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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준·정성일의 종횡4담 [2] - 문화산업
정리 박은영 2001-02-22

문화산업론은 비만, 영화문화는 발육부진

한국영화에 관한 담론을 지배해온 문화산업론은 인터넷 비지니스의 활황과 더불어, 더욱 기세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영화문화는 어떤 발전을 이루었는가. 미진한 미학적 성취, 진정한 시네마테크와 필름아카이브의 부재, 대학 영화관련 학과의 과다와 영화학의 부진이 빚는 극심한 불균형 등 한국 영화문화의 왜소화를 초래한 주범은 혹시 문화산업론이 아닌가.

김 | 한국영화계를 과연 문화산업이 지배하고 있는지부터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국영화가 자본주의적 사고를 하기 시작한 것도 90년대라고 생각한다. 그 이전 제작시스템은 식민지 반봉건사회 비슷한 것 아니었나 싶다. 때론 국가독점자본주의 성격도 있었지만. 반면 지금의 한국영화 현실은 문화적인 양상에서마저도, 후기 자본주의적 모습이 보인다. 자본주의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이 꼭 그 산업이 완숙한 단계에 진입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 한국영화의 문제를 문화산업론으로 파악하는 것은 논지를 흐릴 수도 있다. 강력한 의지나 합의의 도출에 의해서 문화산업적인 방향으로 한국영화가 양성된 게 아니라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요소의 모임에 따라 흘러왔고, 오히려 그런 것은 한국영화를 만들어가고 담론을 형성해가는 개개인의 역할과 일들이 모여서 된 결과다. 산업적 영역에서 보면 한국영화가 보이고 있는 여러 징후들을 생각할 때 너무 단기적인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저버릴 수 없다. 여러 자본이 유입되고 제작이 활성화된다거나, 기획만 좋으면 돈없어 영화 못 찍을 일 없어졌고, 배급과 마케팅망을 확대시켜 수익을 극대화한다든지 하는 것은, 순전히 산업적인 차원에서만 보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한 건 전체적으로는 에너지가 있고 다이내믹하고 기도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하나하나는 허약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국영화의 구석구석에 박힌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한다. 이건 일종의 미스터리다. 부분은 부정적이고,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게 많은데, 왜 전체는 잘되는 모습으로 느껴질까.

정 | 많은 점에서 홍준이 형이 영진위 위원이기 때문에 모든 변화의 폭풍, 그 핵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그 자리에서 본 관점일 거다. 난 다른 견해다. 같은 견해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 거칠게 표현하자면, 한국영화산업에도 정교하게 평균이윤율저하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 자본이 커진다 해도 이윤이 약속되는 건 아니고 더 많은 노동을 가져간다. 70년대 한국영화는 영화자본가들의 해방구였고 80년대에 기업과 처음 만났다. 기업의 논리가 영화산업에 작용하게 됐고, 영화가 미디어산업이 되고, 텔레비전, 케이블과 비디오 등과 접합되는 순간, 방치됐던 이 시장이 정교한 방식으로 잉여가치를 만들며 움직이는 과정에서 개인이 느끼는 허탈함, 박탈감은 당연한 것이다. 더 커다란 문제는 한국영화산업이 100만, 2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고 해서 새로운 잠재관객을 끌어들였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난 반대다. 그건 영화가 특정관객의 문화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럴 때 문화산업은 황혼기를 맞는다고 생각한다. 더이상 젊은이들에게 관심없는 문화가 되면서부터, 에너지가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상적인 풍경은, 90년대 초에는 영화관을 문제삼지 않았지만, 90년대 후반엔 영화가 나빠도 좋은 영화관을 찾는다는 것이다. 영화관의 분위기, 거기서 쓰고 싶은 시간이 중요해지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IMF가 다가오기 전에 사람들이 누렸던 그 레저타임을, 더이상 소비할 수 없어서 후퇴하였으나 전과 같은 방식으로 소비하고픈 욕망의 허영이란 느낌을 받는다. 사실 레저라는 것은 노동시간과 레저시간 사이에 미묘한 접점 사이에서 마련된다. 일반 노동자들이 소비할 수 있는 접점이, 영화보고 밥먹고 데이트하고 주차비내고 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결정된 것이다. 문제는 이 산업을 주도해야 할 젊은이들이 놀거리는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교회를 제외하면 서울 거리를 새벽까지 밝히고 있는 곳은 게임방뿐이다. 90년대 초반엔 비디오방이었다. 빠른 속도로 옮겨온 것이다. 젊은이들이 욕망을 소비하는 그 구조가 구멍가게 수준이 아니라 거대한 산업자본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영화는 거꾸로 허약해지고 있다. 90년대 초반에는 타르코프스키, 키아로스타미,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를 개봉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이상 볼 수 없다. 연말에 영화베스트 10을 뽑기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제는 영화 애호가들이 좋은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영화제뿐이다. 영화제는 거꾸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해방구가 아니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게토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한국의 영화산업은 너무나 자본주의적이다.

