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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선댄스영화제에서 보스턴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영화인 토드 버로는 셀룰로이드의 죽음을 선언했다. 최근에 진행되는 영화계의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가까운 미래에는 영화제작과 배급에서 35mm 아날로그 필름이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그 선언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사건은 98년 10월에 있은 스티븐 아발로스와 랜스 웨일러가 만든 <라스트 브로드캐스트>(The Last Broadcast)라는 영화의 개봉이었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인들도 많이 사용하고 있는 소니 VX-1000이라는 저렴한 가격의 DV(디지털 비디오 6mm)카메라를 가지고 저예산으로 촬영됐고 편집 또한 컴퓨터를 이용한 디지털 편집으로 완성됐다. 획기적인 것은 극장상영까지도 디지털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흔히들 하는 것처럼 완성된 DV영화를 키네코작업을 거쳐 35mm 필름으로 옮기는 대신 이 영화는 디지털 데이터를 인공위성을 통해 송출했다. 이것을 수신한 미국 내 다섯개 도시의 극장들은 고화질 디지털 비디오 프로젝터를
영화의 미래, 미래의 영화 [2] - 디지털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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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5년 디지달씨의 하루, "20세기 인간들은 불편했겠어…"
“아니, 영화 하나 만드는 데 정말로 이런 것들이 필요했다는 거야?”
디지달씨는 ‘영화의 역사’ 과목 첫 시간에 인터넷II 영화학교가 실시간으로 전송해준 이른바 ‘필름’이라는 것의 3차원 입체영상을 보며 눈앞의 모니터를 향해 이렇게 내뱉었다. 20세기에는 전화를 쓰기 위해서 전화선 설치공사를 대대적으로 해야 했던 바보 같은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의 직업상 알고 있었지만, 불과 95년 전인 2000년까지도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름이라는 것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필름의 모양이라는 것도 일단 이상해 보이는 데다가, 그걸로 영화를 찍기 위해 수백명의 사람들이 달라붙어 촬영을 한 후, 다시 현상이라는 것을 해 자르고 이어붙여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설명까지 듣고 나니 ‘20세기의 인간들이란 정말 불쌍했구나’라는 생각마저 떠올랐다.
남들로부터 최고의 직업이라고 인정받는 이동통신 전자상거래
영화의 미래, 미래의 영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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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너 정말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냐” “네?” “니가 그렇게 썼잖아, 일기장에.” 1987년 4월
공포에 질린 운동권 피의자 박명식과 능숙한 고문형사 김영호가 마주한 고문실. 그리고 전혀 엉뚱한 질문. 가학적이고 악랄한 형사, 평범한 서민 가장의 두 얼굴 사이에 김영호는 첫사랑에의 그리움을 아주 짧지만 진하게 드러낸다. 그럴 때마다 그는 다리를 전다.
=나는 관객이 여기 와선 김영호에게 동화되기를 바랐다. 최소한 연민은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가장 악랄하기도 해야 한다. 이때부터 내가 너무 힘들어졌다. <초록물고기> 때는 나는 이야기를 빠져나와서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내가 빨려들어가 있었다. 특히 4번째 장에선 괴롭고 힘들었다.
-김영호가 박명식의 뺨을 때리는 장면은 그냥 징그럽고 끔찍하다. 왜 그렇게 찍었나.
=그 장면 찍기 전날 잠을 못 이루고 내내 악몽만 꿨다. 힘들었지만 그날은 특히 그랬다. 나는 이 장면은 이야기의 맥락보다 고통의
이창동을 만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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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은 느리다. 말도 느리고, 동작도 느리다. 정신도 느린 것 같다. 1980년대 중반에 소설가 생활을 시작했는데, 아직 90년대에도 도착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인다. 동료들이 왕창 빠져나간 지 오랜인데도 이창동은 어쩐지 80년대를 서성이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그의 두 번째 영화 <박하사탕>은 심지어 거꾸로 간다. 김영호라는 사내의 20년사를 일곱 토막 내어, 시간의 역순으로 배치했다. 맨 마지막 장면은 1979년, 그의 나이 스무살 시절의 어떤 하루다. 속도의 계율을 아예 걷어차내는 짓인데도, 이창동은 “첫사랑의 순수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랬다고 태연스럽게 말한다.
