅을 모래로 만들어 데비안츠의 움직임을 둔화시킨 후 다시 땅을 굳혀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방식으로 공격을 일시적으로 차단한다. 이것은 전쟁에서 방어의 의미가 상대의 공격 가능성 자체를 말살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온 것과 대조된다.

전투의 성격이 약해진 자리는 히어로의 인간-되기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새로운 히어로를 소개할 때 서사의 흐름은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이 그렇듯 평범한 인간이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에게 초능력이 있음을 자각하며 슈퍼히어로로 거듭나는 여정을 그린다. 어디까지나 방향은 인간에서 히어로로 향하며, 이는 바뀌지 않는다. <이터널스>는 정반대다. 이들은 머나먼 고대에서부터 이미 슈퍼히어로였으며 원래 인간이었던 것도 아니다. 이들 중 테나는 오랜 격무에 지친 나머지 정신적인 고통으로 인한 이상 증세를 겪는다. 이를 계기로 팀의 리더 에이젝(살마 아예크)은 잠시 해산을 선언한다. 이때 동료들에게 한 말은 ‘자신을 찾으라’였다. 이들이 다시 뭉쳤을 때 그들은 각자가 원하는 방식의 일상을 향유하는 중이다. 훗날 실제로 인간이 되는 것을 택하는 스프라이트(리아 맥휴)는 히어로에서 인간으로 향하는 영화의 방향성을 시사한다.

돌봄의 히어로

박물관 학자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세르시, 발리우드 배우가 된 킨고(쿠마일 난지아니),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돌보는 데 헌신하는 파스토스(브라이언 타이리 헨리), 아마존의 한 마을에 정착해 영도자로 사는 드루이그(배리 키오건) 등 각각이 택한 삶의 면면은 호주에 정착해 함께 살아가는 테나와 길가메시(마동석)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테나는 그림을 통한 자기 치유 중이며 길가메시는 테나를 지켜보며 갖가지 음식을 만드는 데 취미를 붙인다. 지나치게 인간에 가까워진 이들의 삶이 히어로의 능력 낭비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히어로영화에서 관객이 기대할 만한 것이 이런 게 아니라는 점도 인정한다. 그러나 예상되는 저항을 무릅쓰면서도 영화가 ‘휴지기’를 고수한 건 히어로의 임무와 액션이 일종의 노동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기 위한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육체노동만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노동이기도 하다.

이터널스가 인간에게 행한 가장 중요한 노동은 돌봄이다. 돌봄은 길가메시가 테나에게 했듯, 인간이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그 옆에 나란히 존재하고 지켜보는 것이다. 인간들의 전쟁에 개입이 금지되어 서로를 파괴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이터널스는 인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건너편에서 분노하거나 눈물을 흘린다. 전투로 발산되지 못한 감정은 기억으로 쌓여 자신을 망가뜨리고 정신을 피폐하게 한다. 이들은 히어로 역사상 가장 무능한 캐릭터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영화는 행동하지 못하는 무력감에서 일종의 위대함을 본다. 보복이 다른 보복을 낳으며 분쟁이 끊이지 않는 전쟁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때로는 필요 이상의 개입과 대응을 자제하는 것일 수 있다고 영화는 가정한다. 무력감을 견디는 것, 어떤 사건에서 딱 적당한 만큼만 대응하는 태도는 찾아보기 힘든 위대하고 긴급한 능력일 수 있다.

영화는 이터널스의 능력을 과시적으로 펼치는 대신, 마이크로한 차원에서 이터널스의 능력을 상상한다. 영화의 중심인물인 세르시는 손을 통해 물질의 형질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지닌다. 그는 거대한 화석을 순식간에 작은 모래 부스러기로 만들고, 빨간 버스를 장미 꽃잎처럼 흩날리게 바꾸는 방식으로 마술처럼 사람들을 구한다. 그의 인간 연인 데인(킷 해링턴)이 세르시의 정체를 ‘마법사’로 넘겨짚은 것은 터무니없는 농담처럼 들리지만, 한편으로 꽤 적절한 비유다. 나아가 슈퍼히어로 역사의 근원을 환기하는 말로도 들린다. 이때 마법은 마술이라고 바꾸어도 무관하다. 마술의 기본 속성은 물질의 이동과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마술의 세계 안에서 종이는 실제 장미꽃으로 변하고, 손수건은 비둘기가 되어 모자 속에서 튀어나온다. 이것이 일종의 물리적 눈속임이라면, 히어로의 세계는 기술적이고 영화적인 눈속임이다. 어떤 방식이든 이들은 모두 관객의 믿음을 요구한다.

