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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홍련><살인의추억> 등 프로덕션디자인의 매력 <4>
2002-12-13

프레임을 빚는 마법의 손

<지구를 지켜라!>비틀리고, 휘고, 엇물리고

어떤 영화‥‥‥‥‥‥‥‥

지구가 크나큰 위험에 처했다. 개기월식 때면 외계인들은 지구를 파괴할 것이다. 오직 한 사람, 병구만이 이 사실을 알고 지구를 수호하려 한다. 이를 위해 외계인으로 추정되는 강 사장을 납치해 잔인하게 고문하는 병구는 과대망상 환자이거나 편집광처럼 보인다. 강 사장은 병구가 예전에 다니던 공장의 사장으로, 병구의 모가지를 자른 장본인이며, 병구 어머니를 혼수상태에 이르게 한 주범이기도 하다. 병구가 마약 중독자라는 점으로 짐작건대 외계인과 지구파괴 음모에 관한 그의 생각은 망상의 발로처럼 보이지만, 그의 논리는 꽤나 정연하고 구체적이다. 이처럼 <지구를 지켜라!>는 납치한 사람과 납치당한 사람의 대결에 관한 이야기이며 망상과 현실의 괴리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실, 장준환 감독의 야심은 이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의 화살촉이 노리는 과녁판에는 인류의 역사에서부터 지금의 사회제도까지를 포함하는 ‘전 지구적’ 내용이 들어가 있다.

이미지 컨셉‥‥‥‥‥‥‥‥

장준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습도와 더위, 그리고 콘트라스트를 화면 안에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전개되는 병구네 오두막의 지하실은 어두컴컴하며 음습한 데 반해, 오두막의 외부는 신록의 산뜻한 녹색을 보여주는 등 전반적으로 강한 대비를 보여주겠다는 의도. <양들의 침묵>의 지하실 분위기나 <쎄븐>의 강한 콘트라스트 등은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던 이미지.

후반부 지구의 역사를 보여주는 부분에선 <메트로폴리스>의 실제 화면이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패러디 장면도 오마주 차원에서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지구를 지켜라!>는 워낙 극적 반전이 많고 공간과 시간을 마구 넘나드는 작품이다보니 영향을 끼친 원형적 이미지 또한 다양하다. 때문에 프로덕션디자인에서 의상까지 비주얼 전반에 관한 책임을 맡았던 장근영, 김경희 미술감독은 “워낙 많은 이미지들이 종합돼 몇 가지를 짚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공간의 이미지‥‥‥‥‥‥‥‥

장근영, 김경희 미술감독이 공간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점은 “병구를 포함한 각각의 캐릭터가 공간에서도 드러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장준환 감독과 콘티 작업부터 함께했기 때문에 충분한 고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가장 신경을 쓴 공간은 대부분의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는 병구의 집, 그중에서도 지하실이었다. 고문실이 있는 비밀공간, 외계인에 대처하기 위한 병구의 연구실, 마네킹을 제작하는 작업실 등 3개로 나뉜 지하공간은 병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편집광적이며 정신병자 같지만, 그럼에도 열정적인 독학으로 외계인과의 전투를 준비해온 병구의 흔적을 드러내기 위해 모든 벽면은 실험도구, 고문기구, 무기, 온갖 기괴스런 표본, 연구 자료 등으로 꽉 채워졌다. 세트, 소품, 의상 등 각각의 요소들은 ‘의도적 조악함’이라는 차원에서 설계됐다. 병구의 캐릭터로 봤을 때 뭔가 어설프지만 정교하기도 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두명의 미술감독은 이 영화를 준비하는 동안, 스스로 병구의 입장이 돼, 아니 병구처럼 살면서 공간을 고민해야 했다. 결과물은 그야말로 ‘병구스럽다’. 강 사장을 고문할 때 사용한 의자는 이발소 의자에 변기를 바닥에 붙이고 치과 장비 같은 기구를 붙인 희한한 모양새였고, 외계인의 강력한 텔레파시 공격을 막는다며 병구와 순이가 늘 쓰고 다니는 헬멧에는 라이트, 배터리, 안테나 등을 달았다.

