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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2)
2002-06-14

“누가 내게 끝 좀 보여줘!”

문 닫은 술집인데 영업방해라고?8월29일, 부산 초량동 러시안 거리│25차 촬영

밤새 4컷밖엔 소화하지 못한다. 전혀 예상을 못한 건 아니지만 갑작스레 출현한 암초에 걸렸다. 애초에 유명한 유흥가인지라 촬영이 쉽지 않을 건 예상했었다. 하지만 상가나 거리의 분위기가 러시안, 중국계 상대로 형성된 독특함이 있어서 욕심을 냈었고 그런 거리를 오픈 세트로 구현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우리 프로덕션 현실에서는 다른 대안 없는 선택이었다. 그 거리는 섭외 초기부터 갖은 고생을 다했고, 러시안 진영과 중국계 진영의 실력자를 찾아다니며 설득을 해야 했다. 촬영 당일 역시 술집 외에 일반 상가가 문을 닫는 밤 10시에나 촬영팀이 들어갈 수 있었지만 내심 촬영허가를 받은 것만 해도 제작부의 성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취객과 불량배, 혹은 상인들의 불만과 언제 부딪칠지 모르는 상황이라 스탭 모두 긴장하고 조심하며 촬영준비를 했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상가번영회, 해병전우회, 칠성파 인사들이 현장에 나와 주었다. 우리 쪽 미술 장치들-연등, 홍등, 주황깃발, 간판 등을 장치해야 했고 비까지 뿌려대면서 급기야는 좁은 골목으로 차까지 몰아야 하는 장면을 찍어야 했다. 설상가상 오늘 따라 서울에서 안 대표와 CJ 이강복 대표까지 보러 내려왔고, 창원 사는 아들 녀석까지 선행 방학숙제로 촬영장 봉사를 해야 한다며 촬영장에 나와 있었다.

준비는 늦어졌지만 첫 장면, 풀 숏은 그런 대로 잘 나왔다. 터진 상수관에서 나온 김, 거리, 매이 등이 영화의 독특한 무드를 잘 담는다. 두 번째 컷을 찍을 때였다. 매이의 클로즈업. 갑자기 문 닫은 지하 나이트클럽에서 거나하게 취한 업소 사장이 나오더니 특유의 거친 부산 사투리로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영업방해라고 다 물러가란다. 아니. 간판 불 다 끄고 문 닫은 집에서 영업방해라니…. 주위의 이웃들과 심지어는 같이 술 먹은 그의 지인까지도 말렸지만 급기야 제풀에 흥분의 도를 더한 그는 이 PD와 여자 스탭들 앞에서 “이년아. 내 XX…” 운운해가며 난장을 쳐댄다. 칠성파 형아들도 “니 깡패야? 쳐라, 이 시끼야” 하고 덤비는 덴 방도가 없다는 표정이다. 상가 번영회장이 그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을 때 잠깐 동안 두 번째 컷을 찍었다. 그동안 스탭들 사이를 누비며 명랑하게 이것저것 나르던 아들 녀석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현장을 뒤흔든 뉴욕의 테러9월11일, 여수 얼음공장│34차 촬영

얼음공장 마지막 촬영일. 5일부터 비가 온 9일을 제외하곤 연속 6회째 밤 촬영이다. 물론 촬영은 12일 아침까지 연속될 것이다. 오늘도 18컷을 찍어야 한다. 특히 김윤진이 민감한 범죄프로파일링을 해야 한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 온 김윤진은 아직 한국어 뉘앙스에 조금 약하다. 발성도 좋고 감성도 좋은데 문장 안에 어느 낱말에 어느 정도 힘을 실어야 하는지 하는 예민한 부분은 항상 여러 번 상황을 상상으로 시뮬레이션해가며 이야기해야 한다. 더욱이 그녀는 복제인간이 지닌 묘한 건조함을 지니는 인물이어야 하고 직업도 프로파일러다.

밤 12시쯤, 잘해나가던 그녀가 심한 동요를 보인다. 나중에 알았다. 세상은 상상도 못할 큰 사건으로 뒤흔들려 있었다는 걸…. 잠깐 쉬는 동안 화장실을 가던 나는 사무실 TV에서 뉴욕 월드트레이드 센터가 무너지는 걸 계속 방영하는 뉴스를 보았다. 창백한 얼굴로 김윤진은 계속 국제전화를 걸어대고 있었다. 집이 뉴저지에 있고 친지와 친구들이 뉴욕에 있으며 남부 맨해튼에서 일하는 친구들도 많은 그녀로서는 지금 촬영에 집중이 될 턱이 없었다. 친지들의 안부가 하나둘씩 확인되며 김윤진이 안도의 한숨을 쉬기 시작한다. 촬영이 재개되고 그녀는 침착하게 촬영을 끝낸다. 테러사태로 모두 반쯤 붕 뜬 기분이다.

노래가 현장을 돕는구나2001년 9월14일, 부산 제비표 페인트 말라카베이 바 오픈세트│35차 촬영

미술팀이 잔뜩 긴장했다. 오래 준비했지만 텅 빈 폐공장을 개조해 술집으로 바꾸는 건 아무리 준비해도 부족해보이는 힘든 작업이다. 더구나 게토의 역사와 분위기를 대표하는 공간으로 이 지역주민들의 문화적 깊이가 보여야 한다. 바의 이름이 ‘말라카베이’인 것도 동남아인들의 이 지역 이주와 관련된 편린을 보여준다. 말라카베이는 말레이시아 반도 남단의 좁은 해협이다. 서양인들이 뱃길로 중국에 올 때 지름길로 통과할 수밖에 없는 좁은 해로였다. 당연히 그곳은 고무, 차 등 교역과 식량, 유흥 등의 공급의 중심지였다. 이 영화에서 이곳은 마치 영화 <카사블랑카>의 그곳처럼 중립지대로 표현되길 바랐다. 붉은 계열의 원색과 회색, 빛바랜 녹색이 주로 배경을 이루고 가구는 감정색과 붉은 원색으로 했다. 영화 속의 첫인상은 한 뚱뚱한 재즈 여가수가 <카사블랑카>의 주제곡 를 부르는 모습이다. 그녀가 연이어 신나게 스티비 원더의 를 부를 때 이들의 흥을 깨며 들이닥치는 게 주인공의 부하들 SI 요원들인 것이다.

기자들도 많이 왔고 수십명에 이르는 외국인 엑스트라까지 겹쳐 현장은 혼잡스러웠지만 라이브 스타일의 연주 두곡을 틀자 현장은 금방 집중이 되었다. 우선 직접 가수로 출연한 재즈가수 김현정씨가 본인이 녹음한 노래를 부르자 기분이 붕 떴고 모두 언제 피곤했냐는 듯이 흥에 겨워졌다. 음악이 나오자 젊은 보조출연자들도 촬영을 잊고 자연스러워졌고 그 사이 카메라 두대는 이들을 몰래 카메라처럼 스케치했다.▶ 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1)

▶ 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2)

▶ 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