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News > 해외뉴스
미리 보는 <패닉 룸>
2002-04-16

공황의 방에 갇힌 어머니, 강철이 되다데이비드 핀처와 조디 포스터의 만남이 예사로운 것은 아니다. 도저한 무정부주의자이며 극단적인 스타일리스트 데이비드 핀처와 할리우드에서 가장 지적인 여배우 중 하나인 조디 포스터. 하긴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에 제대로 된 러브 스토리가 거의 없었음을 생각하면, <패닉 룸>에도 그런 건 없을 것이다. 기왕 여인이 주인공이 될 것이라면, 핀처는 오히려 도발적이고 당당한 여인을 좋아한다. <에이리언3>에서 시고니 위버의 머리를 밀게 하고, <파이트 클럽>에서 헬레나 본햄 카터의 퀭한 눈을 만들어낸 것처럼. <택시 드라이버>에서 충격적인 10대 창녀 역으로 화제를 모았고, <양들의 침묵>에서 연쇄살인범 렉터 박사와 기괴한 연정을 나누었던 조디 포스터라면 데이비드 핀처와의 궁합은 썩 어울린다.`안전한 방`에서 안전을 위협받다

컬럼비아대학의 교수인 메그(조디 포스터)는 딸 사라(크리스틴 스튜어트)와 함께 맨해튼의 거대한 4층집을 구한다. 저택의 전 주인은 강도가 침입할 때를 대비하여, 거울 뒤에 비밀의 방(패닉 룸)을 만들어놓았다. 콘크리트와 강철로 만들어져 외부에서 부수고 들어가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고, 생존하기 위한 필수품도 마련되어 있다. 외부로 연결되는 독립적인 전화(절대로 외부에서 끊을 수 없는)도 있고, 집 안의 모든 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에 연결된 모니터와 인터폰도 있다. 뭔가 섬뜩한 기분을 주지만, 분명 집 안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이사온 첫날 밤, 침입자가 들어온다.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집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는 당황하던 남자 셋은, 메그와 사라가 패닉 룸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메그는 경찰에게 신고했다면서 나가라고 하지만, 침입자들은 동요하지 않는다. 그들은 패닉 룸의 존재는 물론, 그 안에 설치된 비밀금고에 거액의 돈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동자인 전 주인의 손자 주니어(자레드 레토)는 할아버지에게 우연히 들었던 비밀금고의 거액을 다른 유산 상속인들 몰래 훔쳐내려 한 것이다. 주니어는 패닉 룸을 직접 설계하고 만든 기술자 버냄(포레스트 휘태커)을 찾아 범행에 가담시킨다. 덤으로 버스운전사인, 포악한 성격의 라울(드와이트 요아캄)까지. 그들은 메그와 사라가 안전하게 숨어 있는 패닉 룸으로 반드시 들어가야만 한다. 침입자들이 해머로 벽을 부수고, LPG 가스를 흘려보내기도 하지만 메그와 사라의 저항도 만만치는 않다.

<패닉 룸>의 초반은 데이비드 핀처답지 않게 유머가 많다. 세명의 침입자는 성격이 판이하다. 주니어는 덜떨어진 허풍쟁이다. 자신만만하게 떠들어대고, 큰소리도 지르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아무런 결정도 못하고 사고만 친다. 버냄은 아이의 양육비를 벌기 위해서 범행에 가담했다. 그는 사람은 절대로 해치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첫 장면부터 스키 마스크를 쓰고 나오는 라울은 버냄의 보조 정도로만 출발하지만, 상황이 어려워지자 사악한 본성을 드러낸다. 차갑고, 폭력적이다. 주니어가 침입자들을 이끌며 상황을 벌여갈 때에는 어쩐지 <나홀로 집에>의 성인판 같은 느낌이 든다. 자신들의 꾀에 자신이 넘어가고, 별것도 아닌 함정에 골탕을 먹는. 그러나 라울이 지배하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싸늘해진다. 모든 것은 지극히 폭력적으로 바뀐다.

패닉 룸이란 자신을 보호하고, 나아가 도둑이 자진하여 물러나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침입자들은 어떻게든 패닉 룸으로 들어가야만 목적을 이룰 수가 있다. 반대로 메그는 패닉 룸에서 무사히 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할 계획이나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 침입자들은 14일 뒤에야 새로운 주인이 들어온다는 정보를 믿고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상황은 서로 모순된다. 서로 상대방의 목적을 인정하고 양보하면 될 것도 같지만, 그들은 상대방을 믿을 수 없다. 거기서 충돌이 일어난다. <트리거 이펙트>와 <스터 오브 에코>의 감독이며 <미션 임파서블>과 <쥬라기 공원>의 작가인 데이비드 코엡의 시나리오는 치고 빠지는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공성전(攻城戰)이 지루해질 즈음이 되자, 이번에는 서로의 위치를 바꿔버린다. 침입자가 패닉 룸으로 들어가는 것에 성공하지만, 반대로 무기는 빼앗겨버린다. 하지만 무기를 들고 밖에 남은 메그는 경찰에게 신고할 수 없다. 혈당치가 낮아져 혼수상태에 빠진 사라가 여전히 패닉 룸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서로 호소한다. 메그는 침입자들에게 대신 주사를 놔달라고 호소하고, 침입자들은 무기를 버리라고 협박한다. 분명 서로 타협하고, 양보를 해야 문제가 해결되겠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다. 그만큼 절박하거나, 그만큼 믿음이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다.<꼬마 천재 테이트>에서 홀로 아들을 키웠던 조디 포스터는, <패닉 룸>에서 10대의 딸을 키우는 엄마로 나온다. 남편이 모델과 바람을 피워서 딸과 함께 독립한 가장. 사춘기의 딸과는 꽤 교감을 하는 편이지만, 한편으로 딸은 엄마를 ‘미쳤다’고 말한다. 패닉 룸 안에 갇혔을 때, 모녀는 서로 침착하라고 타이르며 또 고함친다. 메그는 약간 불안정하지만, 분명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적과 싸우는 데에는 물러섬이 없다. 약간 근육이 부족하긴 하지만, 싸우는 여성으로서 조디 포스터는 그리 손색이 없다. 게다가 촬영 당시는 조디 포스터가 임신을 했을 때였다. 4개월의 촬영기간 동안, 임신한 몸으로 그 ‘액션’을 연기한 것도 놀랍고 불어가는 몸을 제대로 유지한 것도 경이로운 일이다. 그 밖에도 난관은 많았다. 데이비드 핀처는 잘 알려진 완벽주의자. <세븐>에서 핀처의 스타일이 확립되는 데 큰 공헌을 했던 다리우스 콘쥐가 촬영감독을 맡았는데, 의견이 맞지 않아 도중하차하고 콘래드 홀 주니어로 교체되었다. 누구의 잘못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핀처가 한 장면을 100번 이상이나 찍게 한 적이 허다하다면 능히 짐작할 수 있다.할리우드 시스켐이 낳은 거인, 데이비드 핀처

