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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개발의 기억
2002-07-03

조선희의 이창

솔직히 말해서 나는 월드컵 스페인전 이후부터 마음이 불편해졌다. 환호작약도 이 정도에서 그치면 좋겠다 싶었다. 독일전에서 패했을 때 그래서 담담했고 편안했다. 한국사회가 엔도르핀으로 목욕하는 건 좋은데 과도한 긴장과 흥분으로 고혈압 걸릴까봐 불안했던 것 같다. 졸지에 너무 심하게 행복한 일이 생기면 평정심을 잃고 뒷수습이 안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나 역시 이번 월드컵을 100% 즐겼다. 나 개인의 페스티벌이기도 했고 우리 가족의 페스티벌이기도 했다. 초등학생인 두딸들이 ‘대∼한민국’ 하면서 소리를 빽빽 질러대고 차창 밖으로 태극기를 휘두르며 발을 동동 구를 때 나는 우리 딸 세대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성장기를 지배했던 저개발의 기억을 떠올렸다.

고교 시절이었던 70년대 후반, 신문에서 ‘어글리 코리언’이라는 기획시리즈를 읽은 기억이 난다. 미국과 남미로 이민 떠나는 것이 대유행이었던 시절인데, 현지에서 한국 이민들이 얼마나 처참한 생활을 하는가를 전했다. LA에서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는 전직 대학교수의 사례도 있었는데, 아직 십대였던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이른바 정체성에 큰 상처를 입었다. 내가 소속한 곳이 후미지고 칙칙한 변방 중의 변방이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지금도 ‘어글리 코리언’이라는 시리즈제목과 ‘마천루의 창을 닦아라’는 꼭지명이 기억날까.

월드컵이 열리는 동안, 아이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또한 한국에 태어났다는 게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월드컵이 아니라도, 이미 한국인이 부끄럽고 창피한 신분은 아닌 시대가 되었다. 삼성전자가 소니보다 시가총액이 크다는 뉴스는 아직도 내겐 잘 믿겨지지 않아서 유언비어처럼 느껴진다.

월드컵 신드롬에는 저개발 시대의 억압과 분노와 환멸을 날려버리는 자유와 해방의 판타지가 있다. 근면성실이 최대의 미덕이고 놀기 좋아하는 건 수치스런 악덕이었던 시대(정부와 기업주가 조장한 이데올로기였겠지만), 오락을 즐기고 유쾌하게 사는 것이 역사에 죄를 짓는 게 아닌가 자기검열하던 시대(군사정권 아래 굴종했던 지식인들의 자의식이었겠지만), 프로야구를 보고 컬러TV를 시청하면서 도덕적 갈등을 느꼈던 시대(3S정책에 대한 피해의식이었겠지만), 태극기로 앞치마나 머릿수건이나 브래지어를 한다면 돌팔매를 맞아도 쌌던 시대(국기와 더불어 국가와 정부와 권력을 신성불가침의 어떤 것으로 만드는 이미지 조작의 결과였겠지만), 공부를 최고로 치고 운동은 학습지진아들의 패자부활전 취급했던 시대(공부 잘해서 판검사되는 것이 최고의 인생이라 여겼던 것도 궁핍한 사회의 상상력이었겠지만)에 마침표를 찍는 행사처럼 느껴졌다. 다시 말해 저개발의 딱지를 떼는 통과의례로 보였다.

어느 주말, 오색기가 나부끼고 풍악이 울리는 월드컵공원에 놀러갔다. 난지도공원 진입로를 올라가는데 바로 내 앞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트럭 한대가 서고 남자 둘이 내리더니 아줌마 둘이 들고 가던 아이스박스를 빼앗아 트럭 짐칸에 실었다. ‘아이스케키’ 박스였던 모양인데 아줌마들은 트럭에 매달리면서 “그거 열지도 않았어요”라고 애원했다. 남자가 관리사무소에서 찾아가라면서 트럭에 올라타자 아줌마는 다급하게 “관리사무소가 어딘데요”라고 소리쳤다. 남자가 팔을 들어 “저쪽에” 하는데 트럭은 냉큼 떠나버렸다. 월드컵 시즌 한가운데서 문득 저개발의 기억을 떠올리는 소동이었다. 나는 잔뜩 약이 올라서 중얼거렸다. ‘물건을 빼앗긴 사람이 다급하지, 압수한 사람이 뭐가 급하다고 그렇게 도망치는 거야. 관리사무소의 전화번호와 약도 그리고 쓰레기 배출문제에 민감한 난지도 공원 관리당국의 입장을 적은 안내문 같은걸 준비했다가 건네면 얼마나 좋아.’

한국사회에 남아 있는 온갖 저개발 시대의 사고방식이나 습관들과 함께 저런 매너도 사라져줬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해서 세월이 흐른 뒤 언젠가는 이 월드컵의 열광조차도 저개발의 끝자락으로 기억되는 날이 오겠지.

덧붙임 <저개발의 기억>은 쿠바 감독 토마스 쿠티에레즈 알레아의 68년작 영화의 제목이다. 카리브해의 파리라고 불리던, 미제물건들과 마약이 풍미하던 시절의 아바나를 그리워하는 주인공 남자는 ‘쿠바적’인 많은 것들을 저개발의 표상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자기 땅에서 정신적으로 유배돼 있는 주인공의 정체성이야말로 저개발의 흔적으로 보였다. 피부색이 창피하고, 국적이 창피하고, 문화가 창피하고, 스스로 어글리하다고 창피해하는 것, 그 정신분열이야말로 저개발의 증후인 것이다.조선희 / 전 <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