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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 야구단> 사운드 맡은 ‘국보급’ 사운드 수퍼바이저 김석원 스토리 (2)
2002-10-04

제3의 대사, 소리를 쓰다듬는 남자

예민한 더듬이, 트랙을 더듬다

유년 시절부터 그는 ‘소리’에 관한 더듬이가 남달랐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악보를 보면 노래를 부를 줄 알았고, 노래를 들으면 악보에 옮겨 적을 줄 알았다”. 물론 누구도 그를 신동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그 역시 “남들도 그 정도는 다들 하는 줄 알았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설계도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마냥 좋아서” 건축가를 꿈꿨던 시절, 그래서 스무살 언저리에 한양대 공과대학에 진학하는 수순을 밟았던 그는 대학연합노래모임 쌍투스에 몸담으면서 숨겨둔 장기를 발휘한다. 통기타 연주와 보컬을 도맡게 되고 이때부터 서클룸에서 기거하다시피 하며 악기 연주와 편곡에 빠져들었다.

그때만 해도 ‘우연한’ 곁눈질이라고 여겼다. ‘예정된’ 길이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그런 그가 사운드 레코딩과 조우한 것은 대학 졸업 뒤 김도향씨가 대표로 있던 서울오디오에 입사하면서다. 명상음악가로 알려진 김씨는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등의 히트곡을 부르기도 했으며, 당시에는 “맛동산 먹고 즐거운 파티!”, “12시에 만나∼요 브라보콘” 등 CM송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광고계의 주목을 받고 있던 인물. 그는 “작업실 청소를 도맡으며 간간이 CM송도 부르던” 어느 날 김씨로부터 “음악을 아니까 좋은 사운드맨이 될 수 있겠다”며 엔지니어링을 공부해보라는 제안을 받아든다. 공업고등학교를 나와서 몇년 동안 견습생활을 해낸 다른 동료들에 비해선 한참 늦깎이라 결심이 쉽지는 않았지만, 김씨의 줄기찬 꼬드김 끝에 그는 트랙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김씨의 후원 아래 1년에 2차례씩 미국의 녹음실을 둘러볼 특혜를 얻기도 했던 그는 광고음악을 레코딩하며 테크닉을 갈고 닦았다. 당시 미국의 음대에서 교재로 사용하던 개론서도 구해서 틈틈이 독파해나갔다. “뒤돌아보지 않고 한우물 팠던” 6년이었다. 디지털음향에 대한 관심이 무르익었을 1991년 무렵, 그는 사촌형을 꼬셔 자금을 마련하고 지하 변전실 30평을 얻어 리드사운드를 차린다. 초라한 외형이었지만, 엄연한 독립이었다.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광고계에서 명성을 알렸던 터라 개시(開始)하자마자 성시(盛市)를 이뤘다. 물량은 끊이질 않았고 3년 만에 100평의 공간을 더 마련할 정도로 규모를 키웠다.

그의 애초 구상은 음반기획까지 ‘사운드’와 관련된 작업은 모두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영화작업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도 이 무렵이다. 홀로 영화진흥공사 녹음실을 들락거리면서 귀동냥을 구했지만, 벽은 의외로 두터웠다. 정작 믹싱작업시엔 “네가 영화를 아느냐”며 따돌렸다. 급기야 영화까지 촉수를 뻗친 그가 마음에 안 들었던지 대표이던 사촌형과의 다툼도 심해졌다. 결국, 95년 블루캡이라는 자신의 회사를 따로 차려서 나와야 했다. 하지만 “영화는 문외한”이었던 그는 앞길이 막막했다. 그때 그가 떠올린 유일한 인물은 할리우드에서 사운드 슈퍼바이저로 활동하고 있던 존 모리스. 그는 조언을 구하기 위해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동년배지만, 존 모리스는 그에겐 ‘사부’와 같은 존재다. <레옹>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엑스맨> 등의 사운드 작업을 맡은 존 모리스와 안면을 텄던 것은 1993년 대전 엑스포 행사. 당시 전시 영상물의 사운드 책임자였던 존 모리스는 고가의 스크린 사운드 장비를 갖고 있던 리드사운드를 파트너로 택했고, 김석원에게 일부 영상물의 대사녹음을 의뢰했다. 하지만 ‘나홀로 작업’이 기본인 김석원은 주어진 1주일 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사운드 편집은 물론이고 믹싱작업까지 완전히 끝내놨다. 따지고 보면 원치 않은 완성품을 만들어놓아 망쳐놓은 셈. 그러나 결과물을 본 존 모리스는 화를 내긴커녕 술자리에 그를 불러냈다. “내가 할 일을 다해버리면 어떡하냐”는 농담으로 인사를 건넸을 정도로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얻어들었던 것은 격려뿐이었다. 소니픽처스를 찾았을 때 존 모리스는 “이 사람이 내가 말한 슈퍼맨이야”라고 소개하며 환대했지만, “너 정도면 충분하다. 프로세싱이 다르긴 하지만 사운드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라고만 했다. 동료의 소개로 알게 된 김상진 감독의 <돈을 갖고 튀어라>를 덥석 문 것도 더이상 앞뒤 잴 여유가 없어서였다. 덤벼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1995년 12월 명보극장. 블루캡의 첫 번째 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의 시사회가 끝난 뒤, 영화관계자들은 처음 맛본 디지털 사운드에 대해 만족스러워했다. 이은 감독은 “백그라운드 노이즈가 자연스럽게 담긴 한국영화는 처음이었다”고, 동시녹음 기사 이승철씨는 “입체적인 사운드의 도래를 알린 영화였다”고 평한다.

