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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이야기> 음악, 이병우
2002-01-30

“고왔나요? 다음번엔 끈저끈적한 호러에요”

“하루하루 내가 무얼 하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거진 엇비슷한 의식주로 나는 만족하더군/ 은근히 자라난 나의 손톱을 보니/ 난 뭔가 달라져 가고/ 여위어가는 너의 모습을 보니/ 너도 뭔가…/ 꿈을 꾸고 사랑하고 즐거웠던 수많은 날들이/ 항상 아득하게 기억에 남아 멍한 웃음을 짓게 하네.(후략)”(이병우 작사·작곡 <출발>, 어떤날의 <어떤날 2집> 중에서)

누군가의 소개로 만났다고만 하기엔, 그와 그녀는 너무 어울리는 한쌍이다. 기타리스트 이병우씨와 환상의 소녀 마리. 거칠고 연약한 일상의 결을 기타의 떨림에 실어나르는 이병우와 어른이 돼버린 한 소년의 성장기, 그립고도 아릿한 기억의 동화를 들려주는 애니메이션 <마리이야기>는, 어쩌면 필연적인 만남이라 할 만큼 닮은 어떤 빛깔을 공유한다. 무감한 일상 속에 잊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망각 속에 묻어둔 꿈, 소중한 추억, 혹은 잃어버린 무언가에 대한 은은한 그리움.

이를테면 은근히 자라나는 손톱, 어딘지 여위어진 모습처럼 슬그머니 달라져가며 엇비슷한 의식주의 일상에 만족하는 자신을 문득 느끼고, 아득하게 기억에 남은 꿈을 떠올리는 <출발>은 이병우씨가 10년도 더 전에 지은 곡이지만, <마리이야기>의 정서와 묘하게 맞닿아 있다. 습관처럼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며 무심히 눈오는 창가로 눈을 돌리다가 갈매기를 발견하고, 옛 친구 준호와 오랜만에 재회하면서 새삼 ‘마리’와 유년의 추억에 잠기는 남우의 회상에 말이다. 그리고 눈을 흩뿌리는 흐린 하늘과 도시의 빌딩숲 사이로 활강하는 흰 갈매기의 비행 위로 흐르는 어쿠스틱 기타와 허밍의 아련한 푸근함으로 문을 연 <마리이야기>의 음악은, 멀리 바닷가 마을 사춘기 소년의 일상과 환상으로 회귀하는 여정을 이끈다.

중학교 2학년, "기타를 치며 살아야겠다"

잘 알려져 다시피 이병우씨는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자신의 음을 들려준 뮤지션이다. 조동익씨와 함께 듀오 ‘어떤날’을 꾸려 포크와 뉴에이지, 재즈를 넘나드는 음악과 일상의 정서를 섬세하게 담은 가사로 듣는 이의 감성을 두드려왔고, 89년 <내가 그린 기린 그림>부터 지금까지 4장의 솔로음반과 공연을 통해 풍부한 기타의 음색으로 자신만의 시선을 들려줬다. 서울예대 재학중이던 84년에 조동익씨를 만나 의기투합한 ‘어떤날’은, 우리 대중음악사에서도 보기 드물게 세련된 실험과 ‘그들만의 감성’을 지닌 듀오였다. 85년 옴니버스 음반 <우리노래 전시회I>에 <너무 아쉬워하지마>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들국화 1집에 실린 <오후만 있던 일요일>, 86년과 89년에 나온 어떤날 1집과 2집 등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일상에서 간과되기 쉬운 일상의 소소한 풍경과 내밀한 꿈, 여린 감성의 물기를 머금은 함축적인 가사와 은은하면서도 서정이 깊은 선율을 탄탄한 기교로 빚어낸 어떤날의 음악은 기존 ‘가요’와는 다른 낯선 울림으로 다가왔으니까. 이때부터 첫 독집 <내가 그린 기린 그림> <혼자 갖는 茶시간을 위하여> <생각없는 생각> <야간비행> 등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연주음반을 거치는 동안, 이병우씨는 일렉트릭과 포크, 클래식 기타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기타로 만들어낼 수 있는 풍요로운 음의 결을 탐사해왔다.

높은 음계와 낮은 음계 사이를 한음 한음, 또는 반음, 프렛과 프렛 사이에 감춰진 음들까지 찾아 오르내리며, 끝없이 흐르는 아르페지오와 끼익 하고 작은 탄식을 내뱉듯 멈춰서는 여운, 경쾌하게 징징거리는 질주를 오가는 그의 기타 연주는 포크와 록, 재즈와 클래식의 장르 구분을 무색게 하며 삶이 지고 있는 다양한 감정을 토로하곤 한다. 11살 때부터 기타를 잡고, 제프 벡의 <Diamond Dust>에 취했던 중학교 2학년 때 “기타를 치며 살아야겠다”고 맘먹었다는 그에게 기타가 단순한 악기 이상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어떤날의 활동을 접고 첫 독집을 내놓은 89년에 오스트리아의 빈 국립음악대학 클래식 기타과로 유학을 떠난 것도, 졸업 뒤 96년에 다시 미국의 피바디 컨서버토리에서 4년을 수학하며 클래식에 빠진 것도, 좀더 풍부한 기타의 언어, 음악의 언어를 찾고 싶던 고민이 바탕에 깔려 있다.

