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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르지 스콜리모브스키 (Jerzy Skolimowski)

1938-05-05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7.3

/

네티즌7.9

| 수상내역 5

기본정보

  • 다른 이름예지 스콜리모프스키;예르지 스콜리몹스키;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38-05-05
  • 성별

소개

대표작 <낙승> <장벽> <문 라이팅>
비디오 출시작 <등대선>
예지 스콜리모프키는 철의 장막 시절 명성이 자자했던 동유럽의 톱클래스 영화감독이었다. 로만 폴란스키와 함께 안제이 바이다 이후 세대를 대표했던 스콜리모프키는 불행히도 로만 폴란스키처럼 서유럽의 영화시장에 적응하지 못했다. <투항>을 마지막으로 스콜리모프키는 고국인 폴란드에서 영화를 찍을 수 없었고 서유럽의 영화자본을 구하러 다니면서 힘들게 영화를 찍었다. 흥행이 부진한 70년대 초반의 연출작들 때문에 제작비를 구하기 어려워진 뒤 제작들에게 전화를 거는 스콜리모프키의 첫마디는 항상 똑같았다. “난 스콜리모프키에요. 혹시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영미권 영화계에서 그는 미지의 감독이었다. 그래도 그는 사무실에 ‘한 남자의 일생을 좌우할 만한 최고의 애인은 영화다’라는 오슨 웰스의 경구를 커다랗게 써붙여 놓고 배짱좋게 버텼다.
38년 폴란드 우츠 태생인 스콜리모프키는 22살 때인 60년 안제이 바이다 감독을 만난 뒤 영화계에 입문했다. 그때 스콜리모프키는 바르샤바대학에서 인류학, 역사, 문학을 전공하고 두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었으며 단편소설을 쓰고 재즈를 연주하고 권투선수 생활을 하는 다재다능한 젊은이였다. 스콜리모프키는 바이다의 영화 <순진한 마법사>의 각본을 썼고 바이다가 젊은 세대의 생활양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바이다의 격려로 우츠영화학교에 들어간 스콜리모프키는 로만 폴란스키의 장편 데뷔작인 <물 속의 칼>의 각본을 썼다. 건달 청년이 우연히 부르주아 부부의 요트에 동승한 뒤 부인과 눈이 맞으면서 미묘한 갈등을 벌이는 내용의 이 영화는 등장인물이 한 공간에 고립된 채 감정적인 분투기를 벌이는 폴란스키 특유의 취향을 반영했지만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과 반목을 다룬 플롯의 줄기는 스콜리모프키적인 것이다.
스콜리모프키의 극영화 데뷔작은 <신원미상 Identification Marks: None>(1964). 영화학교 실습용으로 찍었던 필름을 이어붙인 이 영화는 아무런 삶의 목적없이 어슬렁거리다 징병통보를 받은 청년 안제이의 일상을 통해 전후 폴란드 젊은이들의 정체성 불명이란 주제를 실험적으로 묘사한 것이었다. 스콜리모프키의 두번째 영화 <낙승 Walkover>(1965)은 서른살 먹은 권투선수가 늙어가는 육체에 느끼는 강박감을 다루고 있다. 아마추어 티가 가시지 않은 <신원미상>에 비해 <낙승>은 현기증나는 형식미를 보여준 영화였다. 이 영화의 화면수는 35개다. 길게 찍기 스타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한 장면 한 장면마다 길이 기억할 만한 정교한 카메라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공장 건물 앞을 달릴 때 크레인에 실린 카메라는 수평으로 그의 움직임을 쫓다가 주인공이 여자친구와 함께 공장 지붕의 소방 사다리를 오를 때는 수직 이동으로 두사람을 따라 올라간다. 인물의 동선과 카메라 움직임을 정확하게 계산하지 않으면 한 장면에 담기 힘든 연출이다. 기법을 과장하지 않고 주인공의 감정적 에너지의 전달 수단으로 카메라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면서 시점의 객관성을 정확하게 지킨다.
<장벽 Barrier>(1966)은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의 시각적 어휘력에 감탄한 스콜리모프키가 대사 없이도 관객이 이해하는 영화로 의도하고 만들었던 영화였다.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전쟁으로 인해 골이 깊어진 세대간의 단절을 담았으며 양로원에 있는 아버지와 아무런 교감을 나누지 못하는 아들의 생활을 따라간다. 스콜리모프키는 벨기에 자본으로 만든 <출발 Le Depart>(1967)의 결과가 좋지 못하자 귀국해서 <투항 Hands Up>(1967)을 연출했지만 이 영화는 반스탈린주의 성향 때문에 상영을 금지당했다. 스콜리모프키는 침체에 빠졌고 <제라르의 모험 The Adventures of Gerard>(1970)과 나보코프 원작의 <왕, 여왕, 불량배 King, Queen, Knave>(1972)는 실패작이었다. 그러나 <외침 The Shout>(1978)과 <문 라이팅 Moonlighting>(1982)은 당대 최고의 유럽 영화감독이란 스콜리모프키의 명성을 되찾게 해주었다. 네명의 폴란드 노동자가 런던에 와서 폴란드 부자의 별장을 수리하는데 일행 중 유일하게 영어회화가 가능한 제레미 아이언스는 폴란드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사실을 숨기고 계속 다른 인부들에게 일을 시킨다. 작업을 마치고 달빛이 교교히 흐르는 날 밤 인부들은 귀국할 마음에 들떠 있다가 쿠데타 때문에 귀국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분노에 차서 제레미 아이언스를 린치한다. 이 영화는 서방세계에 온 동유럽 노동자들의 눈에 비친 낯선 풍경을 섬뜩하게 포착하면서 소집단에서도 어김없이 관철되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독특한 일화를 담아낸다. <문 라이팅>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스콜리모프키는 80년대 중반 이후에 뚜렷한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성공은 최고의 복수 Success Is the Best Revenge>(1984)는 거의 일반 배급망을 타지 못했고 <등대선>도 같은 운명이었다. 이 영화는 8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뒤늦게 작품상을 받았지만 일부에서만 상영됐다. 스콜리모프키는 그후에도 <봄의 격랑 Torrents of Spring>(1990) <페르디더크 Ferdydurke>(1991) <30개의 열쇠 Door Key>(1992) 등을 만들었지만 선배인 안제이 바이다와 동료인 로만 폴란스키의 경력에 비하면 재능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한 비운의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의 독특한 영화세계의 개성은 가장 길이 남을 생명력을 지니고도 남음이 있다.
<b>[씨네21 영화감독사전]</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