“소리는 내는 것이 아니라 빚는 것”

광고·음반부문과 달리 영화계에선 여전히 마그네틱의 자장을 이용해 소리를 쓸어담던 아날로그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녹음과정에서 여러 번 복잡한 공정을 거쳐야 했고, 비용문제로 테이프마저 지우고 썼던 일이 빈번했으니 디테일한 사운드 작업은 불가능한 일. 샘플링한 데이터를 가지고서 자유자재로 변형작업이 가능했던 디지털 작업 방식이야말로 영화계로선 “자다가도 눈이 번쩍 띌 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가 여기서 멈출 리 없었다. <돈을 갖고 튀어라>는 “디지털 작업 방식의 장점을 온전히 전달해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수입원이었던 광고에서 영화로 무게중심을 이동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동시에 1인 플레이의 한계를 느낀다. 영화사운드의 경우, 각 세부 분야별로 전문가를 키우지 않는 한 만족스런 작품을 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그래서 <접속> 때부터 앰비언스 작업을 김창섭 팀장에게 완전히 맡겼다. 물론 모두에게 세분화할 만한 형편은 아니어서 일단은 겸업하는 형태로 시작했지만, 그는 <인샬라>부터 <연풍연가>까지 “장기적으로 전문인력을 키운다는 구상 아래 블루캡을 다지는 데 힘을 쏟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나. 사운드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쉬리>는 중압감이 더욱 컸다. 작업시간은 채 한달이 안 됐다. 더구나 제작사로부터 전달받은 영상은 순서편집은 물론이고, 오케이 컷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날것 그대로의 촬영분량이었다. 자신감이 솟아날 리 없었고,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일단 존 모리스를 찾아 태평양을 건넜다. 할리우드의 노련한 스탭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었을까. <쉬리>의 서두인 갈대밭 장면. 그는 전체적인 분위기만 내주면 되겠거니 싶어 “저건, 앰비언스”구나 했는데, 존 모리스는 실제 갈대를 흔들어 왼쪽, 오른쪽 채널 모두에 담았다. “어차피 다 묻힐 소린데… 왜 저러는 거지” 했지만 믹싱이 끝난 뒤 예상은 어긋났다. 바람에 서걱거리는 갈대밭의 느낌은 “존 모리스의 디테일한 폴리작업 때문이었음”을 뒤늦게 느낀다.

“소리는 내는 것이 아니라 빚는 것”이라는 원리를 깨친 이후부터 일사천리였다. 총격전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그저 사운드 이펙트로 처리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노리쇠가 전진, 후퇴하고, 탄피가 떨어지고, 총알이 어떤 재질에 가서 박히느냐는 것까지 계산에 넣어야 했다. 깨달음을 얻은 건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당시 제작실장이었던 이성훈 프로듀서는 “실감나는 총격전으로 변해 있는 <쉬리> 완성본을 보고서야 동시녹음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털어놓는다.

▶ <YMCA 야구단> 사운드 맡은 ‘국보급’ 사운드 수퍼바이저 김석원 스토리 (1)

▶ <YMCA 야구단> 사운드 맡은 ‘국보급’ 사운드 수퍼바이저 김석원 스토리 (2)

▶ <YMCA 야구단> 사운드 맡은 ‘국보급’ 사운드 수퍼바이저 김석원 스토리 (3)

▶ [김석원스토리] 블루캡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