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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크루즈와 함께 <디 아더스> 제작한 재미교포 박선민을 만나다
2002-01-11

“한국의 아메나바르를 찾고 싶다”

“얘들아 모두 앉았니? 지금부터 얘기를 시작할게.” 니콜 키드먼의 나직한 목소리로 시작하는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디 아더스>의 다음 화면은 영화의 내용을 암시하는 듯한 그림과 그 위에 새겨지는 제작진의 이름. 별 관심없이 지나치려는 관객의 눈에 하나의 이름이 쏙 들어온다. ‘Sunmin Park’, 한국인이라고밖에 달리 생각할 길이 없는 이 이름의 주인공은 <디 아더스>의 프로듀서 중 한명인 박선민이다.

영화의 개봉을 앞둔 지난 1월4일 한국을 찾은 그녀는 새벽녘 공항에 도착한 이래 오후까지 눈꺼풀을 붙여본 적이 없는 탓에 피곤이 배어 있었지만, 시사회 반응이 좋다는 소식이 뽀빠이의 시금치라도 된다는 듯 시종 즐거운 모습이었다. 재미동포 1.5세인 그녀는 1999년 <버라이어티>가 선정한 ‘주목할 만한 프로듀서 10인’ 중 한명으로 뽑혔으며, 같은 해엔 첸 카이거 감독의 <황제와 암살자>에 프로듀서로 참여하기도 했던 인물. 미국 샌타모니카에 사무실을 둔 영화·미디어 컨설팅 업체 ‘맥스 미디어’를 운영하며 호주 필름커미션과 스페인, 한국, 일본, 이탈리아 등의 영상 관련 업체를 파트너로 둔 수완있는 비즈니스 우먼이기도 하다.

<오픈 유어 아이즈> 선댄스에 소개

<디 아더스>에서 그녀가 한 일은 꽤나 많다. 구상단계 때부터 시나리오를 검토했고, 이 영화를 스페인어가 아닌 영어로 제작하기로 결정했으며, 톰 크루즈, 미라맥스 등 미국쪽 파트너를 찾아내 제작에 동참시키는 일 등등. 또 제작기간 내내 촬영지인 스페인에 머물면서 이 글로벌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것과 미국 파트너들과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만들어내는 일도 그녀의 몫이었다.

박선민이 <디 아더스>에 참여하게 된 것은 비즈니스 파트너로 알고 지냈던 스페인 소시에다드 제네럴 드 시네의 대표이자 이 영화의 프로듀서 중 하나인 페르난도 보바이라와의 친분이 계기가 됐다. 보바이라와 스페인영화의 세계시장 진출에 관해 논의를 벌이던 그녀는 자신이 인상깊게 봤던 <떼시스>의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이 이 회사와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달음에 <오픈 유어 아이즈>를 제작하고 있는 아메나바르 감독을 찾아간 그녀는 이 영화의 미국 진출과 차기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디 아더스> 프로젝트에 깊은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 영화를 국제적 프로젝트로 키우기 위해 그녀는 우선 <오픈 유어 아이즈>를 선댄스영화제에 소개했다.

선댄스가 열리는 파크시티에선 뜻하지 않게 커다란 행운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톰 크루즈의 에이전트였으며 비즈니스 파트너인 폴라 와그너가 이 영화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훗날 <바닐라 스카이>로 재탄생되는 이 작품의 리메이크판을 만들고자 했던 톰 크루즈쪽은 아메나바르 감독과 접촉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그녀가 ‘중매쟁이’ 역할을 했다. <디 아더스>의 시나리오가 나온 뒤 미국의 미라맥스, 프랑스의 카날플러스 등에 투자 제안서를 보낼 때, 톰 크루즈의 ‘크루즈-와그너 프로덕션’을 빼먹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제안서를 보낸 지 이틀이나 지났을까, 톰 크루즈의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적극 참여하겠다고.” 이 시대 ‘여인의 초상’ 니콜 키드먼을 캐스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택이었다.

