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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스만 쥐면 영웅
2001-10-18

<맥스 페인>

<영웅본색>에서 <첩혈쌍웅>으로 이어지는 주윤발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치밀한 전개니 심오한 주제니 하는 건 필요없었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총알과 발레를 연상시키는 우아한 모습으로 그 많은 총알을 다 피하는 고독한 남자. 어울리든 말든 검은 트렌치 코트에 성냥을 물고 다니는 게 대대적인 유행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멋지게 담뱃불을 붙여도 현실은 합성된 누드 사진만큼 어색하고 초라하다. 영화는 그렇게 우리를 약올렸다. 현실이 얼마나 참을 수 없이 재미없고 지루한지 조잘조잘 떠들어대놓고 자신은 화면 건너 저편에서 우아하고 여유있는 모습으로 미소를 짓는다.

게임은 영화를 넘어선다. 게임을 하면 전부 내 일처럼 느껴진다. 용이 불을 뿜고 로봇 전사가 활보하는 세계가 당연하게 여겨진다. 마우스를 딸깍대는 건 스텔스를 켜고 적의 움직임을 탐색하는 거고, 키보드를 누르는 건 멋지게 한 바퀴 굴러 소음총을 겨냥하는 것이다.

3D 액션 어드벤처 게임 <맥스 페인>은 펄프 컬처에 바치는 오마주다. 마약, 뒷골목, 싸구려 포르노 잡지. 중국인과 마피아에 팜므 파탈과 오컬트. 갓 태어난 아이와 사랑하는 아내를 마약 거래 갱에 잃은 고독한 형사가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3년에 걸친 추적을 벌인다. 유일한 친구인 단짝 파트너까지 살해되고, 신분을 증명해줄 서류 한장없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마피아 조직과 전쟁을 벌여나가는 맥스 페인. 미국 버스터미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싸구려 하드보일드 소설 그대로다.

이 게임에는 ‘블릿 타임’이란 시스템이 있다. 블릿 타임은 일시적으로 시간을 극도로 천천히 흐르게 하는 시스템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시간이 느려지면서 자유자재로 총알을 피하던 장면, 그리고 날아올라 적을 걷어차던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입맛대로 원하는 순간에 ‘블릿 타임’을 설정할 수 있다.

적들이 우글거리는 방 안으로 맥스가 뛰어든다. 닷징 샷장면에서 블릿 타임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문을 박차고 앞으로 몸을 날리며 총을 쏜다. 슬로 비디오로 홍콩영화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맥스는 허공에서 오른쪽을 겨냥해 쌍권총을 쏘고, 다시 몸을 비틀어 왼쪽의 적까지 날려버린다. 그리고 떨어지는 순간 몸을 완전히 뒤틀어 문 옆에 기대어서서 자기를 겨냥하고 있는 적의 머리까지 날려버린다. <첩혈쌍웅>에서 주윤발이 바에 쳐들어가 쌍권총을 쏘아대던 장면이 내 손 안에서 직접 만들어진다. 닷징 샷장면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마지막에 죽는 적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장면처럼 허공을 날아 천천히 바닥에 떨어진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멋지게 문을 걷어차거나 쌍권총 세례를 날리는 건 내가 아니라 모니터 속의 맥스다. 나는 그저 모니터 앞에 웅크리고 앉아 손가락과 손목을 까닥일 뿐이다. 하지만 내 손으로 직접 악을 응징하는 싸구려 영웅주의 만족감, 단신으로 적과 맞서는 중압감과 스릴,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아픔까지 너무나 뚜렷하게 느껴진다. 맥스가 달리면 내 숨이 가빠지고, 적이 쏟아져 나오면 식은땀이 흐르며 맥박이 빨라진다. 영화와는 달리 게임은 타인이 아닌 스스로의 경험을 생산해낸다.

흥미롭게도 게이머의 실력이 늘면 늘수록 연출되는 장면이 더 멋있다. 그리고 장면이 멋있어질수록 맥스와 일체감도 커진다. 쏟아지는 비난에 눈물을 머금고 서랍 구석으로 쑤셔박은 검은 트렌치 코트를 다시 꺼낼 필요는 없다. 무릎이 늘어난 내복 바지 차림으로도 직접 홍콩누아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