김 | 정확한 지적이다. 내 관점은 산업과 문화를 동시에 진흥한다는 모순된 직무 때문에 개별사업에 적용하는 방법을 찾는 입장이라 그랬던 것 같다. 영화제가 게토가 되고 있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영화산업과 유착해 예술영화 마케팅의 초석이 되는, 시장에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게 뉴욕영화제나 칸영화제의 기능이다.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영화제는 산업의 논리에서 소외된 영화들의 해방구다. 흥미로운 변화가 한 가지 있다. 영화제는 대부분 작품 상영료를 안 줘왔다. 판권 소유자도 영화제가 그 영화의 마케팅의 가치를 높여주고 홍보효과도 있으니까, 별도의 비용을 요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부천영화제도 그랬고. 그런데 점점 그럴 수 있는 영화가 줄어든다. 그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영화제가 너무 많다는 거다. 괜찮은 영화는 일년 내내 영화제를 돌아야 하는데, 보도자료와 프린트 발송 등 잔일이 너무 많아서, 영화제 전담기자를 두어야 할 판이란다. 두 번째 이유는, 부가가치를 되돌려 받을 수 있는 틈새시장이 줄어들었다는 거다. 영화제 관객 이상의 볼륨을 기대할 수 없는 거다. 예컨대 어떤 영화제에서 어떤 영화를 500명이 봤다면 그게 그 나라에서 볼 만한 사람이 다 봤다는 거다. 영화제 출품이 마케팅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하는 관계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건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한국영화가 문화로서 산업으로서 과연 희망이 있느냐는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단편 제작이 늘어나고, 영화관련학과도 늘어나고, 해외영화제 출품도 잦아지고, 해외시장에서도 제작비를 도울 만한 회수가 가능해지고, 공공기관이 영화진흥정책도 운영한다. 영화제에서 만난 다른 아시아 영화인들은, 이런 한국영화계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본다.

