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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감독, 관객을 만나다 [4] - 류승완 ①
사진 손홍주(사진팀 선임기자) 정리 최수임 2002-05-10

“일단 뭐든 해봐요, 사는게 공부잖아요”

(두 손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일어나) 안녕하세요. 영화배우 류승완입니다. (웃음) ‘나의 인생 나의 영화’라는 걸로 아무 얘기나 하라는데, 학교 다닐 때 보면 듣기 싫은 얘기 자기 혼자 몰입해서 막 떠드는 사람들 짜증나잖아요. 지금 지나다가 그냥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신 분도 있고 하실 테니까. 그냥 류승완이라는 사람이 영화를 만들기까지 어떻게 살았나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저는 1973년 12월15일 충남 온양에서 태어났구요, (웃음) 다섯살 땐가 여섯살 때, 천안아카데미극장에서 영화를 처음 봤는데, 장철 감독의 <철장>이라는 영화였어요. 일본 도장에서 배신자의 눈알을 뽑는 장면이 인상깊었죠. (웃음) 저는 어려서 주위가 산만한 아이였고,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에 성룡 영화를 처음 봤는데, 바로 그해에 류승범이 태어났어요. 제 장난감을 부러뜨리는 바람에 류승범이 액션연기 하는 데 제가 많은 도움을 줬죠. (웃음) 저는 지방에 살아선지 특히나 영화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학교에서 장래희망 쓰라 그러면 항상 그 주에 봤던 영화의 주인공 직업을 썼어요. (웃음) <승리의 탈출>을 봤을 때는 축구선수, 을 봤을 때는 첩보원이라고 썼죠. 중2 때 서울로 올라왔는데, 성룡 같은 액션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근데 ‘아무도 날 배우로 써주지 않을 테니까 내가 찍자’ 했죠. 그땐 감독이 있는 줄 모르고 카메라하고 배우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카메라를 사려고 돈을 모았죠. 근데 <스크린>을 쫙 모아놓은 친구가 잡지를 보여주면서 ‘영화는 감독이 만드는 거다’라는 거예요. 보니까 감독이 멋있어 보이더라구요. 고2 때부터 8mm 필름카메라로 영화를 만들었어요. 공부와는 점점 멀어져서 남들 대학 다닐 때 일하고, 박찬욱 감독하고 힘든 시절 같이 보내고 그러다가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영화 얘기를 하자면, 저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때문에 필요 이상의 환대를 받았다가 그 부작용을 <피도 눈물도 없이>로 받은 것 같아요. ‘너무 요란한 환대는 건강에 안 좋다’는 예가 저예요. (웃음) 뭐, 이렇구요, 저는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산 사람도, 천재도 아닙니다.

(사회자: 류승완 감독은 보통 영화광들이 유럽 등지의 예술영화들을 보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온 것과 달리 아주 대중적인 영화에서 자양분을 얻은 경우입니다. 홍콩이나 할리우드영화 등 장르영화에 매혹당했고, 그런 영화를 한국에서 지금 만들고 있죠. <죽거나…>는 단편옴니버스였고, <피도…>가 첫 장편인 셈인데, 사실 <피도…>가 첫 영화였으면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자, 그럼 질문 시작할까요?)

-단편영화와 장편영화 만드는 시스템 차이랄까, 장편이 어려운 점을 말해주세요.

=보통 저예산 독립영화와 메인스트림 영화작업의 차이에 관한 질문은 많이 받는데, 그럴 때는 ‘별 차이 없다’고 하는데, 이런 질문은 처음이군요. 단편과 장편은 연출자의 자기관리능력이 얼마만큼 필요한가에서 차이가 나요. 단편은 촬영횟수가 많지 않으니까 체력이나 정신력을 유지하기 쉽죠. <피도 눈물도 없이>는 70회 넘게 찍었는데, 체력적으로 아주 힘들었어요. 몸이 지치니까 정신적 집중도 떨어지고 처음 내가 뭘 만들려 했었나 흐려지기도 했죠. 그런 걸 빼면, 숏별 연출에서는 단·장편이 큰 차이 없었어요. 다만 제가 요즘 생각하는 게 장편만의 드라마 구조거든요. 단편영화는 필름 한권을 넘어가는 적이 없지만, 120분짜리 장편은 35mm 필름이 6권이죠. 단편은 필름 한권 안에 기승전결이 있지만, 장편은 필름 한권이 바뀌는 것을 기준으로 이야기 구조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주말연속극이 결정적인 장면에서 딱 끝나고 ‘다음 시간에’ 하듯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사이사이 분절점이 필름 한권의 끝마다 있는 건 아닌가. <피도…>는 뭘 완성했다기보다는 다음 영화 만드는 데 이런 식의 교훈을 준 것 같아요.

