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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홍련><살인의추억> 등 프로덕션디자인의 매력 <6>
2002-12-13

프레임을 빚는 마법의 손

<밑줄 긋는 남자>(가제)로맨스의 여왕님이 계시는 곳

어떤 영화‥‥‥‥‥‥‥‥

“아직도 제가 누군지 모르시겠나요” <밑줄 긋는 남자>(가제)는 ‘숨바꼭질’ 같은 영화다. 영화 속 술래는 눈앞의 사랑을 번번이 놓치는 현채(배두나). 단짝친구를 졸라 소개팅을 따내지만 ‘취미가 축구요, 특기가 비어 구사’인 그녀는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친구들에게 곰탱이라 놀림을 받는 그녀. 이젠 겨울잠 자는 일만 남았구나 하고 푸념하고 있을 무렵 그녀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도서관에서 빌린 화집 속에 “당신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귀여운 곰같이 사랑스럽답니다”라는 메모가 끼워져 있는 것. 책갈피에 살포시 끼워놓은 ‘그’의 고백은 또 다른 화집으로 옮겨서 계속되고, 현채는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왕자님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화집을 단서로 백방으로 수소문한다. 그녀의 로맨스는 과연 이뤄질 것인가.

이미지 컨셉‥‥‥‥‥‥‥‥

<밑줄 긋는 남자>의 시나리오를 받아들고서 박현주 미술감독이 떠올린 것은 특정 이미지라기보다는 “오렌지빛 도는 핑크”였다. 그는 공간의 색감은 물론이고 캐릭터의 의상, 소품까지도 “파스텔톤의 화사한 느낌으로 가자”고 맘먹었다. 하지만 실행을 앞두고서 구상은 거듭 고민의 벽에 부딪혔다. “리얼리티를 최고의 덕목으로 꼽는” 한국의 풍토에서 이는 자칫 잘못하면 “지저분하고 유치하다”고 욕먹을 수도 있기 때문. 그의 설명에 따르자면, “같은 아시아지만 한국, 일본, 중국영화의 화면의 톤은 제각각 다르다”. 일본영화의 경우 한번 탈색된 듯한 느낌을 주어 서정성을 자극한다면 중국은 과감한 컬러를 사용하여 효과를 극대화한다. 그에 비해 한국은 현실의 색감을 어떻게 하면 충실히 재현하느냐가 관건이다. 그렇다고 이를 염두에 두고서 밋밋한 현실의 색감을 끌어올 순 없었다. 위험부담을 의식해서 “젊은 세대의 발랄한 감수성을 겨냥한 통통 튀는 영화”라는 애초의 컨셉을 뒤흔들고 싶진 않았다.

결국 용이 감독과 상의 끝에 절충한 것이 “리얼리티를 무시하지 않되, 현채의 상상 장면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덧붙여 제작진의 컨셉 중 눈에 띄는 것은 19세기 영국의 풍경화가였던 윌리엄 멀레디의 <소네트>를 비롯해서 주요 장면 도입부에 인서트로 보여지는 낭만적인 분위기의 유화들. 시나리오에선 러브레터를 전달하기 위한 설정처럼만 보이지만, 지난한 역추적의 과정을 통해 발견한 화집의 도판들은 현채의 상상과 현실 사이에 가교 같은, 즉 “그가 누구일까”하는 상상을 관객에게 전도하는 역할까지 떠맡는다.

콘티 & 스케치‥‥‥‥‥‥‥‥

헌팅이 끝난 다음 스탭들과 보름 정도 콘티작업이 끝난 이후 용 감독은 이를 다시 애니메틱 콘티로 다시 만들었다. 용 감독이 시도한 것은 배우들의 리딩을 녹음해서 이를 영상으로 만든 콘티에 입히는 식의 초보적인 수준. 하지만 그렇다고 <패닉 룸>처럼 카메라의 동선이나 조명까지도 리허설이 가능한 100% 3D 형태를 요구할 순 없었다. 대신 용 감독은 개인 PC를 통해서 촬영 전 편집, 대사 타이밍 등을 대략 조절할 수 있도록 두달 동안 동영상 콘티를 만들었다. 디테일한 작업은 되지 못했지만, 크랭크인 전 현장 가이드로는 유용했다고.

공간의 이미지‥‥‥‥‥‥‥‥

현채의 방은 다른 공간과 뚜렷하게 차별화된다. 그곳에서 현채의 상상은 훼손되지도, 무시되지도 않는다. 그녀의 로맨스에 대한 환상을 매섭게 공격하는 바깥 현실과는 유리되어 있는 ‘자기만의 방’이다. 용이 감독은 “귀여운 여자아이의 로맨틱한 상상이 한껏 증폭되는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 덧붙여 박현주 미술감독은 “현채의 방을 캐릭터를 좀더 시각화하기 위한 공간으로 꾸밀” 예정이다. “어머, 저 남자가 나를 사랑하나봐”라고 믿는 로맨스의 여왕인 현채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기 위해서 박현주 미술감독이 참고한 것은 “정신적인 성장이 멈춰져 버린 듯한” 유아의 방이다.

