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News > 해외뉴스
베니스영화제에서 날아온 일주일 간의 영화일기 [2]
2002-09-09

9월1일 일요일

<틸다 스윈튼-러브팩토리>

<틸다 스윈튼>-감독 루카과다니노산 마르코 부두에 묶여서 출렁이는 곤돌라들을 볼 때마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들이 가지런히 벗어놓은 수십 켤레의 구두가 연상돼 실없는 웃음이 삐져 나온다. 오늘은 매년 베니스 곤돌라 축제가 열리는 9월의 첫 일요일. 지난밤 심야영화의 숙취에서 벗어나지 못해 게으른 오전을 보내다가는 자칫 베니스 본토에 발이 묶여 오후를 낭비할 수 있는 하루다. 리도 섬으로 가는 일부 수상버스- 베니스에서는 보트를 버스라고 부르고, 보통 버스는 오토버스라고 수식해 부른다- 가 곤돌라 경주가 벌어지는 시간에는 끊기기 때문이다. 오늘은 카지노 1층의 살라 페를라 극장에서 ‘작은 영화’들을 양껏 볼 수 있는 날. 퀘이 형제의 애니메이션 컬렉션과 CF, 왕가위의 CF와 메이킹 필름으로 오전을 보내고 마침 한 묶음으로 상영되는 다큐멘터리 <틸다 스윈튼-러브 팩토리>, <장밋빛 손길로 어루만진 새벽-테렌스 맬릭에 관하여>(부문 새로운 영역 | 감독 루카 과다니노(<틸다 스윈튼…>) 루치아노 바르칼로리 외(<장밋빛 손길로…>))로 좋아하는 배우와 감독에게 팬의 도리를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상영이 지연돼 하염없이 길어진 줄. 항의의 야유에 동참하려고 목청을 돋우는데 낯익은 긴 머리 미인이 배낭을 흔들며 스쳐간다. 이럴 수가, 줄리 델피! 어느 신문에서도 델피가 리도에 온다는 뉴스는 없었으니 그저 영화를 보러온 걸까. 그녀는 미행(微行)에 나선 스타가 아니라, <비포 선 라이즈>의 소녀가 비엔나를 거쳐 슬쩍 리도 섬에 들른 듯 자연스러웠다. <올란도>에서 자웅동체의 매혹을 보여주었고 일찍이 데릭 저먼 감독의 마돈나상이었던 배우 틸다 스윈튼은 검은 슬랙스 정장에 짧은 머리로 나타나 은어처럼 긴 손을 환호하는 객석을 향해 흔들었다. 그리고 스크린 속의 그녀는 사랑에 관한 잠언으로 오직 영화에 점령당한 관객의 머리를 잠시 쉬게 했다. “고독을 최악의 사태라고 믿는 서구사회는 고독에 대한 공포로 소비문화를 지탱한다. 그러나 사랑은 각자의 고독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다. 이 사회는 진정한 감정은 허락지 않으면서 반면 지독히 센티멘털한 기묘한 사회다. 우리는 그저 누군가와 사랑 안에 거하는 것(be in love with)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는 자(lover)가 돼야 한다.” 아, 물론 악명높은 은둔자 테렌스 맬릭 감독은 은막 안이고 밖이고 나타나주지 않았다. 9월2일 월요일모든 게 햇빛, 저 따가운 햇빛 때문이다. 귀에 선 외국어와 때로 보람없는 영화 사냥, 올 여름 따라 유난히 극성맞다는 베니스의 모기떼와 싸우다 탈진한 밤이면 염세주의자가 되었다가도, 비취색 바다와 나무와 석벽이 연금술사의 손끝에서 떨어지는 듯한 햇살을 받아 감당할 수 없이 빛나면 늘어졌던 심장에서 다시 어쩔 수 없는 생기와 허기가 꿈틀거린다. 그리고 다시 몸을 극장 앞의 줄에 끼워넣는다. 취재진들을 위한 공간과 상영관이 들어선 카지노 앞 광장은 노천 카페들이 틀어놓은 음악으로 흥청거린다. 무슨 이유에선지 선곡은 한결같이 듀란듀란이니 벤 헤일런이니 하는 1980년대 팝이라 듣고 있자면 타임머신 멀미가 난다. 그런데 <파 프롬 헤븐>(Far from Heaven | 부문 베네치아59 경쟁 | 감독 토드 헤인즈 | 출연 줄리언 무어, 데니스 퀘이드)은 타임머신의 시계를 30년쯤 더 앞으로 돌려놓았다. 멋부린 글씨체의 오프닝 자막과 단풍나무에서 하강하는 카메라의 첫 동작부터, 아니 제목부터 <파 프롬 헤븐>은 더글러스 서크의 <천국이 허락하는 모든 것>의 부활임을 숨기지 않는다. 줄리언 무어가 연기하는 코네티컷의 캐시 휘태커는 온 공동체가 모델로 삼는 모범 주부. 그러나 야근하는 남편의 간식을 들고 간 사무실에서 다른 남자와 안고 있는 남편을 본 날부터 캐시의 아늑한 인형의 집은 무너져내린다. 캐시는 찍어붙인 듯한 미소를 띠고 부서진 세계를 지탱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고통 중에 눈뜬 흑인 정원사 레이몬드와의 사랑에- 남편을 포함한- 이웃이 돌을 던짐으로써 시련은 악화된다. 현재 미국사회에도 온존하는 인종, 계급, 성적 지향 취향의 억압을 공격하기 위해 <파 프롬 헤븐>은 서크의 멜로드라마를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세계로 투신한다. 적어도 토드 헤인즈와 줄리언 무어는 천국이 그들에게 가장 잘하도록 허락한 일을 완수했다. 9월3일 화요일영화제라 하면 자동으로 ‘영화예술’을 떠올리는 것이 오래된 습관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영화제는 저잣거리에서 싹튼 집단 체험으로서 영화의 본성을 기념하고 만끽하는 잔치다. 어떤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홈시어터도 그 카니발을 대체할 수 없다. 영화축제가 사람들을 모으고 흥분시키기 위해서는 영화스타 못지않게 스타영화도 필요한 법.

