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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명연기 3인 3색 [4] - 박인환
사진 오계옥최수임 2001-07-13

단단한 중년, 푸른 외고집, 배우 박인환

“정신병자만 못해봤어”

“택시기사가 어찌나 얘기를 시키던지….” 은평구 신사동 집에서부터 택시를 타고 오는 사이, 기사가 그를 알아보고는 꽤나 말을 걸었나보다. 그런데 그게 좋았다는 건지, 싫었다는 건지, 박인환(56)씨의 표정이 도무지 애매하다. “이런 건 젊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사진을 찍으면서도 그랬다. 포즈를 잡는 게 어색하지만 싫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영 안 내키는 것 같기도 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깐깐한 인상의 박인환씨는, 말 한마디에도 묘하게 정반대의 뉘앙스를 함께 뿜어냈다.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의 농부와 <조용한 가족>의 안개산장 주인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그에게 붙어 있는 듯. 상대의 시선을 장악한 뒤 마지막에 미량의 표정만으로 동전의 앞뒷면을 바꾸는 노련한 기술이랄까. 긴장하고선 집중해서 보고 있으면, 그제서야 날리는 캐스팅보트. 그건 씩 웃거나 혹은 그러지 않거나였다.

마흔다섯, 늦깎이 은막데뷔

박인환씨는 마흔다섯 때 영화에 데뷔했다. 캐셔를 유혹하는 탐욕스런 슈퍼 주인 ‘육사장’을 연기한, 강우석 감독의 <나는 날마다 일어선다>(1990)가 그의 첫 영화. 그러나 연기자 박인환을 마흔다섯에 데뷔한 영화배우로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영화배우이기 전 그는 연극배우였고 또 탤런트였기 때문이다. 연극공부를 하던 중앙대 1학년 때 이미 시작한 연극을, 박인환씨는 극단 가교에 몸담은 채 지금도 1년에 한편씩은 하고 있다. 방송을 한 건, 아무리 잘하고 인정받아도 연극은 배우가 버는 돈에 ‘0자’를 더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없이 NG를 내고, 집에 돌아가면 아내에게 “죽어도 TV는 못하겠다”고 털어놓기를 반복했던 방송 초기, 영화잡지 기자 출신인 아내는 그의 버팀목이었다. “당신 선배들은 다 그런 과정을 겪었을 것 아니냐. 연극하는 사람들, 대한민국 예술은 자기들이 다 짊어진 듯하지만, 방송이 더 치열하지 않냐.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우황청심환을 갖고 다녔던 때였다.

“살아남기 위해 개성을 만들었죠.” “편한 거 좋아하고 내성적”이라는 박인환씨가 지금같이 ‘튀는’ 중견연기자가 될 수 있었던 데는 그런, 선택되어야만 살아남는 방송계의 치열함이 한몫했다. 연극계의 스타배우가 드라마의 단역으로 고개숙이고 들어갔던 시절의 홍역 이후, 그는 <인간시장>의 가짜 흥신소 소장 역을 통해 코믹배우로 인상을 남겼고, <왕룽일가>로 대중에게 자신을 확실히 인식시켰다. 영화는 그 다음이었다. 열정적이었으나 가난했던 연극이 첫아이이고, 힘들었으나 인기를 얻어준 방송이 두 번째 아이라면, 40대 중반, 많은 것이 안정되고나서 시작한 영화는, 뒤늦게 본 막내 같았다고나 할까. 영화는 그에게 조금은 생경하게 다가왔다. “방송이 너무 빠르다면 영화는 너무 널럴하더라고요.”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지 않나, 고저장단을 다 재 외어간 대사가 현장에서 바뀌질 않나. 대학 후배 이춘연과의 인연으로 했던 첫 작품 뒤 <조용한 가족>까지, 그의 출연작은 <영심이> <밀크 쵸코렛 1950∼1990> <아담이 눈뜰 때> <돈을 갖고 튀어라> <베이비 세일> <투캅스3> 등 의외로 많다.

“대표작? 뭐 그런 게 있나”라는 그의 겸양을 짐짓 모른 척한다면,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이야말로 ‘영화배우 박인환’의 대표작이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허물’을 ‘묻어두는’ 안개산장 주인은, 박인환씨가 연기한 최고의 캐릭터 중 하나. 그러나 <조용한 가족>은, 처음 대본을 받아든 그를 의아하게 만들었던 작품이기도 했다. “대본을 받고 내가 이미연 PD한테 그랬어요. 작품 좀 이상하다. 영화는 보편타당성이 있어야 하는데…. (웃음) 영화제를 겨냥한 거냐, 실험영화냐. 그랬더니 아니다, 저예산영화다 하더라고요. (웃음) 그래 내가 감독이 상상력이 좋은 것 같은데, 연극분위기로 가자고 나문희씨한테도 그랬죠.”

영화 속 아버지 vs 자연인 아버지

다분히 연극적인 영화 <조용한 가족>으로 스크린에 비로소 정착한 박인환씨는 <산전수전>을 거쳐 장진 감독의, 역시 연극적인 영화 <간첩 리철진>에 출연했다. “내가 공산주의자로 보이나”라고 묻는, 총보다 돈이 익숙한 어딘지 코믹한 고정간첩이 그의 역. 올해 <교도소월드컵>에서 보여준 궁상맞은 원주교도소장의 모습 역시 코믹배우로서의 면모다. ‘엽기’를 가미한 개성있는 중년 코믹캐릭터로는 이제 그 이상이 없는 듯, 이처럼 최근 몇년간 박인환씨는 김지운, 장진 등 젊고 ‘상상력 좋은’ 감독들이 앞다투어 찾는 인기배우였다. 막 촬영을 마친 신작 <봄날은 간다>는 조금 경우가 다르다. 허진호 감독은 극중 이미지가 아닌, 어떤 방송에선가 인터뷰하는 박인환씨를 보고 그를 캐스팅했다. 자연인 박인환에게서 아버지의 냄새를 맡은 것. “무지하게 인생을 관조하는 따뜻한 작품”이라고 느낌을 밝히는 <봄날은 간다>에서 박인환씨는, 자연인의 그의 모습에 조금 더 가까울지 모르는, 이제까지에 비해 한결 ‘평범한’ 아버지를 연기했다.