3년동안 데뷔작만 세 편 찍다

-<죽거나…> 찍을 때 감독과 주연을 같이 했는데, 어땠나요?

=힘든데 재밌었어요. 너무나 하고 싶었던 걸 하는 거니까. 찍을 때 이걸로 데뷔한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단편 만드는 것의 연장이었죠. ‘다른 방식’이구나, 하는 걸 느낀 건 <다찌마와 리>도 아니고 <피도…> 였어요. 상대하는 사람 많아지고, 스타랑 일하고. 흥분된다기 보다는 긴장됐어요. 이상한 건 <죽거나…> 보고 데뷔작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다찌마와 리> <피도…>를 그때마다 또 데뷔작이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3년 동안 계속 데뷔작만 만든 거예요. (웃음) 데뷔라는 의미가 없어졌고, 단지 규모가 자꾸 커질 뿐이었어요.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게 있잖아요, 두 번째 작품 실패에 대한 두려움. 저는 <피도…>도 그랬고, 그 다음도 그럴 거고, 계속 긴장할 것 같아요.

-공부를 별로 안 하셨다고 하는데, 현장 경험만으로 감독하는 데 부족함은 없나요? 감독이 되려면 어떤 게 제일 필요한지 궁금합니다.

=부족한 것 많죠. 제가 말은 그렇게 해도 공부를 했다면 한 놈인데(웃음) 이런 데 나오면 제일 무서운 사람들이 ‘현상은 어떻게 하셨나요?’, ‘조명은 몇 킬로를 썼어요?’ 그러는 사람들이에요. 그럼 저는 ‘왜 저한테 그러세요. 조명한 사람한테 물어보시지’ 그래요. (웃음) 저는 사실 그런 것 잘 몰라요. 사람들마다 다 재주가 다르잖아요. 심지어 초능력자도 손끝에서 광선이 나온다든지 하는 저마다의 특기가 있는데. (웃음) 제가 잘하는 건 엎드릴 때 바짝 엎드리는 건 것 같아요. ‘나 이거 좆도 모르니까 나 좀 봐달라’ 그러면서 엎드리는 거요. (웃음) 그러면 ‘어 알았어, 형. 이렇게 갈까’ 하면서 테스트한 걸 보여주거든요. 저는 제가 다 짜서 제시하는 게 아니라 도움을 많이 받는 편이에요. 그래서 캐스팅을 중시하죠. 배우만 아니라 스탭까지 포함한 캐스팅요. 나하고 마음 맞는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 사람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북돋워줘요.

감독으로서 필요한 자질에 정답은 없어요. 감독들마다 노하우가 다르거든요. 영화를 계속 만들어 나가려는 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 같고…. (객석 맨 앞줄의 어느 여자참석자를 가리키며) 저기 뭐 굳이 적으실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요. (일동 웃음) 그냥 생각나는 대로 얘기하는 거니까. 제가 오늘 아침까지 이창동 감독 영화 <오아시스> 출연을 하다 왔는데, 이창동 감독 보면서 아 감독은 이렇게 냉정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피도…> 찍을 때 보조 출연자가 투견장 2층 난간에서 떨어져서 하반신 불구가 될 뻔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순간 저는 모든 걸 접고 그 사람에게 달려가야 하나, 아니면 모니터 앞에서 계속 영화를 진행해야 하나, 정말 힘들었어요. 결국 메가폰을 들고 ‘다음 상황 진행합시다’라고 했는데, 마음이 많이 아프더라구요. 근데 그렇게 감독은 냉정해야 돼요. 현장에서 아무리 의기투합했어도 영화가 안 좋으면 스탭들과 관계회복이 안 되는데, 현장에서는 엄청 ‘뒷다마’ 까고 그랬어도 영화가 볼 만하면 작품 계속할 수 있거든요. 영화는 모든 스탭들의 손때가 묻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영화가 제일 소중한 거죠. 감독에게는 체력이 또 아주 중요해요. 스즈키 세이준이 영화 들어가기 전에 헬스클럽 다닌다는데, 정말 그런 게 필요하죠. 무엇보다 6mm 카메라로라도 자꾸 찍어보면서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구요.

