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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2003-01-08

조선희의 이창

청소년 여러분들은 새해에 어떤 계획들을 세웠는지요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가다듬었나요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거나, TV 시청을 줄이겠다거나, 여자 혹은 남자친구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나요 무엇이 되었건 좋습니다. 미래의 시간은 모두 여러분의 것이니까요.

지난 12월의 마지막 주말에 어떤 청소년영화제를 구경하러 경남 창원에 다녀왔습니다. 중딩과 고딩들이 만든 영화를 실컷 보았습니다. 요 몇해 사이 청소년영화들을 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놀라는 것은, 카메라를 참 자유롭게 잘 다루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개중에 어떤 작품은, 이미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을 ‘기술적으로’ 충분히 이해한 사람의 것이라고 느껴지기조차 했습니다. ‘개체의 진화가 종의 진화를 반복한다’고 하고, 사람은 태어나서 어른이 될 때까지 인류가 원시로부터 문명화돼온 과정을 되밟게 된다고 하지만, 지금의 10대들은 그 진화의 속도가 적어도 우리 세대보다는 훨씬 빨라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처럼 조숙한 10대들의 영화를 보는데, 어떤 우울함을 떨치기 어려웠습니다. 영화제의 주제가 ‘탈폭력’이어서 더욱 그랬을 테지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라고 느끼는 데서는 우리 세대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교복 입고 무거운 책가방 들고 도시락 두개씩 싸가지고 학교 다니던 시절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일기에는 “이 터널의 끝은 언제인가” 하는 비장한 독백들을 적었고, 공부 강박에다가 사춘기 특유의 환경스트레스까지 겹쳐서 염세주의의 밑바닥을 헤맸으며, 막연하게 자살을 꿈꾸기도 했답니다. 지금은 물론, 그때 인생 종치지 않았던 걸 큰 다행이라고 생각하지요. 포레스트 검프 말마따나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은 것인데, 그걸 열어보지도 않고 내다버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니까요. 내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그 상자 안에 남아 있는 것이 어떤 맛일지 몹시 궁금하답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학생영화들에서 죽음이라는 주제가 남용되고 있는 것이 내내 찜찜했습니다. 왕따당하던 학생이 자살하는가 하면, 자기를 괴롭히던 학생을 칼로 난자해서 죽이기도 하고, 학습부진과 따돌림에 시달리는 한 학생은 학교에서 돌아와 잠겨 있는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보려고 애쓰다가 차라리 복도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어버립니다.

나는 어른들이 만드는 드라마에서도 충분한 개연성 없이 자살과 살인으로 이야기를 끌고가는 걸 볼 때 작가가 좀 안이하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죽음이라는 모티브는 아주 특별히 다뤄지지 않을 경우, 상투적이고 관습적이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비관적인 세계관을 담았건 간에 이 학생들이 카메라를 선택했고 카메라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행복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카메라는, 렌즈 뒤에 있는 사람에게, 세상에 대해 최소한 초점거리만큼의 객관적 거리를 갖게 합니다. 또한 다양한 요소들과 여러 사람들을 함께 염두에 넣어야 하니 시야를 넓게 가지게 합니다. 그러니 세계관도 좀더 입체적이고 종합적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방의 벽들이 자신을 바퀴벌레처럼 납작하게 찍어누를 태세로 협공해온다 해도 말이지요. 영화제에서 함께 심사를 맡았던 친구는 “우리도 이 나이에 카메라가 있었다면” 하고 거듭거듭 말했답니다.

어떤 학생들은 예선에서 떨어지고 어떤 학생들은 본선에 진출해 상과 상금을 받아가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 결과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류승완 감독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단편들을 만들기 전까지 모든 영화제, 모든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죄다 떨어져서 동생 류승범과 고구마장사를 했는데 그 시절에 주위에서 영화를 포기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합니다. 그런가 하면 백일장에서 장원 먹은 사람들이 나중에 반드시 훌륭한 작가가 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일찍 스타가 돼버리면 빨리 성장을 멈춰버리는 수도 있거든요.

중요한 건, 생각의 힘을 기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도, 그 모든 시청각적인 마술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생각을 운반하는 매체이니까요.

나도 이제 거의 꼰대가 다 돼놔서 마이크만 잡으면 이런 교장님 훈시가 나옵니다. 아무래도 새해가 되다 보니. 친애하는 우리의 꿈나무들에게 뭔가 영양가 있는 한마디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런데 저기, 아까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 누구야. 누구야. 누구야.젠장, 젠장, 젠장, 젠장…. 조선희/ 소설가·전 <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