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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사코의 <팔레스타인>
2002-10-05

정의의 이름으로 불의의 총탄을

만화를 펼치자마자 마구 튀어나오는 사람들, 똑바로 쳐다보기도 어려운 맹렬한 눈빛들,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욕설과 주장과 침의 파편들….이곳은 어디일까? 혹시 나도 모르게 아랍의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돼온 것은 아닐까? 영문은 알 수 없지만 나는 곧 이곳이 분주한 아랍의 시장이나 어수선한 선술집이라는 것만은 깨닫게 된다. 그리고 두꺼운 안경을 쓴 미국 청년이 내 손을 잡아끈다. 그 역시 내키지 않는 듯하지만 이곳에 찾아온 이상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CNN과 미국의 정보망이 빨아서 보여주는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진짜 피와 모래가 뒤섞여 있는 진흙탕 팔레스타인을.

1990년대 초, 인티파다(팔레스타인의 반이스라엘 무장봉기)의 첫 시기에 이루어진 방문의 기록을 담은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글논그림밭)은 여러모로 아트 슈피겔만의 <>를 잇는다. 사코는 슈피겔만이 그랬던 것처럼, 화려한 원색의 슈퍼 영웅들을 멀리 차버리고 오직 검은 잉크의 힘만을 믿고 묵묵하게 역사와 사실의 현장으로 들어간다. 슈피겔만이 나치가 유대인에게 가한 잔혹한 만행의 시간을 기록하였다면, 사코는 그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몰려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저지른 그릇된 보복의 이야기를 그린다.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저지른 그릇된 보복의 역사

우리는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만화 속에서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스터 키튼> <고르고 13>과 같은 픽션 속에서는 언제나 영웅이 등장하고, 우리는 그의 시선을 통해 선과 악을 판별한다. 악의 완전한 뿌리는 뽑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눈앞의 악을 응징하는 쾌감을 얻는다. <정치 9단>에서 분명히 느끼듯이, 논란의 여지가 분명한 주의와 주장도 주인공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통해 설파됨으로 인해 그 설득력을 더하고, 때론 그릇된 결론을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슈피겔만과 사코는 픽션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의 세계를 그린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몇 사람의 체험에 얽힌 이야기라는 것을, 그러므로 진실의 전부를 드러내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경고한다. 또한 슈피겔만이 아버지와의 껄끄러운 관계를 숨기지 않았듯이, 사코 역시 자신이 비겁하고 이기적인 소시민임을 감추지 않는다. 그는 얼마 전까지 유스호스텔들의 문란한 성생활에 동참했음을 이야기하고, 항상 자신의 몸을 먼저 챙기고 비겁한 행동을 저지르는 모습을 숨기지 않고, 이런 고생을 해서 그린 자신의 만화가 ‘떠주길’ 기대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사코보다도 용감하지 못하지만, 지구의 반대편에서 책장을 넘기는 일밖에 할 수 없는 몸이지만, 그래도 만화 속의 진실에 대해서는 눈감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은 곧 체험하게 된다. ‘시온주의’라는 명분으로 무책임하게 팔레스타인을 넘겨준 영국의 작태를, 유대인 정착민들이 군대의 암묵적 비호 아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저지르는 끔찍한 짓거리를, 이유없이 체포된 사람들이 고문과 협박으로 황폐화되어 가는 모습을, 10살도 안 된 아이들이 서로에 대한 적개심으로 병들어가고 있는 현장을….그것만큼 두려운 진실은, 하루 끼니를 잇는 것이 쉽지 않은 그들이 단지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해줄 것이라는 이유로 기자에게 내놓는 푸짐한 식사를 꾸역꾸역 먹고 있는 사코에게 공감하고 있는 우리다. 그것이 인간이다. 자신이 피해자일 때에는 자유와 권리를 찾기 위해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일을 벌이지만, 자신이 작은 권리를 얻었을 때에는 그것을 뺏기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수십배의 고통도 줄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인간은 이기적이지 않다’는 설교로 대학 초년생에게 사회 변혁의 당위성을 설교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있을까 생각한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그리고 서로가 공존해야만 더 크고 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이타성’, 혹은 ‘더 크고 현명한 이기성’ 역시 이러한 작고 사소한 이기성을 인정한 위에서 출발해야 한다.

문명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야만의 기록

사코는 성실하게 기록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설탕범벅의 차와 눈물 한 동이의 사연에 질려하면서도 꾸준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러나 그는 기록자로서가 아니라 만화가로서도 훌륭하다. 간략한 선으로 외형을 갖춘 인물들은 짧은 선의 반복되는 명암으로 훌륭한 질감의 사실성을 드러낸다. 가끔은 코와 입가 주름의 상세한 묘사 때문에 10살도 안 된 아이가 30대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코를 가급적 생략하고 주름을 없애 ‘뽀샤샤’의 타협으로 들어간 만화의 주인공과는 뚜렷한 거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극적인 효과를 위한 어안렌즈의 묘사가 약간은 상투적으로 보이지만, 감옥의 체험을 점점 좁아지는 칸의 연속으로 재현한 부분은 간략한 장치로 이야기의 느낌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솜씨를 느끼게 한다.

조 사코는 여전히 기록하고, 또, 그리고 있으리라. 그의 툭 튀어나온 입술은 지금도 툴툴대고 있겠지만, 두꺼운 안경 속의 눈알은 여전히 또렷하게 보고 있을 것이다. 이 문명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야만을, 정의의 이름으로 내리꽂히는 불의의 총탄을…. 그가 지난 2001년에 보스니아 내전의 현장을 그린 <고라즈드: 안전지대>로 윌 아이즈너 상을 수상한 것은 그 증거의 하나다.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