하지만 영화 문화 차원에선, 낙관할 수 없는 조짐들이 보인다. 영화는 속성상 상업영화의 시스템 속에서 만들어진다. <시민케인> <집시의 시간> <화양연화> <전함 포템킨>도 어떤 의미에선 상업영화로 만들어졌고, 당대 관객에겐 오락의 수단이고 제작자들에겐 이윤추구의 수단이었을 거다. 상품으로서 생명이 끝난 뒤에 예술로서의 새로운 평가를 하는 것이, 상업영화 시스템 속에서의 속성이다. 그렇다면 한국영화,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의 영화들 중에는 어떤 영화가 당대를 증언하고 반영한 영화, 예술의 진정성에 대한 증거로 후대에 살아남을까.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우리가 그토록 규탄해 마지않았던 낡은 질서가 지배했던 70, 80년대 영화들 가운데 지금 의미있는 작품으로 남은 것들을 생각하면 과연 지금이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최근 EBS에서 <한국영화걸작선>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난 60년대가 한국영화의 전성기였다는 걸 믿지 않았다. 한국영화의 전성기가 아니라, 한국의 오락산업이 유일하게 영화였다. 산업으로 볼 수 없었다. 그런데 60년대는 한국영화가 행복하게 만들어지고 행복하게 만났더라. 지금 한국영화가 활발히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것이 권력 때문인지 시장의 요구 때문인지, 예술적인 영화와 상업적인 영화의 분명한 이분법이 존재한다. 60년대에는 잘 만든 영화와 못 만든 영화가 있었을 뿐이다. 지금이 한국영화의 중흥기라고 하지만, 그런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독립영화의 활성화나 다변화, 또 디지털 키드들에 의해 주도될 새 시대의 영상문화가 이러한 상업영화의 헤게모니를 흔들고, 우리가 생각하는 넓은 의미의 영화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인 역할을 하는 데 힘이 될지는 아직 지켜봐야 될 일이다.

정 | 지금 이 세대들이 헤게모니를 만들어가는 그 중심점으로 들어왔다. 영진위에 들어간 분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 홍준이 형, 장산곶매('여기서 방점은 장산곶매에 붙습니다'라고 강조)였던 이은, 이용배씨, 함께 일했던 이연호씨 등등. 이 사람들이 이전 영진공에 비하면 합리적이고 올바르게 의사결정을 하고, 투명하게 진행하고 있지만, 왜 관객들을 위해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가. 중요한 건 그 영화문화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는 건 관객이고, 관객이 영화를 올바르게 사랑해줄 때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다양한 문화가 형성된다는 점이다. 지금 의사결정은 당장의 산업부흥에 모든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다. 지적한 문제에 대해선 공감한다. 그런데 한국영화가 허약해져가는 것은, 안정된 구조 속에서 점점 더 독점자본화돼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걸 정부가 지원한다? ‘영화’를 떼면, 정경유착이다. 다소 심한 표현을 한 것일 수 있지만, 영화를 보고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아무 혜택도 못 받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뇌관을 건드린 건가.

김 | 전적으로 동감한다, 개인적으로. 위원이 위원으로서 일할 때 개인적인 성향이나 관객으로서 누리고 싶은 혜택이 우선시되는 배경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공적 자본을 집행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영진위가 지금 형태로 개편된 것은 정부의 지원이 따르는 것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는, 선언적으로 영화산업과 문화를 진흥한다는 것이다. 암묵적인 동의의 상당부분이 산업에 방점이 찍혀 있을 것이고, 사회적 합의가 언론과 기관과 개인을 통해 영화계 전체의 의견으로 진흥위원에 도달해 오는데, 그중 산업의 논리와 산업의 목소리가 크다. 개인적으로는 산업의 논리라는 큰목소리에 짓눌려 정말 해야 하는 영화문화를 위한 일들을 할 여력마저도 박탈당하는 것을 막아내는 데 급급했던 것 같다는 반성을 해본다. 여기서 애매한 문제가 발생한다. 위원들끼리 합의해서 만들어내면 되는 것일까. 그럴 수만 없는 것이, 여러 가지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의 어려움 때문이다. 책임 회피일 수도 있지,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것은 정책을 통해서다. 새롭고 다양한 방식의 충분한 지원이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수혜자가 될 사람들이 그 자신이 수혜자라는 걸 알고 받아가 주는 일이다. 수혜의 차원이 아니라 권리의 차원에서 주장하기 위해서는, 면밀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자료를 확보하고 논리를 개발하고 무엇보다 결집된 힘을 갖고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