운신의 폭에 제한이 없는 개인 음반과 달리, “내 음악이 주가 아니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만족시켜야 하는” 영화음악은 쉽지 않았다. 이병우씨가 처음 영화음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빈 유학을 마치고 잠시 귀국해 있던 96년. 임종재 감독의 <그들만의 세상>과 임순례 감독의 <세친구>가 거의 동시에 그의 손길을 찾았다. 음악 자체가 많이 쓰이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처음 해보는 거라” 끌렸고, “감독이 원하는 대로 해야겠다는 충성심이 강했던” 작업이었다고.

애니메이션, 음악으로 생명을 불어넣죠

<그들만의 세상>에서 만난 인연으로, 그는 미국에서 4년 만에 돌아오자마자 임종재 감독의 <스물넷>의 음악을 맡게 됐다. “젊은 애들이 앞으로 뭘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사랑도 하고, 아주 평상적인 이야기”가 좋았다는 <스물넷>은, “20대 중반의 허한 느낌”을 살리고자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의 간결한 서정을 택했다. 한창 작업을 하고 있던 지난해 1월 <마리이야기>에서 섭외를 받은 그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평소의 호감에 따라 흔쾌히 합류했다.

“실사들이 사실 그렇게 아름답지 못하잖아요. 애니메이션은 배우들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감정이 없는 것에 감정을 이입하니까 하나하나 생명력을 줘야 한다는 점에서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애니메이션이라 해도 다른 이의 귀에 맞춰가고, 기본적인 작업량이 많은 것은 다를 바 없어 쉽지 않았다고. 무엇보다 “전체 톤들이 다 파스텔톤에 뽀얀” 그림에 녹아들고, 주관객층으로 생각한 20대 여성들은 물론 애니메이션의 소구층인 아이들까지 들을 수 있는 음악의 기준을 어디다 둬야 할지 고민스러웠다는 고백이다. “대중적”으로 가자는 결론 끝에 나온 <마리이야기>의 음악은, 어떤날과도, 이병우 개인의 작업과도 다르다. 오프닝에 흐르는 <우리가 사는 곳>처럼 그의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는 기본에다, 오보에와 플룻, 트럼펫 등 다양한 관악기의 목가적인 감성과 현악단이 가세한 15인조 실내악단에 컴퓨터프로그래밍까지 감성적인 선율을 살리면서도 다채로운 사운드를 들려준다. 소리의 울림이 다른 교회에서 실내악단과 약음기를 끼고 녹음을 하고, 미국 유학 시절부터 알던 후배 강경한씨의 도움을 얻은 컴퓨터프로그래밍 작업으로 물 속에서 살짝 눌린 듯한 소리의 질감을 비롯해 따뜻한 느낌의 미디음악을 만드는 등 다양한 시도도 즐겼던 눈치다.

비오는 바다, 마리와 남우가 서로를 안고 떠오르는 장면들이 개인적인 추억과 겹쳐 더욱 좋았다면, 타악기 위주로 음악을 절제한 감독의 선택과 달리 좀더 화사한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던 판타지 부분은 미련이 좀 남기도 했다. 어쨌거나 “너무 아름답고 착한” <마리이야기>를 지나왔으니 “말간 것말고 끈적끈적한”, 좀더 성인 취향의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그는 사실 김지운 감독의 <메모리즈>를 차기작으로 정해뒀다. 서울예대 시절부터 막역한 지우인 감독의 제안이기도 하고, “호러와 맞을진 모르겠지만 안 해 본 장르”기 때문. 3월 말 혹은 4월 초쯤에는, 계속 미뤄온 솔로음반을 드디어 낼 예정이다. “절대적으로 아름답다는 톤을 매일같이 연습하는 클래식을 하다보니, 그 이외의 음들에 애착을 갖게 됐다”며 “아름답지 않은 것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그의 음악은, 아직 경계를 모르는 듯하다.

황혜림 blauex@hani.co.kr약력

1965년 서울생·서울예전 졸업·조동익과 듀오 ‘어떤날’로 활동·솔로 기타연주자 및 세션으로 활동·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 미국 피바디 컨서버토리에서 수학·영화 <그들만의 세상> <세친구> <스물넷>, 애니메이션 <마리이야기>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