내가 본 매력의 배우, 니콜 키드먼

<디 아더스>를 글로벌 프로젝트로 만들기로 결정했을 때, 아메나바르 감독은 스페인에서 촬영하길 원했고, <떼시스>와 <오픈 유어 아이즈>에 참여했던 스탭 중 영어가 가능한 이들로 제작진을 꾸리고 싶다는 의사도 함께 표시했다. 때문에 실내 공간은 마드리드 인근 알라모에 설치된 세트장에서, 야외신은 스페인 서부의 산탄데르라는 해안가 도시에서 촬영됐다. 과거 영국과의 무역이 활발히 이뤄지던 항구인 이곳에는 부유한 영국인들이 지어놓고 살았던 저택들이 여러 채 있어 영화의 배경이 된 영국풍 가옥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배우들이 모두 영어권 국가 출신인데 비해 스탭의 대다수는 스페인 출신이다보니, 카메라 앞의 공용어는 영어였지만 카메라 뒤쪽은 ‘스페인어권’이라는 재미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금슬 좋은 부부였던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은 아예 마드리드 인근에 집을 빌려 촬영 기간 내내 온 가족이 지냈다고 한다. 박선민은 니콜 키드먼 같은 세계적 스타와 함께 작업하는 것이 처음이라 내심 긴장도 했지만, 시나리오와 자신의 캐릭터에 애정을 갖고 있었던 그녀의 ‘프로정신’ 덕분에 오히려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니콜은 굉장히 스마트한 배우다. 시나리오를 꼼꼼히 읽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 뒤 연기에 임한다. 만약 자신의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 상황이나 설정이 있을 때, 그녀는 감독과 논의를 거쳐 고쳐나갔다. 사건보다는 인물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서였는지,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니콜은 캐릭터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있었다.”

글로벌 프로젝트를 꿈꾼다

그동안 박선민이 ‘엮어낸’ 프로젝트는 <디 아더스>뿐이 아니다. 첸 카이거의 <황제와 암살자> 역시 일본의 제작사 NDF 대표 이세키 사토루와 의기투합해 만들어낸 국제적 합작품이다. 그녀가 프로듀서한 첫 작품 <미스터 P의 춤추는 스시바>도 일본감독과 미국배우를 기용해 베트남 등지에서 촬영했다. 그녀가 앞으로 펼쳐나가려는 일도 말그대로 글로벌하다. “현재 프랑스의 2명, 일본의 2명, 호주의 2∼3명, 스페인에선 알레한드로 외에 1명의 감독들”과 그녀는 지속적으로 작품에 관한 논의를 펼치고 있다. “‘뉴웨이브 오브 파이낸싱’을 만들고 싶다. 즉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힘을 빌리지 않고, 세계 곳곳의 뜻이 맞는 파트너들과 느슨한 네트워크를 통해 의미있는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것 말이다”는 그녀의 꿈은 원대하다.

그녀에게 무슨 특별한 것이 있길래, 세계를 대양을 오가며 들락거리며 이런 굵직한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는 것일까. UCLA에서 학부를 마치고, 콜럼비아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녀의 전공은 뜻밖에 정치학이다. “17살 때부터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고, 대학에 다니던 1989년부터 맥스미디어의 전신인 사업체를 만들어 영화와 방송 프로그램을 거래했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각국을 돌아다니게 됐고, 자연 아는 사람도 많아졌다.” 스스로가 밝히는 이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궁금증은 “영화라는 것도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니, 영화를 매개로 한 외교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전공분야와 관련된 ‘희망사항’까지 듣고나면 조금은 풀린다.

현재 <디 아더스>의 뒤처리를 하랴, 아메나바르와 함께 작업하기 원하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제의를 접수하랴, <투 퓨어>라는 제목의 자신의 첫 연출작을 마무리하랴, 눈코 뜰 새 없는 그녀가 한국을 찾은 표면적인 이유는 <디 아더스>를 홍보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녀의 글로벌한 꿈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단순한 성격의 방문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아니나 다를까, “몇 군데서 소개받은 한국감독들이 있어 만나볼 생각”이라는 조심스런 답이 나온다. 한국영화의 성장세에 주목하고 있다는 그녀는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몇명의 감독, 그리고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또다른 감독들과 만날 예정이다. 모국에 대한 애정 반, 비즈니스 차원 반쯤으로 보이는 그녀의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은 가까운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이어진다. “아메나바르가 스페인영화 전체의 격을 올렸 듯, 한국의 감독 중 한명만 제대로 소개되면 한국영화는 할리우드를 포함한 세계에서 큰 주목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