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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한 스릴러, <손님은 왕이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며, 인간은 무대 위의 배우”라고 말했다. 이것은 일종의 은유적 표현인데, 이것을 축어적으로 해석해서 인생을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진짜 삶을 잠시 제쳐두고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삶을 연기하면서 살아간다면, 즉 나의 정체성은 버려둔 채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고 연구해서 내 삶 속으로 이식한다면 과연 어떤 것이 진짜 삶이고 어떤 것이 가짜 삶인지 구별할 수 있을까? <손님은 왕이다>는 이같은 발상을 커튼 뒤에 숨겨두고 관객을 받는다. 누가 무엇을 연기하고 있는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헷갈리기 십상이다.

한적한 동네의 ‘명(名)이발관’, 허름한 외양과 달리 문을 열고 들어가보면 흑백이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는 모던 스타일의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면도날을 갈고 닦고 이발 가위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희열을 느끼는 ‘명(名)이발사’ 안창진(성지루)이 순진한 미소로 손님을 맞는다. 그에게는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위험해 보이는, 라이프 플래너(보험설계사)인 아내 전연옥(성현아)이 있다. 이제는 손님이 뜸한 이발소이고 남편을 무시하고 바람기 다분한 아내이지만, 안창진에게 이 둘은 모두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어느 날 이 평온한 공간에 정체불명의 협박 엽서가 도착한다. ‘나는 너의 추악한 비밀을 알고 있다.’ 엽서는 두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이 순진무구해 보이는 이발사의 ‘추악한 비밀’은 무엇이며, 그것을 알고 있는 이는 또 누구인가. 두 번째 질문은 쉽게 풀린다. 엽서의 도착 직후 이발소를 방문하는 정체불명의 사나이, 김양길(명계남)이 바로 엽서의 발신자이다. 그는 Love와 Hate를 두 주먹에 새기고 커다란 선글라스를 쓴 채 이발소 안에 음산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알 듯 모를 듯 수수께끼 같은 그의 협박은, 안창진의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원조교제에 대한 기억을 하나 꺼내놓도록 만든다. 하지만 진짜 추악한 비밀은 그것이 아니다. 김양길의 협박에 옴짝달싹 못하게 걸려든 안창진은 그가 나타날 때마다 그 이전에 주었던 돈의 두배를 지불해야만 하고, 그 액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급기야 사채를 얻어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아내에게 추악한 비밀을 들키지 않고, 자신의 보금자리인 이발소를 지키려는 이발사의 처절한 몸부림은 결국은 불어나는 빚 때문에 둘 다를 잃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았던가. ‘손님은 왕이다’라는 모토에 맞춰 자신을 방문하던 김양길의 요구에 최대한 부응하던 안창진은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상대가 나를 약점으로 공략하면, 나도 상대의 치명적 약점을 물면 되는 것. 안창진은 해결사(이선균)를 고용하여 김양길의 뒷조사를 시작한다. 뒷조사와 함께 해결을 맡기지만, 뒷조사도 해결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김양길의 정체는 너무도 의외이고,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에게 해결이란 삶의 종말, 즉 죽음일 뿐이다. 이제 안창진 그리고 더이상 관찰자나 방관자일 수 없는 전연옥은 전전긍긍하며 이 ‘손님’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저예산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세련된 스타일을 구사하는 <손님은 왕이다>는 일본의 미스터리 추리소설가 니시무라 교타로의 <친절한 협박자>를 각색한 작품이다. 영화는 단편소설인 원작만으로는 장편 극영화의 길이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원작에는 없던 협박자의 사연을 첨가해 넣었다. 게다가 명계남이라는 배우에 겹쳐지는 허구와 픽션을 교묘하게 섞어놓음으로써 적당히 유머스러우며 감상어린 동점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이 작품이 가지고 있었던 세련된 형식미는 퇴색하는 감이 없지 않다. 무성영화 형식의 차용과 과감한 화면분할, 그리고 모노톤의 미장센을 통해 차갑고 냉혹한 현실 법칙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는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조용히 자취를 감춘다. 1940년대 할리우드 누아르풍을 추구한 프로덕션디자인과 이발소, 협박 그리고 살인이라는 모티브의 유사성 때문에, 영화는 코언 형제의 흑백영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오기현 감독은, 이 세상에는 진정한 선인도 정의도 없다는 코언 형제의 냉소 대신 알고 보면 본질적으로 악한 인간은 없다라는 온정적인 시선을 택했다. 주제 의식이야 감독의 시선 차이라고 할 수 있지만, 탄탄하게 짜여야 할 플롯을 감상으로 대치하려고 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은 지울 수가 없다.

영화에서 또 하나 석연치 않은 지점은 팜므파탈 전연옥의 캐릭터이다.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에서 그녀가 화장을 하는 것과 안창진이 이발소를 정리하는 것이 병렬적으로 제시되는데, 이것은 그녀를 다루는 이 영화의 전반적인 시선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캐릭터들이 사연을 갖고 욕망을 가질 때, 그녀는 아름다운 소품처럼 진열되었다가 퇴장할 뿐이다. 그녀는 화려하게 등장하고 표면적으로는 남편 안창진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남성 캐릭터들에게 농락당하고, 정작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침묵을 강요당한다. 그녀가 도대체 어디를 향해 움직이고 누구를 만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서 이 영화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비정한 ‘협박자’마저도 제 나름의 사정을 갖는데, 왜 전연옥은 아무런 사연을 갖지 못하는가. 협박자마저도 누아르의 차가운 세계에서 구원하여 따뜻한 인간 세계로 편입시켰던 감독이 왜 그녀만 비정한 누아르의 여인으로 머물게 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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