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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27번째 장편 '소설가의 영화': 영화의 픽션적 시간을 찾아서

<클레어의 카메라>의 한 장면에서 서점에 들른 영화감독 소완수는 동행한 클레어에게 책의 한 부분을 읽어달라고 요청한다. 프랑스어를 모르는 소완수는 클레어가 짚어주는 손을 주시하면서 그녀가 낭독하는 발음을 따라 한다.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생경한 단어를 한 음절씩 끊어 읽는다. 틀린 발음을 말하면 클레어가 정확한 어투를 교정해준다. 단어의 의미를 인지하고 문장을 발음하는 감각의 차이는 불가피하게 두 사람의 말과 몸짓에 시차를 생성하고 그들을 낯선 지각의 공간으로 데려다놓는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에세이집 <이게 다예요>를 읽는 이 장면을 매혹적으로 비치게 하는 것은 두 사람이 읽는 텍스트의 내용 때문이 아니다. 게다가 소완수가 에세이의 문장을 시의 구절로 오인할 만큼 텍스트의 위상과 성격은 숨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특정한 규칙을 가르치는 과정에 있다. 카메라는 클레어가 단어를 말하고 발음을 교정하는 절차를 특별하게 포착한다. 홍상수의 영화 제목을 빌린다면, 감독 스스로 ‘한 사람을 다른 이에게 소개하는 행위’이자, ‘한 사람이 뭔가를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는 의미로 설명한 ‘인트로덕션’의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이중적 의미의 ‘인트로덕션’은 낯선 이들에게 자신이 쓴 시를 소개하는 <하하하>의 문경과 <강변호텔>의 영환, 우연히 만난 영화감독에게 자신의 그림을 소개하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희정,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건네주며 “내가 당신을 찍고 난 뒤에는 당신은 더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클레어를 관통하는 제스처이기도 하다. 말과 사물에 부여된 상투적인 의미를 벗겨내 생경한 모습으로 재배치하는 홍상수의 영화는 우리가 간직한 인식의 틀을 넘어서는 세계의 다른 질감을 돌려준다는 점에서 주로 여행에 비견되곤 하지만, 이러한 효과는 탁월한 수업이 이루어지는 교육의 장소에서 산출되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영화의 교육학

누군가의 작업을 소개하거나, 한 사람이 처음 경험하는 것을 가르치는 상황은 신작 <소설가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행위의 계열이다. 소설가인 준희(이혜영)는 책방 직원에게 수어를 배우고, 우연히 마주친 박 감독에게 렌즈가 부착된 망원경의 사용법을 배운다. 그리고 배우 활동을 중단한 길수(김민희)와 그녀의 조카인 영화학교 학생을 만나 영화를 만들기로 약속한다. 학생과 선생이 공유하는 문답의 형식만으로 짧은 분량의 영화(<옥희의 영화>의 세 번째 에피소드인 <폭설 후>)를 만들어낸 연출자라는 것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이번 영화에는 인물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원리를 배우는 습득의 절차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장면들에 주목하는 것은 홍상수 영화에서 하나의 사물, 혹은 한 가지 원리를 파악하고 공유하는 순간이란 그 순간에만 나타났다 사라져버리는 세계의 규칙에 접근하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옥희의 영화>의 진구가 눈앞에 놓인 우유팩을 우주의 비밀과 연결 지은 것처럼, 홍상수에게 특정한 위치에 배치된 대상을 인지하는 방식은 세계의 변모하는 형태와 결부되어 있다.

<소설가의 영화>는 소설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의 하루를 다룬다. 홍상수가 도입하는 것은 작가가 작업물을 만들어내는 생산적인 시간이 아니라 글쓰기를 멈춰버린 시간이다. 기존의 방법을 중단하고 그 방법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한 자의 빈 시간이다. 그래서 준희는 새로운 소설을 쓰는 대신, 하루 동안 서로 다른 사람들을 마주치면서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얻는다. 이 영화의 특징적인 아름다움은 예기치 않게 만들어지는 배움과 가르침의 예외적인 순간들에서 발견된다. 아름다운 책은 반드시 어떤 종류의 외국어로 쓰여 있다는 프루스트의 말처럼, <소설가의 영화>에는 익숙지 않은 방법에 입문하는 몸짓의 아름다움이 있다.

