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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기자 모임 해체 요구 시위, 일 경찰 ‘영화인폭동사건’이라며 검거령
2001-12-19

“기생 요구하는 악질기자들 습격했다 경찰서 갔지”

그때쯤 찬영회 사건이 있었죠(1931년). 신문사에 학예부 기자들이 모여서 찬영회(贊映會)를 맨들었습니다(1929년). 명분은 각 신문 문예부 기자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고 국산영화, 외화 잘된 거 추천해서 선전해주고 감독, 연기자 신문에 소개한다는 거였습니다. 국산영화 하나 완성되면 찬영회 기자들 초대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대접하면 어떤 신문은 개봉되기 전날 좋게 평 쓰고. 주로 명월관(당시 유명한 요리집- 필자)에서 했죠. 그런데 초대했다 그러면요, 기자들이 “기생들 좀 부를까요” 그럽니다. 권세가 있다고 아주 고자세입니다. 그래 불러야죠. 그때 요릿값, 기생값 갚지 못하면 사람이 대신 붙들려 있었습니다. 나도 두번 인질로. (웃음) 또 여배우, 부릅니다. “너 나하고 연애하면 내가 신문에 인기있게 써준다.” 이 여자가 토라지면 욕설을 하고. 그 기자들 때문에 팬 떨어진 배우도 많고, 눈물 머금고 도피한 여배우도 있고. 이게 다 우리 귀에 들어옵니다. 아주 고질인데 안 하면 선전이 되지 않고 그래서 이런 악습이 오래 계속됐죠.

1930년 섣달그믐에 영화인들끼리 망년회 하다가 슬로건 써서 붙였습니다. ‘찬영회 타도’ 초저녁부터 분위기 삼엄했죠. 찬영회를 뚜드려부셔야 된다, 이거는 영화를 육성하는 게 아니고 아주 망쳐버리는 조직이다, 여배우들 모두 망쳐놓는 위원회다. “옳다!” 모두 박수를 하고. 섣달그믐날이니까 각 신문사에서는 신년호를 발간한다고 밤새면서 기계 돌아갈 땝니다. 즉석에서 망년회가 테러로 옮겨졌죠. 여기저기 개선가를 부르고 기자들을 찾아가서 겁을 주고 그렇게 밤새우니까, 다음날에 순사들이 영화인들 다 잡아갔어요. 다음날 안 잽혀간 사람들이 다 모였죠. 홍개명이, 복혜숙이가 그 날 안 잡혀갔지요. 어째 나서지 못한 친구들은 다 잡혀가고 나선 친구들은 다 빠지고 그랬더구만. 얘길 들으니까 매 맞은 기자들이 경찰서에다 고발을 했어요. 경찰서에서는 이것을 ‘영화인폭동사건’이라고 간판을 붙여 가지고 검거령을 내렸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경찰서에 자수하기 전에 신문기자들을 만나 협상을 했죠. 찬영회를 즉각 해체해라 그랬더니 즈이들끼리 구술 회의를 해요. 그러는 동안에 와악 소리가 들려. 여배우, 남배우 할 거 없이 거 협상하는 데 다 들어왔어요. “니가 얘한테 억지로 뽀뽀했지?” “네.” 산 증인들 쫘악 앉아 가지고 해체 안 하면 이런 거 저런 거 사회에 폭로하겠다 말이야. 그래서 기자들이 찬영회 해체 선언문에 싸인을 했어요. ‘찬영회는 처음 발상은 그렇지 않았는데 중간에 찬영회답지 못한 일이 있어서 자의적으로 해체를 선언한다’ 뭐 이런 문구가 됐어요. 그것을 우리 영화인들은 찬영회 사건이다, 부르죠. 그때 일본놈들은 영화인폭동사건이다, 그랬는데 우리나라 사람들끼리 그런 분쟁이 일어난 재미없는 일이었지만 영화인들끼리 단결된 것을 봐서는 훌륭했다고 봐지지요.

