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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과 애로(愛勞)영화 쓰기 [2]
이종도 2006-03-02

3. 섹스의 연쇄파동 그래프를 그려보라

<바람난 가족>

이제껏 배운 걸 정리해보자. 현대적 욕망을 옛 시대의 언어로 뒤집어보거나, 금기를 만들어서 관객 속을 애태우거나 하는 줄기찬 ‘낯설게 하기’, 그리고 그에 이은 감질나게 하기(연인의 첫 섹스는 적어도 상영 뒤 60분대 이후에 배치하라), 그리고 그 감질나는 걸 견디게 만드는 풍부한 디테일까지 생각하셨다면 이제 고급반으로 월반하실 차비가 되었다는 거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심화학습으로 마무리를 해야 한다. 떡영화의 대가로 명성이 자자한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은 바람난 아내나 바람난 남편이 아닌 바람난 가족으로 그 바람의 층위를 확대함으로써 낯설게 하기에 성공한다. 10대와 아줌마가 벌이는 최후의 드라마틱한 섹스를 감정의 최고조 단계에 배치함으로써 감질나게 하기도 성공한다. 그리고 거기에 이르는 디테일들도 섬세하게 구성했다. 그 디테일은 ‘허테일’의 정반대편에 있는데, 심화학습 코스에서만 배울 수 있는 거다.

3-1. 체위 - 남들 하지 않은 자세로 하라

심화학습 코스의 내용은 바로 체위와 장소다. 독특한 체위 개발에 늘 힘쓰고, 은행에서 잡지를 볼 때면 늘 ‘가장 인상적인 섹스 장소’ 같은 기사를 먼저 찾아보는 당신, 정말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바람난 가족>은 주영작(황정민)과 그의 정부 김연(백정림)이 포개져 있는 매우 개성적인 ‘빠떼루’적 상황만으로도 걸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작품이다. 그 체위는 여성상위시대를 반영하는 시대적 포지션이자, 자기 몸의 쾌락을 자기가 결정하는 발칙한 포지션이다. ‘전희는 노 삽입은 오 예!’라는 구시대적 발상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혁명적 체위인 것이다. 이런 비장의 체위 하나쯤 개발하셔야 애로사항이 없으실 것이다. 혹시 여기서 물구나무 체위 따위를 답이라고 내놓으셨다면 다시 기초반으로 돌아가시라.

3-2. 장소 - 노하우가 아니라 노웨어(know where)다

그러나 당신은 이런 잔소리에 주눅들 새가슴이 아니다. 침대신을 ‘요’신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걸 배운 당신, 벌써 ‘요’가 암실이나 무용실로 바뀔 수도 있다는 발랄한 상상을 하고 계시지 않은가 말이다. 너무나 진지하고 훌륭한 자세라 아니할 수 없다. <나인 하프 위크>처럼 계단이나 마룻바닥이 된다면 라꾸라꾸침대도 안 되란 법이 없다. <정사>에서 이미숙과 이정재가 심야의 오락실도 훌륭한 장소임을 알려주지 않았는가. 이런 진리를 늘 실천하고, 또는 실천하고자 하는 당신, 정 안 되면 공중화장실에서 했던 자기 체험이라도 써보라. 누가 물어보면 마치 비밀 취재원한테 들은 이야기처럼 말하면 된다. 그렇다고 비디오방 같은 찌질한 체험은 ‘오, 노!’다. 차라리 극장 같은 공공장소로 바꾸는 신선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정 안 되면 주인공의 팔이라도 부러뜨려라. 금기와 금지에서 시작한다는 발상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려 하지 말고 어디서 해야 하는지에 대해 들려달라. 우리는 어디서 해야 하는지 늘 궁금하다.

그러나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이 낯선 체위와 낯선 장소만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너무 순진한 거다. ‘떡’영화의 ‘떡’이 아무도 먹지 않고 나만 먹었으면 하는 ‘떡’이니만큼, 그 ‘떡’은 복잡한 연쇄 파동을 일으킨다. 인권변호사 주영작이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면, 아내 문소리는 동네 고등학생이랑 바람을 피우고, 주영작이 바람 피우고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내면, 사고당한 성지루가 더 큰 사고를 내는 것이다! 그러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신약성서(야고보서 1장15절)의 틀을 ‘성욕이 잉태한즉 부적절한 관계를 만들고 부적절한 관계가 성장한즉 비극을 낳는다’로 바꿀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모범부부의 부부생활이 아니라 금지 명령을 어기고 누군가 먹는 ‘떡’이다. 그 ‘떡’을 누가 먹는 순간 발생하는 관계의 변화를 예의주시하라.