준희가 책방 직원에게 수어를 배우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준희는 몇 마디 문장을 말하고, 그것을 수어로 표현해달라고 요청한다. 직원이 수어로 준희가 말한 문장을 표현하자 준희는 말을 하지 않고 직원이 보여준 수어를 그대로 흉내낸다. 몇 마디 말이 신체적 언어의 형태로 두 사람의 몸을 통과하고 미끄러진다. 고정된 장소 없이 교환되기를 거듭하는 영화적 언어의 한 사례를 예증한다는 점에서 이 장면의 호흡과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혹은 준희가 박 감독의 망원경으로 창밖을 보는 장면을 거론할 수 있다. 열악한 카메라를 사용한 탓에 노출을 과다하게 열어둔 이 영화의 화면은 창밖의 외부가 온통 흰색으로 가득해 보일 때가 많고, 인물들은 이따금 투명한 감옥에 고립된 수인(囚人)들처럼 보인다. 유폐된 무대에서 탈출하는 이미지를 가능케 하는 근거는 역시 사물의 원리를 발견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준희가 렌즈가 부착된 망원경의 사용법을 배우고 창밖을 바라볼 때, 카메라는 그녀의 시선을 대리하듯 천천히 줌인하는 장면으로 바깥을 비춘다. 영화의 한계점을 가늠해보려는 것처럼 지극히 제한적인 조건에서 영화 제작을 지속하는 홍상수에게 필요한 것은 구조의 효과가 아니라 장소와 인물, 그리고 그들이 결합하는 이런 교육의 장면들이다. 고다르의 영화에 대해 세르주 다네가 사용한 표현을 빌려, <소설가의 영화>를 홍상수의 교육학적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교육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준희, 혹은 영화는 어느 때보다 예민하게 감각을 활성화한다. 몰랐던 언어를 배우고, 바깥의 소리를 듣고, 창밖의 풍경을 보고, 냄새를 맡고, 술을 마시는 순간들로 일상의 감각은 다르게 전해진다.

픽션의 원리

영화 속 인물의 입을 빌려 창작에 관한 언명이 나올 때 그것을 의심 없이 수용하는 것은 함정에 빠지기 쉽다. 예컨대 강박을 버리고 더욱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박 감독의 자평과 달라진 그의 영화가 “맑아졌다”는 아내의 말은 상투적인 예술가 모델에 기대고 있는 만큼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그건 준희가 받아들이기에도 마찬가지인지 그녀는 두 사람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고, 선을 긋고 반박한다. 이와 반대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준희의 계획에는 일정한 강박이 드러난다. 그녀는 영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특정한 장소를 결정해야 하고 친밀한 관계에 놓인 사람들이 편한 상황에서 보이는 행동을 포착해야 한다고 말한다(앞서 말한 대로 장소와 배우를 먼저 결정하는 원칙은 홍상수의 것이기도 하다).

만드려는 영화가 다큐멘터리 같은 것이냐고 묻는 조카의 질문에 준희는 단호하게 부정한다. 여기서 ‘~가 아니다’라는 부정형의 용법은 영화의 영토를 구분 짓는 윤곽을 제공한다. 준희가 만들려는 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것은 픽션이다. 장면을 만드는 절차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울지 모르지만, 결코 다큐멘터리라고 말할 순 없다. 그러므로 홍상수가 구축한 픽션의 방법들을 떠올려본다. <자유의 언덕>에서 날짜가 없는 편지 뭉치를 떨어뜨리는 여자의 몸짓은 앞으로 영화가 나열하는 장면의 시제를 모호하게 처리하는 원인이 된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여자는 자신을 알아보는 남자에게 쌍둥이 동생과 헷갈린 것 같다고 말하며 혼란을 준다. 그들의 말과 몸짓은 일상의 표면에 픽션의 규칙을 투여한다.

