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News > 국내뉴스
<쓰리> 홍콩 촬영현장
2002-04-02

3인3색으로 부르는 `공포의 레퀴엠`

김지운·진가신·논지 니미트부르 옴니버스 연출, 3국 합작영화 <쓰리>, 홍콩 촬영현장을 가다

홍콩의 ‘할리우드 불레바드’는 서울로 치면 청담동쯤에 해당한다. 작지만 고풍스런 카페와 쇼윈도를 세련되게 장식한 의류·잡화점 사이로 사람들이 북적댄다. 그 거리 한모퉁이에 ‘경찰 기숙사’라는 간판이 걸린 서민용 아파트가 자리잡고 있다. 수십년 전 영국인들이 지었다가 지금은 철거 직전에 놓여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 영국이 떠난 뒤 소속감이 텅 비워진 홍콩의 무중력 상태를 상징하는 것 같다.이 아파트가 한국, 홍콩, 타이 세 나라가 함께 만드는 옴니버스영화 <쓰리>의 세 에피소드 중 하나인 ‘과년회가(過年回家)’의 무대이다. 세 나라의 기자 80여명을 불러 촬영현장을 공개한 지난 23일 오후,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이 크레인 끝에 매달린 카메라의 동선을 지휘하고 있었다. 아파트 3층의 한 집을 베란다 밖에서 비추던 카메라가 1층까지 훑고 내려오더니 주인공 여명이 까만 쓰레기봉지를 양손에 들고 나타나 버리고 되돌아간다. 볼품없는 장면이지만 촬영종료 일주일을 앞두고 3국의 제작진은 마지막 야외촬영날을 홍보의 계기로 삼았다. 이미 자신이 맡은 에피소드의 촬영을 끝낸 김지운(38)과 타이의 논지 니미부트르(40)가 지각생 진가신(40) 감독의 촬영현장을 함께 지켜봤다.`공포`만 있으면 나머지는 맘대로<쓰리>는 처음 시도되는 옴니버스 형식의 아시아 3국 합작영화이다. 타이의 <쉬리>로 불릴 만큼 흥행에 성공한 <낭낙>의 논지 니미부트르는 물론이고 <반칙왕>의 김지운, <첨밀밀>의 진가신 모두 관객동원력이 있는 감독들이다. 그러나 영화스타일은 제각각이다. 전통사회에서 일어나는 업의 대물림을 서사적으로 풀어내는 게 논지라면, 김지운은 상상력과 장르변주로 현대사회를 풍자한다. <첨밀밀>이 그렇듯 진가신은 멜로 안에 만남과 헤어짐의 이치까지 담아내는 자근자근한 목소리의 소유자이다. <쓰리>는 ‘두려움’ 내지 ‘공포’라는 키워드와 30분 안팎이라는 분량만 공통분모로 잡고서 세 감독이 자기 하고 싶은 얘기를 자기 방식으로 찍는다. 영화산업적으로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 더해 셋의 영화가 한데 묶여 어떤 화음을 낼지 여러모로 관심을 끈다.감독들이 자기 입으로 설명한 세 에피소드의 개요만 봐도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우연한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가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이 여자를 찾아나선 남편도 이상한 일을 겪고 두 사연이 충돌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된다. 언젠가 신도시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를 갔다가 착상을 얻었다. 모델하우스는 젊은 부부에게 환상을 심어준다. 신도시 역시 상류층으로 향하는 욕망의 징검다리이다. 그러나 그 환상과 욕망에는 뒤틀린 허위의식도 있을 것이고, 그걸 실현시키려면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할 것이다. 그게 공포스러웠다.”(김지운 ‘메모리스’)“타이의 전통인형극은 저주와 관련이 많다. 실제로 인형극 하는 사람들에게 저주스런 일이 벌어지곤 했다. 이번 영화의 인물들은 쓰러져가는 전통인형극을 다시 세우려고 애쓰지만 수포로 돌아간다. 거기서 저주가 등장한다. 인간들이 안 하려고 하면서도 하고 있는 짓,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아 떠나질 못하는 것들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생겼는지 더듬어보려 했다.”(논지 니미부트르 ‘휠’(wheel)) “중국에서 온 의사가 죽은 부인의 시체를 집 안에 놓아두고서 방부제로 닦으면서 산다. 죽은 부인을 보내지 않으려는 남자의 집착이다. 이게 어떻게 공포스런 느낌을 줄지 아직은 모르겠다. 시체를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매우 추상적이어서 편집을 해봐야 알겠다.”(진가신 ‘과년회가’)김지운 감독, 가장 늦게 합류, 가장 먼저 영화 완성 이 특이한 프로젝트는 우연한 계기가 시작이었다. 99년 타이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에서 논지와 진가신이 만났다. 마침 진가신은 타이말을 잘 했고, 둘은 범아시아 합작영화를 만들자는 데에 의기투합했다. 다음해 4월 홍콩영화제에 <반칙왕>이 출품됐을 때 진가신과 김지운이 만났다. 그때는 합작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한국의 마땅한 감독을 찾던 진가신은 영화사 봄의 오정완 대표를 통해 결국 김 감독과 손을 잡게 됐다. 그해 겨울부터 진가신을 중간 다리 삼아 세 감독 사이에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갔고 구로자와 기요시, 나카다 히데오, 야구치 시노부 같은 일본 감독도 거명됐다. 그러나 독립영화 찍듯 제작에도 관여하는 일본 감독들은 바빠서 일정을 맞춰주질 못했다. 또 그러는 사이에 자기 구상을 떠올린 김지운이 자기 에피소드의 분량을 30분에서 더 줄인다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김 감독은 그때 ‘메모리스’ 아닌 장편에 가까운 다른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었다). 일본을 제치고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셋이 처음 함께 만난 뒤 여러 차례 회동했다.“한국말이 영어로, 다시 타이말로 바뀌고 하다보니 처음에는 서로들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놓다가 나중에는 말 짧게 하라며 남의 말을 자르기 일쑤였다. 결국 ‘공포를 다룬다’는 한 가지 원칙만 정하고 각자 시놉시스를 써서 주고받기로 했다. 그런데 내 ‘메모리스’의 촬영이 다 끝난 뒤에서야 다른 둘의 시놉시스를 받았다. 요것보다 조금만 더 잘 만들면 되겠다 싶었던 모양이다.”(김지운) “초자연적인 것에서 비롯되는 공포, 그건 아시아인의 보편적인 관념이기도 하다. 그걸 다루자고 했을 때 나는 썩 내키지가 않았다. <낭낙>에서 했던 걸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낭낙> 이후 세월이 흐른 만큼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서도 더 성숙한 사고를 보여주자고 생각했다.”(논지 니미트부르) “코미디는 각국마다 정서의 미세한 차이가 있어서 함께하기가 힘들다. 사랑영화는 모두 이해할 수 있지만, 아직은 이른 감이 있다. 공포영화가 가장 적합했다.”(진가신)총제작비 250만달러가 들어가는 <쓰리>는 오는 8∼9월 사이에 세 나라에서 동시에 개봉할 예정이다.

<사진설명><쓰리>의 세 감독. 왼쪽부터 논지 니미부트르, 진가신, 김지운. 진가신 감독과 잠시 얘기를 나누는 여명. 그는 이날 촬영으로 자기 연출 분량을 모두 마쳤다. 실내장면이 많은 <과년회가>의 몇 안 되는 야외촬영에 크레인 등이 움직이느라 분주하다(왼쪽부터).홍콩 = 임범 isman@hani.co.kr▶ 진가신 감독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