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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패셔니스타의 도(道)

<쉬즈 올 댓> <금발이 너무해> <클루리스> 등으로 본 패셔니스타의 도(道)

<쉬즈 올 댓>

낼모레 오십인 선배가 난생처음으로 반백년을 멀리하던 드라마에 빠졌다. 그래, 당신이 생각하는 그 드라마가 맞다, <도깨비>. 좋은 날도 좋지 않은 날도 어중간한 날도 <도깨비> 재방까지 돌려 보던 선배는 관심없다는 나를 붙들고 굳이 <도깨비> 스토리를 설명하다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근데 그 비서가 간신의 환생이야. 엄청난 복선이라고 할 수 있지.” … 요새 이런 사람 많다더니.

내가 손수 독사진까지 검색해 보여주어도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고 우기던 선배는 배우 이름이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망연자실, 자학에 빠졌다. 노안이 왔나봐, 아니야, 총기가 떨어진 거겠지, 설마 둘 다인 건가, 중얼중얼.

나는 총체적 노화에 시달리는 선배를 위로하고 싶었다. 남 일 같지가 않았다, 나도 멀지 않았거든. “괜찮아, 헷갈리는 사람 많대요. 도깨비 비서 연관 검색어가 간신이라니까? 그래도 왕여가 여진구인 줄 아는 사람보다는 낫잖아요.” 선배는 화들짝 놀랐다. “뭐라고? 왕여가 여진구가 아니라고?” 하… 우리, 내일부터라도 눈에 좋다는 루테인을 먹읍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직업이 디자이너면서도 내 분홍색 원피스와 자주색 원피스와 보라색 원피스가 모두 같은 옷인 줄 알고 내가 무지 검소하다고 믿던 선배가(그러고 보면 간신과 여진구 사건은 노안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 쇼핑을 하러 가겠다고 선언했다. “이동욱 스타일이 괜찮은 거 같아. 나도 이동욱처럼 목 올라오는 스웨터랑 무릎까지 오는 긴 니트를 입겠어.” 나는 그를 바라봤다. 퍽 난감했다. 선배는 이미 터틀넥 스웨터와 롱 카디건을 입고 있어요, 지난해 겨울에도 그랬고, 지지난해 겨울에도 그랬고. 다른 점이 있다면 댁이 이동욱이 아니라는 사실뿐.

그리하여 신장 170㎝의 낼모레 오십 선배는 184㎝의 1981년생 이동욱처럼 차려입기 위해 거금을 쏟아부어 원래 옷장에 있던 옷을 도로 샀다. <상의원>에서 우리 선조들이 말하기를 사람이 옷을 입어야지 옷이 사람을 입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이건 무슨 카디건 자락이 조선시대 양반들 도포 자락 못지않아(이동욱이 입기 전까지는 남성용 롱 카디건이 흔치 않아서 선배는 여자 옷을 입고 다녔다, 다시 말해 신장 170㎝가 입기 딱 좋은). 사람이 939년을 살더라도 14㎝ 자랄 수는 없거늘 패셔니스타의 길이란 참으로 멀고도 험하구나.

패셔니스타로 향하는 기나긴 도(道)에서 이정표 삼을 영화가 있다면 <쉬즈 올 댓>이다. 아무리 뜯어봐도 엄청 예쁜데 안경 끼고 바지에 물감 좀 묻었다고(심지어 주근깨 같은 걸 찍는 성의도 보이지 않는다) 폭탄 취급을 받는 레이니(레이첼 리 쿡)는 눈썹 다듬고 머리 자르고 화장하고 남자친구가 사준 비싼 원피스 입었을 뿐인데 하루아침에 여왕벌 수준으로 변신한다.

자, 레이니처럼 느닷없는 패셔니스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살펴보자. 레이니가 눈썹 다듬고 화장한 적이 없는 건 그런 걸 가르쳐줄 엄마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 나는 엄마 있지, 한창 피부 좋을 20대 초반에 돈도 안 주면서 피부관리실 다니라고 닦달한 엄마. 일생 바른말만 해서 내가 진짜 싫어하는 친구도 내 피부는 칭찬했는데! 김정원은 피부 하나만 좋아. 야, 피부 하나는, 이겠지. 어쨌든 엄마를 준비했다면 이제 머리할 돈과 원피스 사줄 남자친구만 있으면 되는데… 하아, 그런 친구를 구하느니 내 손으로 명품 사입을 돈 버는 편이 빠르겠지만… 아직도 못 벌고 있지. 안녕, 패셔니스타.