홍상수는 심지어 특정한 규칙을 세우는 것만으로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기도 한다. 단편영화 <리스트>에서 빚 독촉을 피해 어머니와 함께 지방에 내려온 딸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12가지 하고 싶은 일들을 공책에 적는다. 영화는 다음날 리스트에 적힌 내용을 실행에 옮기는 딸의 여정을 따라간다. 이 단순한 기록에서 픽션은 리스트에 적힌 문자와 실제로 수행하는 행동의 이미지 사이에 감도는 미세한 차이를 흔들며 스크린에 침입한다. 그녀가 작성한 목록과 직접 수행한 행동들의 간극에서 잠시 진동하다 사라지는 긴장이 홍상수의 픽션의 한 사례다. 바다를 구경하고 배드민턴을 치고 양치하는 단순한 장면들은 리스트에 쓰인 언어와 결부되어 다른 차원의 긴장을 일으킨다.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은 ‘동네를 구경한다’라는 명제를 수행한 것일까? 양치질하는 장면은 ‘새로운 칫솔질법을 사용한다’는 다짐을 실행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까? 홍상수의 영화는 시간 순서가 흐트러진 편지 뭉치와 앞뒤가 다른 거짓말과 내일 할 일의 목록을 적은 한 장의 종이만으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장면들의 표층을 흔들리게 한다.

픽션을 산출한다는 것은 영화에 임의적인 장치를 도입한다는 뜻이다. 홍상수는 이처럼 극도로 단순한 규칙을 스크린에 가져오는 것만으로 영화를 긴장감 있게 운용하는 작가다. 어쩌면 그토록 단순한 장치만 남겨둔 채로 영화를 성립하려는 시도에 접근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한 픽션의 장치는 무척 연약하고 임의적이어서, 길수를 보며 떠올린 이야기를 금세 잊어버리는 시인의 말처럼 허무하게 사라져버리기 쉬운 것이다. 홍상수의 교육학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주제와 지식을 건네는 유형의 교육이 아니다. 그는 서로 다른 요소들의 자율적인 결합으로 단 한번만 만들어질 수 있는 영화의 픽션적 순간을 추출한다. 책방에 들러 수어를 배우고, 우연히 마주친 감독에게 망원경의 작동법을 배우는 순간처럼 반복해서 벌어질 수 없는 상황의 반응과 결과에 홍상수는 카메라를 가져다댄다.

소설가의 영화, 홍상수의 영화

결말에 와서 <소설가의 영화>는 생각지 못한 과감한 도약을 시도한다. 술자리에서 잠든 길수의 모습을 끝으로 영화는 시간을 뛰어넘는다. 장면이 바뀌면 길수는 극장에 도착한다. 그녀는 영화를 보기 위해 이곳에 왔다. 제목이 일러주는 대로 그 영화는 준희가 연출하고 길수가 출연한 ‘소설가의 영화’다. 그들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지켰고, 영화는 완성되었다. 그런데 당혹스럽게도, 스크린에 떠오른 영화는 너무나 범상하고 어설퍼서 선뜻 ‘영화’라고 말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다. 길수가 산책하고 꽃을 바라보는 일상적 순간들과 그녀의 곁에 동행하는 이름 모를 중년 여인의 모습과 카메라를 든 남자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영상이다. 만약 길수가 출연하지 않았다면, 우연히 발견된 버려진 영상의 한 부분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배우가 나오고 전문적으로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 참여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찍을 수 있을 법한 평이한 장면들이기에 이 영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홈 비디오 같은 이 영상을 영화는, 혹은 준희는 픽션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하룬 파로키가 말한 것처럼, 픽션을 산출하는 규칙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영상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일 뿐이다. 영상의 속성을 결정하는 건 한 가지 이미지의 외형이 아니라 영화가 설정하는 이미지의 배열과 배치이며 그것이 설정하는 이미지들 간의 관계다. 홍상수는 <소설가의 영화>라는 한편의 영화 옆에 준희가 만들어낸 또 다른 ‘소설가의 영화’를 배치함으로써, 예외적인 긴장을 유발하고 있다. 준희가 만든 영상은 이런 배치 속에서 픽션적 효과를 일으키는 장치로 자리매김한다. 이 영화 속 영화는 홍상수가 집요하게 추구한 영화적 형식에서 이탈해 있는 영상이라는 점에서 무척 의미심장한 픽션이기도 하다.