누군들 첫사랑이라는 말만으로도 가슴젖지 않으랴. 하지만, <박하사탕>을 통해서 그곳에 이르는 건 심란함을 각오해야 한다. 본래 맑고 착했던 청년이 완전히 부서지는 과정을, 그것도 역순으로 목격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가슴아픈 일이다. 더구나 이 여정에는 한국 땅에서 살아온 사람이면
이창동을 만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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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인물들의 증언에 따라 동일 사건에 대해 몇 가지 상이한 버전을 보여준다는 것이 <라쇼몽>(구로사와 아키라, 1950)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는 점은 웬만한 영화팬들이라면 숙지하고 있는 사실일 게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커리지 언더 파이어>는 기본적으로 <라쇼몽>의 이런 이야기 구조를 ‘차용’한 영화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지레 겁부터 먹고서 이 할리우드영화를 대할 필요는 없다. 할리우드의 모토는 항상 관객을 괴롭히지 않고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 봉사한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예컨대 <라쇼몽>처럼 끝까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를 밝히지 않으면서 ‘당혹스럽게도’ 진리의 상대성 운운하는 것은 할리우드적 방식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진실에 대한 혼란이 있고 플래시백이 빈번히 나온다 해도, <커리지 언더 파이어>는 이해하기에 전혀 혼란이 없을 만큼 플롯이 가지런히 정지(整地)되어 있는 영화다.
<커리
할리우드가 상대성을 말할 때, <커리지 언더 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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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영화포스터를 믿지 않는다. 칼을 떼로 들고 있는 포스터를 보고 칼싸움 영화인 줄 알고 들어갔더니 ‘떼창’만 실컷 듣고 나온 오페라 영화- 영화 내내 하도 넓은 반경으로 격렬하게 졸아대서 목 근육에 ‘갑빠’가 생기게 했던- <오델로>에 당한 고등학교 시절 이후에는 말이다. <바그다드 카페>라는 영화를 보게 된 건 순전히 그 포스터가 하도 ‘땡기지’ 않아서였다. 웬 청승으로 영화를 혼자 보게 됐는지는 도저히 생각나지 않지만, 그 포스터가 얼마나 ‘땡기지’ 않았는지는 생각난다. 저렇게 심심한 포스터라면, 적어도 ‘칼싸움’ 기대했는데 뚜껑 열고 보니 ‘오페라’여서 속았다는 기분에 화딱지 나는 경우는 없겠거니… 하는 게 그 심심해 보이는 영화를 고른 주된 이유였으니까. 무슨 약속 시간인가에 맞추려면 적어도 서너 시간은 보내야 했는데, 보다가 심심하면 피곤하던 차에 그냥 대충 의자에 기대 잘 요량이기도 했고.
그렇게 엄하게 그 영화를 보게 됐지만, 내게 영화 보기는
너희가 포스터를 믿느냐? <바그다드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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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말이지만, 배우 없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실사까지 파고든 디지털 애니메이션의 발전상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배우 없는 영화’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 좀 호들갑스러울 수는 있으나, 불가능하다 도리질만 할 수 없는 것은 <스튜어트 리틀>이 내비친 가능성 때문이다. 사람 세상에 입양된 쥐의 모험담이 애니메이션 아닌 실사로도 만들어질 수 있고, 그것이 1억달러의 제작비가 쓰일 만한 보람직한 프로젝트일 수 있다는 사실. 여기서 사람은 기껏 조연이거나 배경 그림에 불과하다. 3D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 탄생한 가상의 캐릭터 스튜어트, 립싱크 솜씨가 훌륭한 고양이 스노벨과 그 패거리들이 이끌어가는 이 영화에서, 할리우드의 여전사 지나 데이비스나 영국 출신 연기파 휴 로리에게 눈길을 보내는 관객이 과연 몇이나 될까.
<스튜어트 리틀>이 일궈낸 기술혁명은 그렇듯 눈부시다. 풍부한 표정연기와 다이내믹한 액션연기를 소화하는 스튜어트의 생생함은, 그것이 살아
어린 관객에게 전하는 ‘친화적인’ 메시지, <스튜어트 리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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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해 깊이, 오래 생각하면 성자나 철학자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소나티네>를 보면 성자나 철학자가 아니라 영화감독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소나티네>는 죽음에 대한 기타노 다케시의 사고가 고스란히 투영된 작품이다. 언젠가 기타노는 자신의 최고작으로 <소나티네>를 꼽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오랫동안 죽음에 홀려 있던 자기 모습이 그대로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머리에 지그시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기타노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세번 반복되는데 한번은 총알없이 하는 장난이지만 두번은 뻥 뚫린 두피 사이로 피가 용솟음치는, 몸서리쳐지는 장면들이다. 그는 왜 이런 끔찍하고 살벌한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일까? 다케시는 야쿠자 보스 무라카와를 통해 그 의미를 돌아본다.