김경희씨는 “고문기구며 무기며 모든 소품은 새 것을 구입해 부순 뒤, 여러 개를 뒤섞어 재조합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설명한다. 또 세트 제작자가 “여기는 뭐 똑바로 된 게 하나도 없어”라고 불만 아닌 불만을 토로했을 정도로 모든 공간과 소품은 뭔가 비뚤어지고 휘고 엇물리는 느낌으로 디자인됐다. 때문에 음침하면서도 기발한 상상력이 엿보이는 지하실 공간은 마치 병구의 복잡한 뇌 속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전한다.

헌팅 & 세트‥‥‥‥‥‥‥‥

강원도 함백산 1300m 고지에 세워진 병구네 집 세트도 “병구가 직접 설계하고 만들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에서 출발했다. 산골짜기에서 조달할 수 있는 나무로 외관을 꾸민 너와집을 만든 것이나 울퉁불퉁 거친 느낌을 강조한 것도 이같은 생각 때문이었다. 장마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팀은 2개월 동안 상주하면서 자연스런 느낌이 나도록 돌 하나하나를 주변에서 갖다 날랐고, 풀을 한 포기씩 떠서 심었다. 폐광촌의 산 정상 부근에 만들어진 이 세트가 주위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신경도 각별히 썼다. 또 워낙 감정의 기복이 심한 영화이다보니 보는 위치나 조명에 따라 평화롭게도, 그로테스크하게도 보일 수 있도록 외면을 다양하게 만들었다. 절벽 위에 집을 지은 것도 위태로워 보이는 느낌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 사실, 이 영화가 폐광촌을 배경으로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미술적인 점을 고려한 때문이었다. 장준환 감독은 “어찌 보면 60∼70년대 느낌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현대적인 듯도 하고, 광산촌은 여러 가지 느낌이 조합돼 뭔가 새로운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이런 고민 때문에 시나리오를 쓰면서 폐광촌을 배경으로 삼은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영화의 한 장면‥‥‥‥‥‥‥‥

지하 2층의 비밀 공간에서 병구의 추궁과 강 사장의 부인이 반복된다.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강 사장은 정연한 논리로 병구를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당당한 강 사장과 흠칫하는 병구, 두 사람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오른다. 낡아빠진 듯한 외벽이나 소품들, 그리고 어지러이 얽혀 있는 전깃줄이 공포감을 유발하고 병구의 혼란스러움을 보여준다. 특히 효과적으로 사용된 조명은 병구의 표정에 음영을 드리우고, 박박 민 강 사장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강조한다. 일부만을 비추고 있는 조명은 그 아래 어둠 속에 감춰진 기괴한 분위기를 더욱 드러내고, 바닥의 끈적끈적한 느낌을 강화한다. 푸른빛과 붉은빛의 대조도 갈등을 증대시킨다. 무언가 폭발하기 직전의 이 긴장은 형사들의 추격, 강 사장의 반격으로 이내 이어지게 된다. “각자의 캐릭터에 맞는 공간 창조”라는 말이 들어맞는 장면이다.

프로덕션디자이너 장근영, 김경희

<지구를 지켜라!>는 장근영, 김경희가 프로덕션디자인을 맡은 두 번째 작품이다. 지난해 <화산고>로 처음 프로덕션디자이너라는 이름을 걸었지만, 영화계에는 1994년부터 뛰어들었다. 미대 조소과를 나란히 나와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영화미술 작업을 하기로 결심한 두 미술감독은 <은행나무 침대>를 시작으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등 다양한 작품에 참여해왔다. 데뷔작 <화산고>는 30개도 넘는 다양한 공간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힘든 작업이었지만, <지구를 지켜라!>는 공간을 꽉 채워진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엄청난 소품과 싸움을 벌여야 했다는 점에서 쉽지 않았다. 그 소품이란 것도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재조합을 해 만들어야 했던 탓에 어려움은 더 했다. 특히 100쪽 가까운 병구의 연구 노트를 일일이 구상하고 만들기까지 했기에 이들은 자연스레 병구처럼 편집증과 과대망상에 빠져들어갔다. “그동안 떨어졌던 에너지를 채우고 있는 중”이라는 이들은 <화산고>와 <지구를 지켜라!>에서 그랬듯, 아무도 해본 적 없는 작업에 또다시 도전해보고 싶다는 뜻을 밝힌다. 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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