방 안에서도 분홍색 슬립에 털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그녀를 위해 캐릭터가 곳곳에 박힌 엘로우 벽지에 핑크 침대보 등 원색적인 색감을 공간 구석구석에 세팅할 생각이다. 의외의 소품 또한 그녀의 취향을 강조하기 위해 곳곳에 자리한다. 조그만 모양의 어항에는 화려한 열대어 대신 해파리가, 기다란 꽃병에는 양파가 꽂혀 있는 등 일상적인 소품을 비틀어 활용할 계획.

헌팅 & 세트‥‥‥‥‥‥‥‥

영화에서 도서관은 가장 빈번히 등장한다. 하지만 아무 곳이나 섭외할 순 없었다. 일상적인 현실 간이지만 화집을 빌리기 위해 비밀의 존재인 ‘그’가 오가는 곳인 만큼 따뜻한 느낌을 줘야 하는 것. 미술부쪽에서 내건 조건은 두 가지. 서가가 평범한 갈색 재질이어선 안 된다는 것, 또 하나는 창문이 많아야 한다는 것. 여기에 용이 감독은 서가의 규모가 커서 앵글의 조망이 다양한 도서관을 원했다. 하지만 이같은 조건을 만족시켜줄 서가가 어디 있을까. 전국의 모든 대학 도서관은 물론이고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도서관까지 이잡듯 뒤진 결과 겨우 한곳을 발견했고, 낙점된 부산 신라대를 폐쇄한 뒤 일주일 동안 바삐 찍었다. 로케이션 장면의 촬영은 대부분 마무리된 상황. 12월 말부터서 현채의 집장면을 포함한 세트로 이동한다. 제작진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부분은 짧은 인서트 상상 부분. 실제 공간의 특징적인 이미지를 따와서 배경을 제작하되 인물과 함께 어울리는 실제 프레임 내에선 해체하여 배치한다.

말로 설명하기 쉽지 않지만, 옛날 사진관의 카메라와 피사체 그리고 배경과 소품의 관계를 연상하면 된다. 예를 들면 가을 분위기 물씬 나는 숲속 벤치의 2차원 그림 배경에 낙엽이 떨어진 실제 벤치에 앉아 사진 찍는 이들을 연상하면 된다. 실제 영화 속 장면들은 연극이나 오페라의 무대 배치의 방법을 빌려와 낭만적인 분위기를 살린다는 복안이다. 촬영시 카메라 앞에 또 하나의 프레임을 만들어 입체감을 높이거나 핀 조명처럼 공간을 만들어 인물에게 집중하게 하는 식의 라이팅을 최대한 활용할 예정이다.

영화의 한 장면‥‥‥‥‥‥‥‥

촬영은 60% 정도 진행됐지만, 세트 장면을 포함한 주요 장면들은 연말에 몰려 있다. 지금까지 촬영한 분량 중에선 거제 옥포만의 유원지가 미술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다. <정글쥬스>와 드라마 <순수의 시대>에서도 로케이션 장소로 사용됐던 이곳은 거의 폐허나 다름없는 곳. 극중 현재의 모습과 달리 영화 속 비밀이기도 한 7년 전 과거 시점의 화려했던 놀이공원을 재현하기 위해 전면 데커레이션 작업을 진행했다. 그래도 아이디어까지 내놓아야 하는 앞으로의 세트 작업에 비하면 호사.

프로덕션디자이너 박현주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박현주씨는 미대 입시를 앞둔 고3 수험생이었다. 전공은 서양화. 학원장의 강요에 의한 선택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학예회 연극의 소품 담당을 도맡았을 정도로 재주가 있었던 그의 손이 근질거릴만도 한 일. “몸 놀려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재밌었다”는 그의 몸은 이젤 앞에 있지만, 눈은 항상 옆방의 조소과에 향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난삼아 해보라는 친구들 앞에서 보통 솜씨 이상의 비너스를 만들어냈고 원장을 놀라게 한 다음에서야 전공을 조소로 바꿨다.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해서 4년 동안 ‘노가다’를 즐긴 다음 그가 들어간 곳은 광고계. 졸업 뒤, 3년 동안 전시조형물을 만들고 민족가극 <금강>의 무대작업 아르바이트를 하다 아는 선배의 소개로 입문했다. 세트 만드느라 밤샘을 밥먹듯이 했지만 다년간의 ‘노가다’로 다져진 체력은 지금도 여전하다고. 98년부터선 광고 미술 디렉팅 일을 시작했고, 지금의 용이 감독도 그때 만나서 줄곧 함께 작업했다. 크레딧에 끼진 못했지만, <후아유>는 그가 처음 맡은 영화. 사수이기도 했던 미술감독이 개인적인 사정상 도중 하차하게 되면서 대행 역할을 맡았다. “정작 시사회에선 얼굴을 들지도 못했다”는 그는 “그래도 영화는 한편 하고 나면 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할리우드에서 작업하는 재미동포 이지호 감독의 신작이 차기작이 될 것 같다고. 언젠가 자신의 능력을 120% 발휘하도록 채찍질해줄 감독과 함께 <물랑루즈>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게 그의 꿈.글 이영진 anti@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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