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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마부인> 감독 정인엽 인터뷰
2002-02-08

“섹스하는 인생이 왜 3류냐고 묻고 싶었지”

정인엽(62) 감독은 70년대 <내가 버린 여자>의 정소영 감독, <뻐꾸기는 밤에 우는가>의 정진우 감독과 함께 흥행 트리오를 이뤘던 인물이다. 고(故) 김기영 감독 아래에서 연출부 생활을 시작했고, 27살이던 1965년, 영일만에서 석유시추사업을 벌였던 한 젊은이의 실화를 그린 영화 <성난 아이들>로 데뷔한 뒤 지금까지 40여편을 만들었다. <명동 왈가닥>(1967), <먼데서 온 여자>(1970), <청색시대>(1976),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1977) 등 주로 코미디와 멜로영화를 번갈아 연출한 그가 이름을 알린 작품은 <꽃순이를 아시나요>(1978). 정윤희와 하명중이 출연한 이 호스티스영화는 당시 스카라극장에서 개봉, 21만6천여명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1982년 <애마부인>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일련의 농도 짙은 멜로드라마를 연이어 선보였던 그는 1992년 <성애의 침묵>을 마지막으로 메가폰을 내려놓았다. 현재 압구정동에 새 둥지를 차려놓고 10년 만에 다시 촬영현장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는 노감독을 찾았다.

<애마부인>을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1970년 말 미국에 연수를 갔다. 거기서 당시 우리나라에서 접할 수 없는 공포영화나 에로티시즘영화를 많이 접했다. 그러다 뉴욕 51번가에 있는, 내 키만한 남자 성기 2개가 서 있는 극장에서 말로만 듣던 <칼리귤라>를 봤어. 장장 두 시간 반이나 되는 영화를 보고서, 아…, 나는 크게 충격받았어. 특히 말과 직접 성관계를 갖는 장면을 마주하고선 놀라 자빠졌지. 그렇게 1년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비행기 안에서 그 장면이 갑자기 떠오르는 거야. 우리나라도 그런 에로티시즘 영화를 만들면 되지 않겠나 싶었고. 나 역시 섹스없는 사랑은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주의였던데다, 국내에서 이전에 베스트셀러 소설였던 조수비씨의 <애마부인>이 겹쳐 떠오르면서 본격적인 애정영화를 만들어보자고 맘먹었던 거지.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원작자인 조수비씨를 찾아갔어. 영화하자고.

소재와 표현에서 검열을 우려하지 않았나.

제작자들에게 이제 우리도 이런 장르의 영화가 나와야 한다고 설득했는데, 다들 반대하는 거야. 심의가 나올 리 없다고 다들 고개를 저었어. 나야 어차피 사람들 생활 속에서 성을 이야기하는데, 그게 왜 안 되냐, 난 된다 계속 그랬지. 그러다 연방영화사 최춘지라는 사람을 만나서 하게 됐어. 근데 그때가 군사정권이니까 여주인공 가슴도 보여줄 수 없던 시절이야. 섹스라는 언어도 대사에 쓰지 못했지. 요즘이야 아침, 저녁 밥 먹듯이 쓰지만. <애마부인>에서는 그래도 딱 한번 썼어. 그래놓고서 검열에 걸릴까봐 걱정 많이 했지. 여배우 노출만 하더라도 <애마부인> 보면 극중에서 안소영이 슈미즈만 입고서 가시덤불을 헤쳐가는 장면이 있는데, 비내리는 설정이라 속살이 다 비치거든. 그래도 여배우가 옷을 벗은 건 아니니까 검열을 통과했지. 심의받을 때는 일부러 아주 어둡게 프린트를 떠서 잘 보이지 않도록 편법을 쓰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래서 <애마부인>은 잘린 장면이 한 군데도 없어.

<애마부인>에서 여자는 결국 ‘집’을 선택한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자유부인>보다 보수적인 결말이라고 비판하는데.

내 보기엔 해석을 잘못한 거야. 마지막 장면을 보면, 여주인공이 집으로 돌아와 요란한 치장을 하고 남편을 기다리는데, 남편이 못 들어온다고 전화를 하잖아. 근데 그녀가 전화를 받는 표정을 보면, ‘그래 이제는 너 안 와도 좋아’ 하는 식이야. 굳이 <자유부인>처럼 집 밖에서 떠돌아야 하나. <애마부인>에서는 이제 합법적인 선언을 하는 거다. ‘너도 그러냐, 나도 그럴 수 있어’ 하는 거다. 그게 한단계 위라고.

안소영, 오수비 등은 이후 엇비슷한 영화들에 출연하면서 소진됐다.

한편이 너무 히트해서 그래. 그러니까 그런 영화들이 계속 들어오는 것이고, 또 안소영 같은 경우는 여기저기 노래도 하러 다니고. 요즘이야 배우들 이미지 관리를 따로 해주지만, 그땐 주위에서 충고해주는 게 고작이었거든. 내 그때도 안소영에게 주연만 하려고 하지도 말고, 에로영화도 그만 하라고 했어. 근데 말을 안 듣더라고. 형편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이해는 가지만 안타깝지. <파리애마>에 나온 유혜리만 하더라도 내 말을 들었어. 그래서 영화 끝내자마자 대학로에 있는 실험극단에 소개해줬고, 거기 무대에서 한동안 연기를 했다고. 그러니까 이후에 다른 영화에도 나오고 지금까지 TV에 나오는 것 아니야.

<애마부인>을 두고서 당시에도 찬반론이 격했다. 지금 스스로 돌아보면 어떤가.

에로티시즘의 장을 열었다는 말도 들었지만 이후에 천편일률적인 에로영화들이 쏟아져 나온 게 다 나 때문이라고 욕도 무지 많이 먹었다. 내가 다 뒤집어쓴 셈인데. 근데 그때 나로서는 섹스하면 무슨 큰 죄인 양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게 아니라고 영화로 말해주고 싶었던 거야. 그게 무슨 잘못이고, 그런 인생이 왜 3류냐고 묻고 싶었던 거지.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성은 영원한 영화적 소재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어. 앞으로 내 꿈도 완성도 높고 에로틱한 영화 한편 만드는 것이고.

글 남동철 namdong@hani.co.kr·이영진 anti@hani.co.kr·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 ▶ 불능의 시대 밤의 여왕 <애마부인> 20년, 그 환각과 도피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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