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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감독 8인 (5) - <빙우>의 김은숙 감독
2002-06-08

얼음 산에서 사랑을 굽어보다

그는 왜 감독이 되었나

“이건 뭐지?” 손목시계 디자인회사를 다니다 그만둔 지 3개월. 제멋대로 빈둥거리며 살았던 백수생활이 이제 슬슬 지겨워질만 하던 때였다. 마침, 신문에 난 영상원 1기 모집 광고는 김은숙(33)의 녹슨 호기심을 발동시켰다. 무작정 연출을 지망한 그는 시를 주고 콘티를 짜는 등 당시로서는 독특했던 시험문제를 대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이런 시험이 다 있군” 하며 퍼즐 풀 듯 가벼운 마음으로 응했다. 정작 합격증을 받아들게 된 사정은 자신도 모르겠다고.

입학 당시엔 찾아볼 수 없던 연출욕이 급작스레 타오른 건, 영상원에서 <일요일> <거울> 등의 단편을 만들면서부터. 졸업 뒤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서, 함께 작업해보고 싶었던 이재용 감독을 곧장 찾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순애보>의 스크립터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나, 이재용 감독은 꼼꼼한 그에게 덥석 각색을 맡겼다. 결과가 만족스러웠던 것일까. 정작 촬영에 들어갔을 때는 쿠앤필름의 구본한 대표가 현장에 가겠다는 그를 막아섰다. “시나리오 쓰면서, 감독 데뷔 준비나 하라”고. 이후, 도플갱어를 소재로 한 <거울> 등 2편의 시나리오를 준비하기도 했으나 중도에 제작이 무산됐다. “그때는 영화가 엎어진다는 말이 뭔지도 몰랐다”는 그는, 결국 지난해 3월부터 <빙우>의 등반을 책임지게 됐다.

그는 왜 <빙우>를 연출하는가

‘산악멜로’라 이름붙인 <빙우>는 충무로에선 다소 특이한 컨셉의 영화. 그래서인지 “산을 탈 줄 아느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들었다. 자신도 한때는 “등반전문학교에 들어가서, 매킨리 고봉에 매달려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들었을 정도다.

<빙우>의 줄거리를 거칠게 요약하면, 조난당한 두 남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떠올린 여자가 한때 자신들이 똑같이 좋아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 단순히 설산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멜로 아닌가라고 묻자 김은숙 감독은 이렇게 설명한다. “처음 이 아이템을 받아들었을 때 맘에 들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죽음을 앞에 둔 극단적인 상황이었고, 또 하나는 경민이라는 여자 캐릭터였다.”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감정을 목숨 외엔 다른 것을 떠올리기 불가능한 설정하에서라면 또렷이 도려낼 수 있을 것 같았고, 두 남자의 회상이 번갈아 교차하며 여자의 캐릭터를 만든다면 기존 멜로의 도식과 차별점을 가질 수도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뒤 들어간 1년 가까운 분당에서의 합숙생활. 최종 시나리오를 내놓았던 한달 전 무렵에는, 영화의 주무대가 될 고산 헌팅을 위해 뉴질랜드의 마운틴 쿡을 다녀오기도 했다. 현재로선 캐나다쪽과 알프스쪽도 타진해보고 있는 상황. 마운틴 쿡은 우리와 계절이 반대인 남반구에 위치한데다 4000m 정도밖에(?) 안 되는 산이라 만만하게 봤는데, 막상 두눈으로 확인한 마운틴 쿡은 평지에 빌딩을 세워놓은 듯한 모양에 헬기로 이동해야 하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산이라 안전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 30대 중현 역에 캐스팅된 이성재와 함께 조난당할 상대가 정해지는 6월 말이면, 본격적인 설산 등정에 나설 참이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는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연작 <십계>. 영상원 3차 시험에 그중 한편인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을 보고 인상적인 장면의 구성요소를 쓰라는 문제가 나와서만은 아니다. 볼 때마다 둔기로 뒷골을 얻어맞은 듯한 묵직함이 느껴져서다. 인물의 내면심리를 세련되게 따라가는 마이클 만의 테크닉 역시 그가 부러워하는 것 중 하나. 최근 그의 작업실 한켠에 놓여진 비디오 플레이어에 주로 꽂혀 있는 작품은 난니 모레티의 최근 개봉작들이다. 극한 상황에 인물을 놓아두기 좋아하는 자신과는 정반대의 스타일이라 오히려 관심이 많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 남자의 육체를 먹어치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집착을 보이는 여자가 등장하는 영화도 만들 계획이다. 비정상적인 소유욕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이 아닐까라고 묻는 이 미래의 지독한 러브스토리 또한 다른 의미에서 ‘내 인생의 영화’로 남게 될 듯. 글 이영진 anti@hani.co.kr · 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

Synopsis

30대 중반의 토목기사 중현과 20대 후반의 야구선수 우성은 같은 학교 출신이지만 북알프스 등반에서 처음 만난 사이. 부상당한 팀원을 베이스캠프에 남겨둔 채 정상에 오른 두 사람은, 그러나 갑자기 들이닥친 악천후로 인한 사고로 얼음동굴에 갇히게 된다.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은 중현과 해외원정은 이번이 처음인 우성. 고립된 두 사람은 힘겹게 버텨나가지만 죽음의 그림자는 서서히 그들을 조여온다. 점점 흐려져가는 두 남자의 의식 속에 지나간 옛사랑의 기억이 파고드는데, 공교롭게도 그녀는 같은 사람, 경민이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중현의 사랑과 다가서지 못했던 우성의 사랑은 그렇게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교차한다. ▶ 신인감독 8인 (1) - <이중간첩>의 김현정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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