“그렇지. 평범한 아버지지. 마누라 없이 아이 키운 아빤데, 재미도 있더라고. 하지만 평범하다는 게 뭔지. 나는 집에서도 자상한 아버지는 아니에요. 미소 띠고 너를 사랑한다, 공부 열심히 해라 그런 아버지가 현실에 있을까. 실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말도 못하는 건데. 나는 자상하지도 엄하지도 않은 두루뭉수리한 아버지야.” <조용한 가족>의 엽기적인 아버지도, <봄날은 간다>에서 아들에게 가만히 힘이 되어주는 따뜻한 아버지도 그가 보기엔 극중 인물일 뿐인 듯. “삶의 정지된 단면을 담는 영화나 드라마”와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고, 캐릭터와 배우는 거꾸로인 경우도 많다고, 그가 슬쩍 포커페이스를 내민다. 그는 대학 4학년, 2학년인 두 딸과 고3 막내아들을 두고 있는 중년의 아버지. 아이들이 잘 보는 잡지에 인터뷰하게 된 것을 내심 좋아하고, 또 연극영화과를 간다는 아들에게 “너는 내성적이어서 배우 못한다”고 잘라 말하는, 한명의 현실 속 아버지이다.

“TV에서 프로골프를 보다가 왔는데, 골프를 잘하고 못하고도 아주 이만큼 차이에요. 정신력인 거지.” 오랫동안 꾸준히 연기의 힘을 잃지 않아온 비결에 대해, 누차 “운이 좋았다”고만 하던 박인환씨가, 인터뷰 막바지에 이르러 골프 얘기를 에둘렀다. 얼마 전 시작한 골프연습의 여파로 허리께에 파스를 붙인 그가 두 손가락 사이에 작은 공간을 만들며 말한 “이만큼 차이”. 그건 연극으로 닦은 탄탄한 기본실력과 배우로서의 욕심인 듯했다. 하고 싶은 역에 대한 소망이 분명하고, “고기는 없고 양념만 있는” 작품들에 대한 비판적 안목이 날카로운 그가 앞으로 해보고 싶다는 역은 정신병자. “농부, 어부부터 형사, 조폭, 왕까지 다해봤는데 정신병자 역은 한번도 안 했어요.” 그러고보니 그렇다, 한번 했을 법도 한데.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보고 예전에 술 꽤나 마셨는데”하며 그가 술잔을 기울인다.

단단한 중년, 정년은 없다

방송 출연 이후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해온 진짜 프로배우 박인환에게 연기자는 보통 직업이 아니라 “정년퇴직이 없는 좋은 직업”이다. 젊을 때 고생을 나이들어 보상받을 수 있는. 혹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점점 더 빛을 발해가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위해서도, 실력있는 중년배우를 필요로 할 앞으로의 여러 영화들을 위해서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일할 것”이라는 그의 계획은 그 스스로와 영화관객에게 든든한 약속이 아닐 수 없다. 그다지 쓸쓸함 없는, 오히려 단단한 중년. 인터뷰 뒤풀이를 했던 허름한 한 통닭집에서, 박인환씨는 그 어떤 젊은 배우들보다 열렬한 환대를 받았고, 한 취객은 사인을 해달라며 꼬깃꼬깃한 종이까지 내밀었다. 맥주 몇잔을 걸치고서 돌아가는 늦은 귀가길, 그는 가족에게 줄 통닭 한 마리를 잊지 않았다.

내가 본 선배 박인환

“휘발성의 뜨거움을 발산하시죠”

<조용한 가족> 작업을 하면서, 박인환 선생님이 동네이장과 격투를 하는 장면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그런 박인환 선생님의 힘있는 표정이 좋다. 코믹한 연기와 강한 성격파 연기를 같이 보여줄 수 있는 배우다. 박인환 선생님은 내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유일하게 염두에 뒀던 배우다. 아예 그분을 모델로 캐릭터를 만들었다. 완고하고 강한 인상의 아버지지만 가부장적 아버지의 틈새에서 나오는 웃음이 그에겐 있다. 선생님은 현장에서도 아버지 같은 역할을 했다. 나문희 선생님은 어머니 같았고. 배우에겐 여러 가지 뜨거움이 있을 수 있는데, 박인환 선생님은 그 연배에 놀랍게도 휘발성의 뜨거움을 발산한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박인환 선생님은 송강호가 유일하게 술먹다가 도망간 사람이기도 하다. (웃음) 새벽까지 술을 드시고는 아침에 전혀 흐트러진 모습 없이 현장에 나타나시곤 했다. 김지운(<조용한 가족> 감독)

연세가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사람들을 많이 배려하신다. 유지태, 이영애씨 등 젊은 배우들한테도 그러시고, 나보다 연기경력이 훨씬 긴데도 내 말을 무척 경청하신다. 박인환 선생님은 또, 우리네들 아버지 같다. 지극히 가난한 시절을 다 겪었지만, 우리 아버지들은 대개 다 여유가 있으시잖은가. 유머도 있으시고. 상우(<봄날은 간다> 주인공)의 아버지이자 한국 아버지의 대표격을 연기하시기에 잘 어울리는 분이다. 허진호(<봄날은 간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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