<금발이 너무해>

하지만 돈보다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다. 우수한 성적으로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수영복 차림으로 자기소개 비디오를 찍어 그 비디오 덕분인지 전공과 아무 상관없는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해 법조계 종(種) 다양성에 기여하는 <금발이 너무해>의 엘 우즈(리즈 위더스푼)는 마음이 극도로 쓸쓸할 때면 손톱 손질을 받으러 간다. 그녀가 속한 세계의 룰에 의하면 “그런 손톱으로 무슨 남자가 생기겠”으며 “마스카라를 안 하는 여자는 여자도 아니다”. 그래서 나도 마스카라 해봤더니 속눈썹이 안경에 부딪치던데 어떡하죠. 여기서 요점은 마스카라가 아니라 이거다, 안경테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데 구태여 마스카라를 칠하겠다는 삶의 자세.

지금은 잊힌 이름이지만 1990년대 초반 여대생들에게 패션의 혁명과도 같았던 영화 <클루리스>의 셰어(알리시아 실버스톤)는 이렇게 말한다, “꾸미는 건 혼돈의 세상을 조종하는 느낌”이라고. 혼돈의 얼굴을 정돈하는 느낌이기도 하지. 대학 졸업사진을 찍던 날, 처음으로 메이크업을 받으러 갔더니 미용실 언니가 슬퍼하면서 내 혼돈의 눈썹부터 정리하는 바람에 결국 지각했다고. “오래 걸려서 죄송해요, 이런 상태로 오실 줄은 모르고.” 아우, 아니에요, 이런 상태로 22년을 살아온 제가 더 죄송합니다.

<클루리스>

하지만 나는 일생이 사과의 연속이요 존재 자체가 죄송한 자, 그것을 마지막으로 내 눈썹은 단 한번도 전문가의 손길을 받지 못한 채 타고난 그대로의 여덟 팔자를 고수하고 있다. 웃고 있어도 슬퍼 보인대, 내 인생이 원래 좀 슬퍼, 눈썹 탓이 아니야.

패션으로 외교를 하는 대통령을 두고 내가 자주 들르는 인터넷 주부 커뮤니티에선 이렇게 평하곤 했다, 엄청나게 비싼 돈을 주고 맞춰 입는 옷일 텐데(저런 걸 기성복으로 팔 리는 없으니까) 저런 태가 나오는 걸 보면 옷 입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거다. 하지만 알고 보니 비싼 옷이 아니었어, 대통령 탓이 아니야. 그 색색의 인민복을 한동안 보지 못했더니 문득 그리워진다. 중독됐나봐, 이번엔 어떤 색으로 충격을 줄까 은근히 기대했는데. 봄이 오기 전에 그녀가 빨리 밖으로 나와 새로운 패션을 보여주면 좋겠다.

추리닝도 명품 되는 세상

패셔니스타로 향하는 길에 포석이 되어줄 두세 가지 사전 준비

<퀸카로 살아남는 법>

정신 승리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퀸카 레지나(레이첼 맥애덤스)는 누가 몰래 찢어놓은 탱크톱을 그냥 입어도 전교생이 따라 입는 패셔니스타다. 그게 예쁘냐고? 레지나가 예쁘다면 예쁜 거다, 얘는 원래 예쁜 옷만 입거든. 할리우드 스타가 입으면 새마을운동이라고 적힌 추리닝도 명품되는 세상, 마음만 굳건히 먹으면 나도 패셔니스타, 그리고 선배는 이동욱?

<쥬랜더>

피부 관리

벤 스틸러와 오언 윌슨을 두고 톱모델이라 우기는 후안무치한 영화 <쥬랜더>에는 피부에 관한 매우 소중한 충고가 나온다. 머리를 하나로 묶으면 이마가 뒤로 당겨지면서 땀구멍이 막혀 주변 피부가 건조해진다고. 요즘 피부가 건조하다 싶더니 날마다 머리 묶고 있어서 그런 거였어. 그런데 내가 날마다 머리 묶고 있는 이유는 날마다 집에 있기 때문이고, 날마다 집에 있는 이유는 날마다 노는 실업자이기 때문이니, 안녕, 패셔니스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진로 선택

영화잡지 창고에는 스크리너와 대용량 스틸을 담은 DVD, 자료로 장만한 DVD, 국내외 영화잡지, 나름 괜찮은 TV와 스피커, 그리고 대량의 먼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행복했지, 회삿돈으로 로완 앳킨슨 나오는 <블랙애더> 전편을 샀거든, 시즌1만 사면 되는데. 하지만 그 행복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영화잡지 창고에는 영화가 있고 패션잡지 창고에는 패션이 있구나, 저런 데 다닐걸. 작은 위안이라고는, 저런 회사 다녔어도 맞는 옷이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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