그런 맥락에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장 뤽 고다르, 클레어 드니, 이스트반 자보, 마이크 피기스 등 8인의 유명 감독을 소집한 옴니버스 프로젝트 <텐 미니츠 올더-첼로>(Ten Minutes Older-The Cello | 부문 비경쟁)는, 9·11 사태의 메아리를 11명의 감독이 기록한 옴니버스 과 더불어 이번 베니스영화제에서 ‘발라드 히트 컴필레이션’에 해당하는 메뉴다. 칸영화제에서 공개된 <텐 미니츠-트럼펫>을 잇는 프로젝트인 <텐 미니츠 올더-첼로>는 시간에 대한 명상을 계속한다. <리틀 부다>의 여음을 담은 베르톨루치의 에피소드와 사랑과 침묵, 젊음과 역사, 영화의 마지막 순간을 기존 영화의 이미지를 조합해 열방의 주먹처럼, 열방의 총탄처럼 내지른 장 뤽 고다르 에피소드에 대한 반응이 역시나 가장 기운차다. 9월4일 수요일<푸른 연>의 티엔주앙주앙 감독이 10년 만에 연출한 <작은 마을의 봄> 기자 시사에서 정전사태가 빚어졌다. 영문 자막이 중단되는 사고까지 겹쳐 결국 116분의 영화를 140여분에 걸쳐 보는 사태가 빚어졌다. 게다가 간신히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계속 야간 정전에 관한 대사를 주고받아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마터면 음모론자가 될 뻔했다. 베니스영화제의 영어 자막은 큼직한 이탈리아어 자막에 스크린을 내주고 은막 아래의 가느다란 전광판에 뜬다. 자막을 읽자면 영화가 안중에 없어지고 뒤쪽 좌석에 앉을라치면 시력 검사표 아랫줄을 읽는 꼴이다.언어로 인한 사고다발 지역은 역시 기자회견장. 베네치아59 경쟁작인 대만영화 <좋은 시절>의 기자회견은 영어, 이탈리아어 질문을 전하는 중국어 통역이 차질을 빚고 일본 프로듀서 우에다 마코토의 통역자가 프랑스어를 쓰는 통에 그야말로 바벨탑의 혼돈이 벌어졌다. 종종 영화보다 해몽이 더 유창한 서양의 감독들과 반대로, 작품을 말로 해부하는 일을 즐기지 않는 아시아 감독들의 성향도 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가 유럽/미주영화에 비해 활발한 문답의 기회를 적게 누리는 원인이다. 자정을 알리는 산 마르코 대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숙소로 종종걸음치는데 한쌍의 청년들이 다가와 홍상수 감독의 근황을 묻는다. <생활의 발견>의 DVD까지 구해 보았다면서. 김기덕, 홍상수 감독 등의 새 영화를 궁금해하는 이국 관객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 얼마나 부실한 안내자인지 절감한다. 홍상수 감독의 팬과 안녕하고 호텔로 돌아오니 프론트의 당직 아저씨가 추천작을 골라달라고 청한다.리도 섬의 페스티벌 상영작 일부는 베니스 일반 극장에서도 상영된다. 이탈리아는 극장 더빙이 원칙이지만 더빙할 여유가 없는 영화제 상영작은 자막판으로 상영하는 까닭에 이탈리아영화 팬에게는 탐나는 기회라고. 신중히 권해야겠다. 영화의 일생이 점점 짧아지는 지금, ‘먼저 본’ 사람에겐 언제나 약간의 책임이 있는 걸까. 베니스=김혜리 vermeer@hani.co.kr디자인 권치욱 dorre@hani.co.kr·취재협조 윤성봉 ▶ 베니스영화제에서 날아온 일주일 간의 영화일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