기타노 자신이 연기하는 무라카와는 처음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냉혈한으로 등장한다. 작은 조직의 보스지만 마음에 안 들면 최고 보스의 오른팔이라도
죽음에 대한 기타노 다케시의 사고, <소나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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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선 누구나 슬퍼하고 가슴아파한다. 하지만, 대개는 슬픔을 추스르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가까운 이의 죽음에 맞닥뜨리면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밥도 먹고 웃고 떠들기도 하며 일상으로 돌아간다. 죽음도 세상살이의 한 부분이고 삶이란 다 그런 것이다.
장의사, 말만 들어도 별로 유쾌하지 않다. 섬뜩해서 오싹 소름이 돋기도 한다. 그런데 장의사에겐 죽은 사람의 몸을 닦고 수의를 입혀 초상을 치르는 일이 ‘일상사’다. “사람은 마지막 떠날 때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법”이라는 할아버지에게 가업으로 하는 장의사가 행복한 일이라는 것은 수긍할 만하다. “장의는 죽은 사람의 몸만 다루는 게 아니라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오락실 타령을 하는 망나니 같은 손자에게 장의일을 권하고, 여관방에서 목을 매 죽으려던 철구가 낙천장의사를 찾아오면서부터, 할아버지의 투철한 ‘장인정신’은 드러나기 시작한다. 투덜거리지만 마지 못하는 재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끌어낸 얕은 코미디, <행복한 장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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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궂게도 장선우 감독은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옮겨오면서 세 장으로 나누어, 각각 첫째 구멍, 둘째 구멍, 셋째 구멍이란 원작에 없는 중간제목을 붙였다. 논란과 대결을 의도한 장정일의 말썽 많은 원작에 장선우는 자기식의 방점을 찍어 각색한 것이다. ‘구멍’의 물리적 의미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설명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난 너의 세 구멍과 전부 하고 싶어.” J라는 남자는 아예 구멍에 눌러앉고 싶어하는 것 같다. 집에서나 거리에서나 그는 불편하다. 그곳은 모두 ‘거짓말’이다. 여관에 들어와서야 마음이 놓인다. 별로 돈이 없어보이지도 않는데, J는 굳이 여관만 전전한다. 그것도 땟국물 전 이불과 값싼 조명이 달린 눅눅한 여관만.
그러고 보면 여관도 구멍이다. 그곳에서의 습한 기억을 누구나 한 가지 이상 갖고 있지만, 짐짓 보이지 않는 척하는 그래서 세상에는 없는 척하는, 세상의 구멍이다. 장선우 감독은 <우묵배미의 사랑>과 <경마장 가는 길>에
성인됨을 상실한 성인남자의 비가,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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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의 아버지가 아랑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은 1999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사실 그분은 한때 국회의원을 지낸 거물급 사업가로,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였던 필립 때문에 몇번 뵙기는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감히 쳐다보기도 힘든 신분의 사람이다. 그런데 그분이 난데없는 부탁을 해왔다. 필립이 여행을 가는데 같이 가줄 수 없겠냐는 것이다. 아랑과 필립은 고등학교 때야 건들거리며 노느라고 어울리긴 했지만, 졸업 후에는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지내왔다. 둘 다 변변한 대학에 들어갈 재주는 없었지만, 서로의 처지는 전혀 딴판이었다. 돈도 ‘빽’도 없는 아랑이 남은 불알 두쪽으로 군대에 갔고, 필립은 든든한 아버지 덕분에 미국으로 도피 유학을 가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3년이 지났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없는 형편에 새 천년 동해 일출 구경이라니. 아랑은 그저 횡재거니 하고 필립의 집으로 찾아갔다. 필립과 아버지는 벌써 문 앞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있었다. “아버지, 제가 몇살이에요. 제발 좀 그만
[이명석의 씨네콜라주] 태양은 아득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