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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유 카소비츠 (Mathieu Kassovitz)

1967-08-03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5.9

/

네티즌6.6

기본정보

소개

마티외 카소비츠는 90년대 프랑스영화계의 풍운아다. 95년 카소비츠가 칸에 <증오 La Haine>를 출품했을 때 대다수 프랑스 언론은 94년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이 칸에서 불러일으킨 흥분을 기대했다. <증오>는 감독상 수상에 그쳤지만 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칸은 내 영화를 좋아했고 대중들도 좋아했다. 애초에 내 의도는 ‘부르주아들을 놀라게 하자’는 것이었다. 관객이 내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지 못하면 모든 게 헛수고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타란티노처럼 카소비츠도 프랑스영화계의 스캔들 메이커다. 대입학력고사를 치르기도 전에 고등학교를 때려치웠고 세자르영화상 신인배우상에 지명됐지만 아직까지 트로피를 찾아가지 않았다. 기성세대와 달리 권위에 저항하는 카소비츠의 독특한 행동거지는 늘 관심의 초점이다. 심지어 생방송도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진행자에게 시비를 걸고 방송을 중단시킨 일화도 있다. 97년 칸영화제에서도 카소비츠는 자신의 영화 <암살자들 Assassin> (1997)의 지나친 폭력성을 질책하는 기자들과 대판 싸움을 벌였다.

67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카소비츠는 9살 때 아버지인 영화감독 피터 카소비츠의 작품 <의자바닥에서>에 아역배우로 출연한 적이 있고 13살 때부터 슈퍼 8mm로 단편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피에로 좀벌레 Fierrot le pou>(1990) <암살자 Cauchemard blanc> (1991) 등 두편의 16mm 단편을 연출한 후에 93년 <혼혈아 Cafe au lait>로 장편영화 데뷔작을 연출했다. 두번째 장편영화인 <증오>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드러내놓고 말하기를 꺼리던 파리 교외 지역 빈민가의 얘기를 생생하게 다뤘으며 프랑스영화계에 파리 교외 빈민가를 가리키는 ‘방리유’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유행시켰다. 헝가리계 이민 2세이기도 한 카소비츠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왜 배타적인 관계가 이어질 수 없는지를 추적하는 데 관심이 있다.

<증오>에서 카소비츠는 정공법으로 사태의 맥락을 따지진 않는다. 해석하지도 않고 감독 입장에서 특별한 의미를 전하기 위해 장면을 꾸미지도 않는다. 대신 기록영화를 찍는 것 같은 수법으로 상호적의와 멸시에 가득 찬 방리유 지역의 외국인 이민자들과 경찰간의 관계를 살벌하게 묘사했다. 능란한 솜씨로 관객을 현실 속에 살게 하는 듯한 체험을 전해주는 <증오>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공격적인 에너지가 넘쳐난다. 단속적으로 되풀이되는 총소리와 시계 초침소리를 통해 시종 관객이 긴장을 풀지 못하게 끌고 나가며 유머도 있다. 첫 장면에서 세면대 앞에 선 뱅상 카셀이 <택시 드라이버>의 로버트 드 니로를 흉내내는 것은 카소비츠가 좋아하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흉내낸 것이며, 미술 화랑에서 처음 만난 두 남녀가 예전에 어디서 본 적이 있다고 말하는 장면은 이 두 배우가 카소비츠의 첫 영화 <혼혈아>에서 주연을 맡았던 걸 빗댄 것이다.

카소비츠는 “80년대의 이야기꾼인 레오스 카락스, 장 자크 베넥스, 뤽 베송이 외면한 프랑스 현실을 다시 영화에 끌어들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프랑스 사실주의영화 전통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영화적 뿌리와 지향은 스티븐 스필버그를 비롯한 미국의 대중영화다. 프랑스의 영화전통보다는 미국적 감성으로 영화를 찍고 뤽 베송의 대를 잇기 희망하는 카소비츠는 지나치게 양식화한 기교로 겉만 훑은 <암살자들 Assasins>의 실패 이후 다소 주춤했지만 누벨바그에 등을 돌리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프랑스 차세대 감독의 대표주자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 영화감독사전,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