데이비드 핀처는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성장한 거장이다. 뮤직 비디오에서 이름을 날리던 데이비드 핀처는 호화 프랜차이즈인 <에이리언3>의 감독으로 일거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 데이비드 핀처는 <에이리언3>의 무대를 남자들만 가득한 우울한 형무소 행성으로 설정했고, 게다가 에이리언의 아이를 뱃속에 가진 리플리까지 죽여버린다. 표범을 모델로 다시 디자인한 에일리언이 좁은 지하 통로를 비호처럼 뛰어다니는 장면만은 탁월했지만, <에이리언3>는 지나치게 칙칙했고 또 늘어졌다. 데이비드 핀처는 다음 작품으로 더 암울한 <세븐>을 만들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살인 현장에 들어가면 전등을 켜기보다 플래시 불빛으로 수사를 하는,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기묘한 도시. 그러나 극단적인 비관주의와 숨을 죽이게 하는 어둡고 매혹적인 영상은, ‘네오 누아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절찬을 받았다. 정말 게임처럼 신나게 놀았던 <더 게임>에 이어 데이비드 핀처는 <파이트 클럽>이란 걸작을 만들어낸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가득한 세상. 나의 존재와 가치가, 상품 카탈로그의 가구나 접시처럼 취급되는 시대. 한 남자가 ‘파이트’를 통하여 그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사회를 무너뜨린다. 빌딩들이 무너져내리는 마지막 광경은 호쾌하면서도 로맨틱한 명 장면. 지금 보면 9·11을 연상시키기도 하고.데이비드 핀처는, 걸작 한편을 만들고 나면 조금은 놀고 싶은 모양이다. <세븐> 다음의 <더 게임>처럼, <파이트 클럽> 다음의 <패닉 룸>은 즐거움이 느껴지는 영화다. 데이비드 핀처는 <더 게임>에서 결정적인 반전을 끄집어내기까지, 고전 추리소설의 트릭을 꾸며내듯 치밀하게 상황을 조작하느라 다른 곳에는 전혀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패닉 룸>에서는 좁은 공간에서, 소수의 인물들을 충돌시키며 스파크를 일으키느라 여념이 없다. <세븐>과 <파이트 클럽>이 세계와의 긴장, 충돌, 파국을 날카롭게 묘사했던 것과는 달리 <더 게임>과 <패닉 룸>은 기교와 ‘게임’에 귀를 기울인다. 데이비드 핀처가 애용하는, 벽이나 마루 환풍기 또는 인체의 살과 뼈까지 마구 통과하는 카메라는 <패닉 룸>에서 종횡무진 거침이 없다. <패닉 룸>은 오로지 집 안에서만 모든 일이 벌어진다. 게다가 중반까지는 서로 육체적인 접촉도 하지 않는다. 메그와 사라는 패닉 룸 안에서, 침입자들은 집 안 이곳저곳에서 서성거린다. 자칫하면 느슨해질 설정이지만, 데이비드 핀처는 세련된 카메라 워크와 인물들의 충돌로 그들의 공성전을 긴장감 넘치게 잡아낸다.긴장, 충돌, 파국의 조율사

조디 포스터의 연기는 안정되어 있고, 포레스터 휘태커도 마찬가지다. 소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자신이 설정한 타락의 선을 넘지 않으려 애쓰는 포레스터 휘태커의 모습은 <패닉 룸>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버냄은 침입자와 메그 모녀 사이에 놓인, 거대한 강이다. 서로가 넘을 수 없게, 서로가 쉽게 해칠 수 없도록 완충해주는. 신예인 크리스틴 스튜어트도 반항적인 10대의 분위기를 잘 드러낸다.<패닉 룸>은 <파이트 클럽>처럼 해머로 머리를 내려치듯 충격적인 영화는 아니다. 그냥 가볍게, 묘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공방을 잡아내는 소품이다. 데이비드 핀처의 목적이 무엇이건, <패닉 룸>이 세련되게 다듬어진 ‘웰 메이드 무비’라는 것은 확실하다. 비록 그의 비관적인 세계관이 정면으로 노출되지도 않고, 음울한 스타일이 너무 정형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핀처는 이미 두편의 걸작을 만들었고, 그 사이에 수작들을 끼워놓았다. <패닉 룸> 이후에 무엇이 다가올지 기다려지는 이유는 그것이다.도쿄=김봉석/ 영화평론가

▶ 조디 포스터 인터뷰 `힘들지 않았냐고? 임신은 장애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