픽션에의 헌사

세르시는 인간 생활에 정착한 뒤 휴대전화 중독 증상을 보인다.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드러난 유일한 순간은 나이 든 모습을 보여주는 필터를 장착한 사진 애플을 옆자리의 이카리스(리처드 매든)의 얼굴에 실행해보는 순간이다. 필터 안에서 이카리스의 머리는 하얗게 센 채다. 어쩌면 필터를 씌운 이카리스의 모습이 실제 오랜 세월을 산 이카리스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마술이다. 기술이 마술을 습득했고, 마술은 기술화되는 동시에 일상화되었다. 영화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현재를 히어로의 세계 속에서 재탐색하는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오랜 기원을 지니고 있는지를 돌아보려 한다. 수어를 사용하는 마카리(로런 리들로프)에게 가장 빠른 속도를 부여한 것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은 선택처럼 보인다. 그의 존재는 무성영화 시기 존재했던 마술사와 히어로의 소통과 존재 방식을 연상시키며 가장 깊은 영화의 기원에 맞닿은 만큼 가장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돌진해온다.

영화는 세계의 역사를 훑어보는 동시에 그 옆에서 히어로를 중심으로 한 픽션의 역사를 가늠하도록 유도한다. 영화에 대한 혹평에서 보이는 ‘다큐멘터리 같다’는 말은 차라리 영화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다. 픽션을 다큐멘터리로 전환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픽션 위에 다른 카메라를 덧대면 된다. 실제로 영화 속에 카메라 하나가 덧붙는다. 마치 인간의 대표처럼 등장한 킨고의 집사 카룬(하리쉬 파텔)은 킨고의 연출에 따라 히어로의 삶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늘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히어로의 모습을 기록한다. 영화는 때로는 카룬이 든 카메라의 시점에서 인물들을 보여준다. 물론 카룬의 카메라로 찍힌 것 역시 픽션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필터처럼 대상의 성질을 간단히 바꾼다. 카메라는 단지 킨고의 쇼맨십을 드러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영화가 가닿으려 한 실제성이 픽션에 픽션을 더하는 방식으로, 즉 픽션에 대한 믿음으로 구축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앞서 나는 <이터널스>의 포스터 이미지를 보고 히어로들이 어딘가로 이동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는 히어로영화를 상상했다고 말했다. 물론 영화에서 실제로 오랫동안 어딘가로 걸어가는 인물을 보여주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관객이 지나치게 많은 공간을 이동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로드무비다. 우리는 정처 없이 걷는 누군가를 보는 대신, 역사와 현재를 교차하며 시간과 공간이 직조된 시공간을 이동해야 한다. 지루함을 견디며 많은 문명과 역사를 가로지르는 데서 오는 일종의 고통은 어쩌면 히어로의 유구한 시간을 따라잡기 위해 치러야 할 노동일지 모른다. 영화에선 인간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대신 영화는 역사 속 인간보다 시간을 뛰어넘는 히어로의 위치에 이미 가까워진 관객 인간의 자리를 충분히 마련한다.

기원전 5천년경 이터널스는 데비안츠의 공격으로부터 한 소년을 구한다. 세르시는 떠나기 전 소년의 손에 칼 하나를 건네준다. 그 칼은 수천년의 세월을 지나 스프라이트의 손에서 세르시를 찌르는 칼이 되어 돌아온(것만 같)다. 세르시는 자신의 몸을 관통한 칼을 손으로 움켜쥐어 물로 바꾼다. 이것은 기술과 상상의 방향에 대한 영화의 발언이다. 영화를 둘러싼 혹은 영화 바깥에서 우리의 상상과 기술이 누군가를 죽이는 데 쓰이는 대신 살리는 데 쓰일 수 있을까. 싸우거나 죽이지 않고도 히어로는 히어로일 수 있을까. 이를 관객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카메라를 든 자인 카룬은 이터널스 무리를 떠나면서 그들에게 지금까지 지구를 위해 애쓴 노고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한다. 어쩌면 이 인사는 이터널스만이 아니라 모든 히어로영화의 주인공들과 이들을 육체로 표현해준 배우에 대한 헌사일 것이다. 영화에 쏟아진 혹평을 보면 이터널스에 대한 카룬의 인사는 완벽한 픽션에 가깝다. 기술이 올바른 상상을 위해 쓰이는 세상에 대한 기대도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터널스는 어딘가에서 다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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