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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이야기 - 신입생을 위하여
2001-03-17

도정일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나는 지난번 것과 마찬가지로 이 글도 미국 버팔로라는 곳에서 쓰고 있지만 지금쯤 새내기들을 맞아 시끌벅적할 우리의 대학 캠퍼스들이 눈에

선하다. 해마다, 그것도 고목에 물오르고 개구리 잠깨는 봄의 시작과 함께, 눈빛 초롱한 신입생들을 만난다는 것은 한국 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큰 행복 가운데 하나이다. 봄학기가 대개 1월에 시작되는 미국에서는 우리처럼 새내기를 맞는 춘삼월의 설렘을 경험할 수 없다. 내가

머물고 있는 버팔로는 경상도보다 더 클 성싶은 호수를 양쪽에 하나씩 끼고 있어 3월에도 무시로 흐린 눈발이 분분하고 4월이 지나야 간신히

봄이 오는 고장이다. 여기서 차로 30분 거리의 나이아가라 폭포 주변에는 물보라를 뒤집어쓴 나무들이 투명한 얼음옷을 아직도 두께두께 입고

있다. 나무들이 얼어죽지 않는 것이 기적 같다. 아니, 얼음집(igloo)이 에스키모에게 집이듯 나이아가라의 나무들에게는 얼음옷이 겨울옷인지

모른다.

돌연한 깨침처럼, 여행자는 흔히 두 가지 만남을 경험한다. 그는 여행길에서 많은 것을 보되 그가 본 것의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한다. 그가

본 새로운 것들, 아름다운 것들, 탐나는 것들이 제 아무리 많아도 그는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소유의 왕국에서 해방된 사람처럼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소유할 수 없다. 여행이란 그러므로 소유와 매달림과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 낯선 자유와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는 남의 나라 타자(他者)의 고장에 와서 어럽쇼, 어찌된 건가, 거기서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처음 보듯 제 나라 자기

고장,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영국 작가 G. K. 체스터튼이 했던 말(“외국 땅에 발을 딛는다는 것은 자기 조국에 발을 딛는 것이다”)

그대로 그는 타지에서 고국을 만난다. 여행은 그러나 이런 두개의 만남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세 번째 만남이 있다. 제 나라에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이미 이전의 자기가 아님을 문득 깨닫는다. 남의 고장에서 제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제 나라에서도 남의 고장을 발견한다. 그에게

가장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에서 그는 그가 몰랐던 타자의 얼굴을 만나는 것이다. 그는 바뀌어 있다.

대학을 다닌다는 것과 여행의 경험 사이에는 모종의 유사성이 있어보인다. 여행의 경우처럼 대학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것, 고정관념, 굳어진 가치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 대학생활이다. 무언가를 단단히 움켜쥐기 위해, 어떤 것에 매달리고 집착하기

위해 대학에 가는 이가 있다면 그는 번지수를 잘못 잡은 사람이다. 우리는 누에고치가 되기 위해 대학에 가지 않는다. 모래에 머리 처박는

타조처럼 자기의 믿는 것에만 열심히 머리 파묻기 위해서라면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된다. 쥐었던 것도 일단 놓는 곳, 거기가 대학이다. 놓지

않고는 우리가 대학에서 새로운 것을 만날 가능성은 없다. 몸을 가두는 육체의 감옥이 있다면 혼을 가두는 정신의 감옥도 있다. 대학은 정신의

가두리 양식장이 아니라 여행자의 행로처럼 열린 바다, 넓은 하늘, 트인 지평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주인공 걸리버는 난쟁이, 거인, 철학자, 말들의 나라를 여행하고 ‘야후’(Yahoos)족도 만난다. 이 나라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 속의 세계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나라들의 여행기에서 18세기 영국 독자들이 본 것은 자기네

나라 영국이다. 낯선 나라를 통해 되비쳐오는 제 나라의 얼굴 만나기, 그것이 여행의 한 소득이라면 대학생활의 가장 자랑할 만한 성과도 나

아닌 것, 타자, 다른 세계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를 알고 넓어지는 것이다. 이 자기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질문 던질 줄 아는

비판적 능력이다. 질문하는 능력의 확장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가 대학에 인정하는 높은 특권이 대학의 자유, 학문의 자유이다. 그것은 특권이되

모든 기득권을 거부하고 진리의 소유 주장을 심문하는 특권, 정신의 가장 활발하면서도 겸손한, 그리고 겸손해지기 위한 특권이다.

우리 시대의 한 탁출한 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최근의 에세이집 <유배에 대한 성찰>에서 모든 형태의 문화적 고정성에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유배자(exile)의 정신이며 자신은 그런 유배자의 하나라고 말한다. 그리고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말을 인용한다. “자기 집에서 편하지

않은 것, 그것이 도덕성의 한 부분이다.” 집으로 돌아와 타자의 존재를 보는 여행자, 그는 사이드의 유배자와도 비슷하다. 그 여행자의 소득에서

우리는 안주하지 않는 대학생활의 정신적 성취를 본다. 나중에 설혹 어떤 안거의 순간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질문없이 네모꼴로 오래오래 퍼져

앉은 자의 안주는 아니다.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jidoh@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