4. 불가능한 것에 아우라를

<브로크백 마운틴>

사람도, 사랑도, 세상도 변한다. 그러나 이 아찔한 변화 속에서도 서로를 그리워하고 아끼는 사랑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뛰어난 연애작가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황금비율로 섞어 그린다. 리안 감독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식 사랑을 매우 고전적인 기법으로 그려냈다. 마지막 장면에서 산으로 돌아가 펑펑 우는 걸 상상한 관객에게 감독은 아주 작은 그림엽서 앞에서 ‘맹세할게’라고 말하는 더 놀라운 엔딩을 선사한다. 역겨울 수 있는 소재가 오히려 가슴 절절한 상황으로 바뀌고, 금기와 터부가 오히려 더욱 로맨틱한 사랑의 조건으로 변화했다. 목소리 높이지 않고도 금기의 사랑을 말하고, 마침내는 사람을 울리기까지 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사실 금기의 영역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건 <바람난 가족> 정도에서 멈춰야 한다. 그 이상, 그러니까 이성애의 영역을 넘어서는 순간 자칫 반발심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엔 죄가 없다. 그걸 설득시켜야 하는 게 우리의 마지막 미션이다.

4-1. 금기와 터부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만약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질렌 홀)을 부유한 중산층으로 잡았다면 우리는 영화에 공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성애자, 아무 가진 것 없는 피끓는 청춘을 와이오밍주의 광활한 산등성이로 올려보낸(두 사람은 직업소개소에서 양치기 일을 받았다) 설정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변화무쌍하고 압도적이며 무섭고 장엄한 자연 앞에서 아주 작고 나약한 두 소년(겨우 스무살 남짓이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닥불을 피우고 자는 것마저도 금지된 한계상황으로 순수한 소년들을 몰아넣어 관객에게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얼마나 체온이 그리웠겠어. 둘 다 이성애자라잖아. 끄덕끄덕.

4-2. 간절함과 편협함

그러나 계속 양을 치게 둘 수는 없다. 기껏해야 관리인이나 곰 말고는 다른 등장인물이 없어서 심심하다. 그리고 먹고살려면 각자 살던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 물론 그 보수적인 미국 서부와 남부의 시골에서 그들이 살아남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두 사람은 각자 결혼해 힘든 나날을 보낸다. 이런 고난이 또 관객에게 슬그머니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것으로 다 된 게 아니다. 그들의 사랑이 오랫동안 지켜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확신시켜야 한다. 그 방법은 두 사람과 다른 사람을 대조시키는 것이다.

에니스는 동성애를 했다는 오해를 받고 거세까지 당한 뒤 버려진 시체를 본 기억을 떠올린다. 아버지가 어린 에니스를 굳이 꼭 붙잡고 그 시체를 보여준 건 살인범이 바로 아버지 자신이기 때문이다. 잘사는 장인어른에게 무시당하면서 살던 잭은, 추수감사절 때 놀러와서 오만방자하게 구는 장인어른에게 “손님 대접을 받고 싶으면 얌전히 있으라”며 거의 10년 만에 큰소리를 친다. 관객은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을 느낀다.

사실 에니스와 잭이 굳이 더 도덕적이라거나 더 고결한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많은 걸 희생하는 이상주의자일 뿐이다. 그런데 감독은 편협하고 폭력적인 미국 서남부 사회의 인물들을 두 연인과 대비시키면서 슬쩍 에니스와 잭에게 우리가 전폭적으로 공감하도록 만든다. 난 동성애는 아니지만 저건 너무 심하지 않아. 저 양키 새끼들 그런다고 사람을 죽이냐. 정말 끄덕끄덕.

여기까지라면 <너는 내 운명>의 감동까지는 먹고 들어가는 것이다. 금기와 터부를 오히려 관객이 영화에 푹 빠지는 조건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러나 달리 거장인가. 리안 감독은 마지막 끝내기에서 울음 소리를 조금 절제하면서 그 사랑에 아우라를 씌운다. 그래, 애로영화란 사랑의 노동, 그것도 무지막지한 노동과 성찰이 필요한 영화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울고 쇼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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