<오몽녀>, 나운규의 마지막 영화

그즈음에 <금강한>(1931) 찍는 데 운규가 불려갔습니다. 이 영화는 원산만이라고 일본의 유명한 국수주의자, 그 사람이 만든 경성촬영소에서 찍었습니다. 원산만네 프로덕션을 한국 영화인들은 안 좋아했습니다. 더군다나 좌경 예술인들은 더 반대했습니다. 그때 운규와 내가 감정이 대립됐습니다.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로 넘어가면서 한국 연기자들의 동요가 많지 않았겠어요?”- 대담중의 이영일) 말이 동시녹음이죠. 사이클이 맞지 않았어요. 토키가 시작이 된다고 해서 무성영화에 출연하던 연기자들이 새로운 자세를 갖춘다거나 발성법을 연구한다거나 하는 변환점은 없었습니다.

<강 건너 마을>(1935) 엑스트라 가운데 차상은이라는 부잣집 자식이 있습니다. 이화동에다가 촬영소를 맨들고 토키시설을 했습니다. 이것이 한국인 손으로 한 토키시설 처음입니다. 거기에 한양영화사(1935)라는 이름을 달고 <아리랑3>(1936)를 토키로 찍었죠(발성영화를 함께 만들기로 의기투합했던 나운규와 이필우는 형편상 각각 별도로 토키 작업을 추진했다. 나운규가 연출한 <아리랑3>와 이필우가 기술적 중심이 되었던 <춘향전>이 동시에 진행되었으나 후자가 먼저 완성되어 1935년에 개봉했고 이 해가 한국 발성영화의 원년으로 기록된다.- 필자).

<오몽녀>(1937)는 운규 마지막 작품입니다. 이거 토키로 된 겁니다. 운규 작품 가운데에서 작품으로서 성공했다 하는 것은 <저 강을 찾아서>(강 건너 마을), <아리랑>(1926) 그 담에 <오몽녀>. 문예작품이면서도 연출, 조명, 카메라도 좋았고. 이게 왜 성공했는고 하니 운규 자신이 출연에서 빠졌기 때문에. 운규가 한 얘기 있습니다. “나는 뛰지 않으면 따분해서 못 본다. 좀 키가 작고 목이 다 굳고 안짱다리고. 그러니까 자꾸 뛰어서 템포가 빨라야 되지 가만있으면 결함이 나타나.” 그래서 운규 작품은 다 뜁니다. 주연배우가 뛰니까 다 뛰어야 됩니다. 관중이 보기에는 지루하지 않고 강력한 이미지가 있으니까 작품이 살죠. 근데 <오몽녀>는 마음 놓고 섬세한 연출을 했거든요. 자기가 뛰지 않으니까. 운규가 이 작품을 할 때 주치의가 따라 댕겼습니다. 이때 벌써 기울어졌을 땝니다.

<한강>(1938, 감독 방한준)을 백이다가 장마가 져서 운규한테 가니까 병이 완전히 기울어지고. 운규(1902. 10. 17∼1937. 8. 9)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 다시 원주에 가서 <한강>을 완료했죠. 고 다음에 고려영화사 이름으로 <도생록>(1938, 감독 윤봉춘)을 촬영했는데 여기에 최인규가 <도생록>에서 처음 조감독을 했습니다(이영일은 나운규·이규환·방한준과 함께 최인규를 일제시대의 리얼리즘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꼽는다. 해방 뒤에도 현장기록적인 <파시>(1946) 등을 만들었으나 전쟁중에 납북되었다. 휘하에서 신상옥이 배출되었다. 신상옥은 자신의 영화적 스승으로 나운규, 찰리 채플린과 함께 최인규를 꼽으면서 ‘뛰어난 테크니션’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필자) <도생록>은 유치진 시나리오. 그 다음에는 고려영화사 <집 없는 천사>(1941, 감독 최인규). <자유 만세>(1946, 감독 최인규)는 해방되던 이듬해입니다. 나중에 <영광의 길>(1953, 감독 윤봉춘)이라고 하는 기록영화도 있었구요. 제 작품 전체가 한 50 되죠, 50 가운데 반가량 출연이고 반가량 연출입니다.