정 | 정견 발표같다. 산업논리 속에서 낭만적인 영화광들의 전투를 보는 것 같아 매우 마음아팠다는 얘기다. 문화산업론을 얘기하면서 한국영화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지난 한해 동안 내가 좋아한 영화들은, 물론 내 안목이 절대적이란 건 아니지만, 공통적으로 흥행에 실패했더라.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영화의 담론들이 예전에는 문제의식을 갖고 끊임없이 질문을 끌어내고 던졌으나, 최근의 공통적인 특징은 흥행의 경기장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산업의 10종 경기에서 승리한 자만이 모든 것을 얻는다는 거다. 이 힘의 논리가 해외에 한국영화를 알리는 데도 적용된다. 한국에서 흥행한 영화들을 주목하고 또 가져간다. 한국 대중에게 선택받은 영화를 통해 한국을 읽으려는, 알 수 없는 카르텔이 형성되고 있다. 이런 시선이 한국영화산업 속에서 흥행을 부추긴다. 더욱더 위험한 것은, 이 산업이 팽창하는 가운데, 젊은 친구들이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독립영화가 제 수명을 다하고, 어느 날 인디영화가 출현했다. 한국의 독립영화는 단순히 인디영화라고 하기엔 부족한 역사성이 있지 않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역사성이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이런 영화들을 만드는 이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영화제를 통해 뜨고 주류영화로 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자극적인 제목을 붙이고, 충격적인 소재를 끌고 들어와, 하여튼 눈에 들려 한다. 언론이 호들갑을 떨면 대중이 몰리고, 반응을 얻으면 제작자가 컨택해 오는데, 영화 만드는 이들이 게임의 규칙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영화에 대한 담론들은 대중의 욕망에 관한 담론들, 산업에 대한 담론들이 돼가고 있다. 누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을까. 정책에 적잖은 기대를 했고, 정책결정자들의 이름에 기대했다. 아직 희망을 버리진 않았다. 단순간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건 80년대의 교훈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노력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 | 우리나라의 영화에서 정책이란 것, 영진위라는 것은 그만큼의 판도를 결정지을 만큼의 권력을 갖고 있는지. 약하다. 여기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는 것도 있고, 정책 자체가 명백한 철학과 오랫동안 축적돼온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지금부터 시행착오를 저지르며 배울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 시행착오만이 확대돼 보여지고 이야기되는 건 아닐까.

정 | 아버지가 없었는지, 나약한 아버지가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 아버지가 죽지 않고 계속 형들을 호명하고 있다는 거다. 그 형들이 우리가 타협하길 바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떤 방식으로 아버지와 작별할 것인가, 물리쳐버릴 것인가에 대해서 자꾸만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형들이 사소한 것들에 사로잡혀 아버지와 싸우지 않는다. 요즘 한국영화가 보이는 두 가지 공통적인 특징은, 사소한 것에 대한 질문, 그리고 주인공들의 죽음에 대한 나르시시즘이다. 죽는데 주변 사람들이 말리지 않는 모습들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 병장이 불현듯 자살했다. 감독은 이들을 만나게 해주려 했다지만, 살아도 상관없는 사람을 기어이 죽였고, 그것에 대해 대중은 침묵을 지킨다. <비천무>에서 주인공은 하여튼 죽는다. 부모는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고. 아들은 부모의 죽음을 보면서 저항하지 않는다. <리베라 메>에서 주인공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간다. 또 한명의 소방관도 그저 나르시시즘을 느끼듯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박하사탕>은 더할 나위 없이 죽음으로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단절을 요구하는 대중의 욕망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용기가 없어 보인다. 사소한 고민에 끈질기게 매달려 거꾸로 큰 고민을 잊고 있다. 이것이 지금 한국영화의 시대정신이 아닌가. 영화와 영화인들 사이에 침묵의 합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요즘 유행처럼 이야기지어진 ‘일상성’이, 지금 영화를 하고 있는 우리의 시대정신은 아닌가.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은 죽음을 바라고, 제작자들은 관객이 그걸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들이 한국영화에만 나타나는 특별한 징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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