정교한 영화적 형식과 스타일을 구축한 연출자가 영화 속에서 상영되는 또 다른 영화를 삽입할 때마다 조심스러운 긴장이 엄습하곤 한다. 그것은 언젠가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선택하지 않은 낯선 형상이 그들이 고수하는 영화의 형식과 충돌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태어나기는 했지만>의 필름 상영 장면에 영사되는 16mm 필름에는 오즈가 강박적으로 회피한 다큐멘터리 톤의 즉물적인 도쿄 전경이 보인다. 로베르 브레송의 <몽상가의 나흘 밤>의 시사회 장면에서 상영 중인 영화에서는 총격전의 액션과 피 흘리고 쓰러지는 시체가 나온다.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에서 연극배우들이 보는 녹화된 연극 작품은 레네가 아닌 브루노 포달리데스가 연출한 영상으로 제시된다. 이 영화의 연출자들은 그들이 한번도 만들어본 적 없는 이미지를 영화 속 영화의 장면을 빌려 새겨둔다. 마찬가지로, <소설가의 영화>에서 상영되는 ‘소설가의 영화’는 홍상수가 시도하지 않은 촬영과 편집 스타일로 완성되어 있다. 홍상수의 영화는 거듭해서 극장에 들어서고 나오지만, 이토록 이질적인 영상의 외형을 직접 보여준 적은 없었다. 한편의 영화가 있고, 그에 수렴되지 않는 다른 한편의 영상이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다. 길수는 극장에 들어와 영화를 보게 되지만, 마치 영화 바깥으로 탈출한 것처럼 보이는 비영화적 영상이 그곳에 있다. 이 순간은 놀라울 만큼 과격하고 급진적인 배열의 평등성을 역설한다. 초심자가 완성한 영화를 빌려, 홍상수는 영화의 균일한 외형을 일그러트린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조르주 페렉은 알파벳 모음 ‘e’가 들어가지 않은 단어들만 사용해 주인공의 실종을 다룬 <실종>이라는 소설을 쓴다. 그 후로 몇년 뒤에, 이번엔 반대로 모음 가운데 ‘e’가 포함된 단어만 사용해 써낸 <돌아오는 사람들>을 완성한다. 실종되었다 되돌아오는 것은 소설 속 인물들이면서 ‘e’라는 철자 자체다. 두 소설은 시차를 두고 결합하는 몽타주처럼 조각나 있다. <소설가의 영화>는 페렉의 소설을 연상시키듯 일정한 시차를 두고 접해 있는 두편의 영화를 관통한다. 하나는 틀림없이 홍상수적인 규범과 원칙으로 만들어진 영화고, 다른 하나는 홍상수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무분별한 꿈같은 영화다. 둘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하나의 스크린에서 같은 몸으로 결합해 있다. <당신얼굴 앞에서>의 영화감독 재원이 배우인 상옥에게 영화를 촬영하고 편집하고 완성하는 절차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그리고 영화 제작 과정을 잘 알고 있는 그들에게조차, 심지어는 영화 자체에게도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낯설고 생소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렇게 홍상수에게 영화는 세계의 감각을 진동하는 불안정한 사물이 된다.

조악한 화질에 담긴 익명의 영상이 스크린에 떠오를 때, 이는 영화를 이루는 표면적 조건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는 자기 갱신적 진단처럼 여겨진다. 그 영상이 끝나고 나면 출연한 배우들과 감독 외에는 어떤 이의 이름도 없는 크레딧이 떠오른다. 영화가 끝난 걸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화면이 다시 열린다. 길수는 영화관을 나선다.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지켜본 영상의 연출자인 준희는 보이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던 길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자 화면에는 무엇도 남지 않는다. 극장을 통과한 이미지는 그렇게 다시 한번 세계를 낯설게 비트는 임시적 장치가 된다. 길수가 스크린으로 바라본 영상이 픽션이라면, 그것은 그 이미지와 사운드를 보고 들은 자들의 세계에 필연적인 변형을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녀가 영화관의 문을 열고 나오자 조금 전까지 스크린에 존재하던 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극장의 직원은 옥상에 담배를 피우러 갔을 거라고 말하지만,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알람까지 설정해둔 준희가 사라져버린 근거로는 확실치 않다. 그러므로 추론은 끝내 불투명하게 남겨진다. 말하자면,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다. 그렇게 <소설가의 영화>는 아직 한번도 도착한 적 없는 변형된 영토를 향해 영화의 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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