-류승완 감독의 열렬한 팬입니다. 수려한 외모와 화려한 액션을 자랑하시는데 배우로 전향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웃음) 저는 가이 리치와 타란티노도 좋아하는데, <피도…>가 그 감독들 영화와 비슷하다는 말이 있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사랑합니다.(순간 객석엔 약간의 긴장감 흐름. 질문자는 남자였음)

=제가 치질이 있어서 격렬한 사랑행위는 못하거든요. (웃음) <피도…>가 네오누아르랑 비슷할 거라는 건 저는 찍기 전부터 얘기했었어요. 제가 네오누아르를 좋아하기 때문에 한번은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했죠. 더 잘 만들 자신은 없고, 큰 틀은 유지하되 디테일을 바꾸는 방식을 택했어요. 팜므 파탈이 아닌, 스스로 중심이 되는 여자인물을 설정했고, 쿨한 대신, ‘감정의 끈적거림’을 대결의 무기로 선택했죠. 심리적 충돌로서의 액션이요. 근데 보는 사람들이 그 차이를 못 느끼고, 심지어 표절이라고까지 하기도 하더라구요. 그게 장르영화 만드는 어려움인 것 같아요. 여기 계시지만 김봉석 기자한테 ‘과잉’이라는 지적도 받았고. 저는 제 욕망을 충실히 따르며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아쉬움은 있어도 후회는 없어요.

-신인배우 캐스팅하는 기준이 무엇인가요?

=기본적으로 대화가 되는 사람인가, 하는 걸 봐요. 표면적 이미지나 기본적인 재능도 보지만. 제일 두려운 부류는 너무 강렬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에요. 목숨이라도 걸 듯한…. 그런 사람들은 까딱하면 무수한 상처를 받고 말거든요. 영화현장에서는 그런 과도한 열정보다는 릴렉스하게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피도…>에서 여주인공 2명도 있지만 저는 독불이 역이 더 인상적이었거든요. 그것에 대해 얘기해주시구요, 필생의 프로젝트가 있다면 어떤 게 있는지 얘기해주세요.

=많이들 독불이 캐릭터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피도…>에서 제가 남자 캐릭터들에 힘을 실은 건, 주인공인 여자들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들을 강하게 그려서, 과연 저 여자들이 저 인물들한테서 탈출할 수 있을까, 싶게 하려 한 거예요. 그냥 강한 여자들이라기보다는 주변 상황들 때문에 강해진 여자들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인물 많은 영화가 처음이라 제 생각에도 드라마 장악력이 떨어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면서도 저 자신 여성을 잘 모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여배우와 표면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저도 사람이라 진행하다가 애정 가는 쪽에 더 힘을 싣게 됐던 것 같아요. 독불이라거나 백일섭 선생님 캐릭터가 그런 경우예요. 그리고 다음 프로젝트는, 아니 필생의 프로젝트는…. (웃음) 다음 게 언제나 필생의 프로젝트죠. 저는 무성영화에 가까운 활동사진을 만들고 싶어요. 버스터 키튼의 슬랩스틱코미디 같은 흥분이 살아 있는 영화요. 또 뮤지컬도 해보고 싶어요.

-<죽거나…>에서 식당에서 가족들이 말다툼하다가 딸이 심하게 뺨 맞는 장면을 보면서 상처를 받았어요. 혹시 여성에 대한 부당한 생각을 갖고 계신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는데.

=여성을 혐오한다거나 그런 건 전혀 없습니다. 딸도 있고, 참고로 제 와이프도 여자거든요. (웃음) 다만, 저는 강한 여자를 좋아하는 건 있어요. 와이프가 결혼 전에 저한테 이런 얘기를 했죠. 적들에 둘러싸였을 때 ‘피해!’ 그래서 여자가 등 뒤로 숨는 게 아니라, 같이 등을 맞대고 싸우는 사이가 되자고. 지금은 제가 숨는 처지가 됐지만. (웃음) 하여튼 얘기하다가 따귀 때리고 그런 거는, 저는 현실에서는 많이 봤어요. 룸살롱 여자들이 싸우는 걸 보면 장난이 아니에요. 하이힐로 찍고…. 현실이 더 영화적이죠. 그걸 일부 차용한 것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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