“식민지 백성으로 사느니, 초야에 묻히자”

1944년 봄에, 해방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안 했고, 영원한 식민지 백성이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서울을 떠났습니다. 의정부 가는 중간에 산곡리라고 하는 데가 있습니다. 서울 야당의 거물 김산씨를 찾아가서 “영화 포기하고 일생을 농촌에 묻힐 텐데 어디 갈 만한 데 없느냐” 그러니까 산곡리에 박덕우라고, 독립운동 하다가 쫓겨 들어가서 과수원 하는 친굴 찾아가 봐라. 그 친구 소개로 쪼그만 산을 하나 샀어요.

산곡리에는 기차 구경 못한 사람이 수두룩했어요. 신문화하고는 아주 등졌어요. 소학교 졸업한 사람이라곤 없어. 그래서 여기다 학원을 하나 맨들어가지고, 아이들 가르치면 좋겠다. 그러니까 집사람도 응했어요. 전에 교원 생활 한 경험이 있거든요. ‘산곡학원’ 간판 떠억 붙였습니다. 제가 초대 원장이 됐죠. 동네 돌아다니면서 애들 보내달라고 그러니까 쪼꼬만 아이들부터 열일곱살 되는 아이들까지, 수두룩하게 왔는데. 교육의 힘이라는 걸 그때 내가 느꼈어요. 그렇지만 연필, 공책 살 수가 있어요? 서울서 신문지를 가지고 내려갑니다. 이거 참 우스운 얘기지만은 신문지 꼭대기에 심(신문 용지의 여백)만 있지 않습니까? 그걸 가위로 오려서 거기다가 가갸거겨를 쓰고. 연필은 삼등분해 가지고 셋씩 노놔. 거긴 하두 시골이라 가갸거겨 가르친다고 뭐라 그럴 사람도 없어. 이렇게 한 일년 하고 나니까 동네가 다 밝아져요. 한 8개월 만에 학예회를 했습니다. 마당에다 무대를 맨들어놓고 학예회를 했더니 부락민들이 참 하얗게 모여왔어요. 지금은 산곡학교로 완전히 승인이 돼서 지금꺼정 내려오고 있어요. 그때 가서 씨 뿌려논 거지. 지금도 거기 내려가면 동네 노인들이 환영합니다. 그랬는데 일년 쪼끔 지나서 해방됐습니다.

서울 올라와서 맨든 작품이 계몽영화사 <유관순>(1948)입니다. 기술로나 연출로나 아주 보잘것없고, 더군다나 16미리로 맨들었습니다. 그때 서울 인구가 한 삼, 사십만 정도 되나. 중앙극장하고 동양극장 동시상영을 시켰습니다. 한 극장에 열 몇일씩 해가지고 서울 총인구의 일할 이상 동원했다는 것은 한국 영화사상 처음입니다. 그러나 순전히 오랜 동안에 받은 설움과 감격된 속에서 만든 게 <유관순>이거든요. 해방 직후 그 감격 속에서 <유관순>, <안중근 사기>(1946, 감독 방의석, 계몽영화협회), <윤봉길 의사>(1947, 감독 윤봉춘, 계몽영화협회) 그런 걸 맨들었고. 1950년 6·25 동란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고향의 노래>(1954, 감독 윤봉춘) 이런 거 만들어지고, <유관순>은 그 동안에 세번 만들었습니다. 처음에 <유관순> 주연배우는 고춘희, 십년 만에 도금봉(1959. 동보영화사), 한 십년 후에 엄앵란(1966, 아성영화사). 이렇게 세번 만들어졌습니다. 그것도 처음만한 감격은 없었고, 첫 작품이 그림도 잘 안 나오고 보잘것없었지만 감격은 참 컸었고. 해방이 된 후에 우리는 계몽문화협회, 이런 이름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구영, 방의석, 조중헌, 손용진, 나 이렇게 다섯 사람입니다. 해방 직후에 십육미리 영화를 맨든 것은 우리가 아마 처음 될 껍니다.

정리 안선주/ 중앙대학교 영화과·이영일 출판프로젝트 연구원 babtong80@hanmail.net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